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국보95호)
고려청자(高麗靑磁)는 고려 문종(文宗)시대 전 후에 송(宋)의 화남 절강성 월주요(華南浙江省越州窯)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것으로서 그 변천은 청자의 발생에서 쇠퇴까지 각 기간을 3기, 300년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 구분과 해당 기간 중의 청자의 특색과는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초기의 청자는 매우 소박한 데서 출발하여 점차 기술이 숙련됨에 따라 예종(睿宗)·인종(仁宗) 때에 이르러 이른바 비색청자시대(翡色靑磁時代)를 이루며 고려청자의 진면목을 보이는 상감청자를 낳는데 이는 순전히 고려인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상감청자가 다시 동철기(銅鐵器)에 접목(接木)되어 은동상감기(銀銅象嵌器)를 낳고 고려 말기에 이르러 청자는 실질적으로 쇠퇴하여 속화(俗化)되고
쇠퇴기의 청자[편집]
고려청자가 쇠퇴하는 제3기(1250년-1350년)로서 그 기간은 1세기로 보나 몽골이 침입한 14세기 후반부터 시작한다면 실제로는 1세기 반이나 된다. 이른바 국가의 말기적인 증상이 미술에도 반영되어 청자기의 퇴조를 보이는데 중국 자체도 원(元)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전통적인 청자가 소멸되며 그러한 변화는 고려청자에도 미친다. 청자의 표면이 황록색조를 띠거나 비색(翡色)을 잃으면서 상감의 무늬도 산만하고 조잡해지며 같은 무늬를 반복 사용하는 등 무의미한 도안으로 바뀐다. 기형은 매병(梅甁)이 줄어드는 대신 접시류가 늘고 대접은 안이 깊어지고 측면이 평평한 광구대(廣口臺), 바닥이 좁아진 변형된 매병 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진사(辰砂)·화청자(畵靑磁) 같은 특수한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외에 철채자기(鐵彩磁器)가 등장하기도 한다. 무늬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간화(簡化)되고 조야(粗野)해지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사기 및 철화백자와 연결된다.
종류[편집]
청자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뉜다.
- 순청자(純靑磁) - 청자 일색의 무문·양각·음각·상형·투각문 등의 청자로서 상감이나 화문청자는 제외된다.
- 상감청자(象嵌靑磁) - 그릇이 마르기 전 무늬를 선각(線刻)하고 백토나 흑토로 메워 초벌구이 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구운 것인데 간혹 진사(辰砂=酸化銅)를 섞어서 밝은 홍색을 내게 한 것도 있다. 또 흑토상감(黑土象嵌)의 배경 위에 넓은 화판(花瓣)의 백토상감(白土象嵌)을 한 모란·보상화문을 두어 흑백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것도 있고 필요한 무늬는 청자색으로 그냥 두고 배경만 깎아 백토로 메워 무늬를 노출시키는 박지문(剝地紋)이라고 불리는 역상감법도 있다.
- 화청자(畵靑磁)-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발라 굽는 유리화(釉裏畵) 유표면 즉 광택 위에 무늬를 집어넣는 유표화(釉表畵)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백토나 흑토 또는 철사(鐵砂)·진사로 태토 위에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유약을 바르는 유리화가 태반을 이루며 이것은 중국의 도기요(宋:修武窯, 元:磁州窯) 등에서 받은 영향으로 믿어진다. 또 백토나 흑토로 그렸을 경우 그 채료(彩料)를 붓에 듬뿍 묻혀 무늬가 두드러지게 한 것은 퇴화문(堆花紋)이라고 한다. 때로는 태토 전면에 자토를 발라 배경을 흑일색으로 하고 그 위에 무늬를 백토로 그리고 청자유를 씌운 철채자기(鐵彩磁器)가 말기에 와서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고식(古式)의 흑백역상감을 화문으로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듯하다. 유표화에 있어서는 금니(金泥)로 그릇 표면에 화문을 그리는 것인데 이는 실용이라기보다 사치를 목적으로 한 특수기로 쓰여졌고 수량도 적다.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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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 장식 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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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비룡형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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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모양의 연적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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