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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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노미야 아사히코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일본어: 久邇宮 朝彦親王 (くにのみや あさひこしんのう) 쿠니노미야 아사히코 신노[*], 분세이(文政) 7년(1824년 3월 27일) - 메이지(明治) 24년(1891년 10월 25일))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말기(막말)에서 메이지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황족으로 나카가와노미야(中川宮)라는 호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닌코 천황(仁孝天皇),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으로 내려오는 3대 동안 황실과 천황의 조언자로서 활약하였다.

생애[편집]

가계[편집]

일본 교토(京都)에서 출생하였다. 황위계승서열에 우선하는 4대 세습친왕가(世襲親王家) 중 하나인 후시미노미야(伏見宮) 가문의 20번째 당주인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伏見宮邦家親王)의 4남이다. 여러 이름을 부여받았으나 흔히 '아사히코 친왕' 혹은 '나카가와노미야'로 불렸다. 또한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山階宮晃親王),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東伏見宮依仁親王),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北白川宮能久親王),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의 이복형제이기도 하다.

초기[편집]

일찌감치 후계자가 아닌 황족들이 다수 그랬던 것처럼 승려가 될 것으로 여겨져 1831년 교토 혼노지(本能寺)에 보내졌고, 이후 1836년 나라(奈良)의 고후쿠지(興福寺)로 거처를 옮겼다. 1837년 닌코 천황의 유자(猶子)[1]가 되어 친왕(親王)에 봉해지고 '나리요리(成憲)'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1838년에는 고후쿠지 내의 이치조인(一乗院)의 문주(門主)가 되면서 '존오에(尊応)'의 법명을 부여받았다. 1852년(가에이(嘉永)7년), 천태종(天台宗) 계의 쇼렌인(青蓮院)의 문주(門主) 자리에 올라 법명을 '존유우(尊融)'로 개칭하였다. 이후 쇼렌인노미야(青蓮院宮) 혹은 당시 절이 있던 지역의 이름을 따 아와타노미야(粟田宮)로도 불렸다.

양이 활동[편집]

메이지 시대의 활동[편집]

자녀[편집]

아사히코 친왕은 네 명의 여관(女房, 뇨보)와의 사이에서 9남 9녀를 두었다.

각주[편집]

  1. 한국에서는 흔히 '조카'를 뜻하나 메이지 시대 이전의 일본에서는 일종의 양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였다. 부자 관계를 맺기는 하나 계약에 의하며, 양자가 되는 자녀 쪽의 성이 바뀌거나 하는 일 또한 없어 실제 양자가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