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Gnaeus Arrius Antoninus, 31년~??)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외조부이다.
생애
[편집]집정관 계급의 가문인 아리우스 씨족 출신의 안토니누스는 공직자이기도 하였고, 두 차례나 집정관 직을 수행하였는데, 첫 차례에는 69년에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를,[1] 그리고 두 번째에는 97년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동료 집정관으로 두었었다.[2] 안토니누스는 또한 78/79년에 아시아 속주 지역의 프로콘술이기도 했다.[3]
안토니누스는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인 소플리니우스의 친구이자 편지를 주고 받는 이이기도 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네르바가 96년에 황제가 되자 그를 동정하였다면서, 안토니누스를 ‘올바른 자’로서 묘사하였다.[4] John Grainger는 “그는 T.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P. 율리우스 루푸스, M. 안니우스 베루스 등이 포함되었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를 중점으로 하고 스페인 지역에 퍼져있던 강력한 귀족 공동체 내에서 유력한 인물이라 언급한다."[5]
가정
[편집]안토니누스는 보이오니아 프로킬라(Boionia Procilla)와 혼인하여, 아리아 안토니나(Arria Antonina), 아리아 파딜라(Arria Fadilla) 등 딸 둘을 두었다. 파딜라는 89년에 직권집정관이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와 혼인하였으며, 이들 사이에는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라는 자녀가 유일했는데 이 자가 바로 황제 (재위 138-161년)가 된 안토니누스 피우스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하였다. 풀부스가 죽은 뒤, 파딜라는 98년에 보조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와 혼인하여 율리아 파딜라(Julia Fadilla), 아리아 루풀라(Arria Lupula) 등 딸 둘을 낳았다.
안토니누스가 외손자를 길렀고, 그가 사망하자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그의 재산을 상속했다. 양쪽으로 상속을 받아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각주
[편집]- ↑ G.B. Townend, "The Consuls of A. D. 69/70",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83 (1962), pp. 113-129
- ↑ As determined by Fausto Zevi "I consoli del 97 d. Cr. in due framenti gia' editi dei Fasti Ostienses", Listy filologické / Folia philologica, 96 (1973), pp. 125–137
- ↑ Werner Eck, "Jahres- und Provinzialfasten der senatorischen Statthalter von 69/70 bis 138/139", Chiron, 12 (1982), p. 300
- ↑ Historia Augusta, "Antoninus Pius", 1.4
- ↑ Grainger, Nerva and the Roman succession crisis of AD 96-99 (London: Routledge, 2004), p. 4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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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리우스 사비누스 |
로마 제국의 집정관 69년 with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
이후 파비우스 발렌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
이전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3선,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3선 (직권집정관) |
로마 제국의 보좌 집정관 97년 with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이후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보좌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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