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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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보물 제431호 (1965년 9월 1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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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남북국 시대 |
위치 | |
주소 |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4 |
좌표 | 북위 35° 58′ 54″ 동경 128° 44′ 11″ / 북위 35.98167° 동경 128.73639° |
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은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4번지에 위치한 불교 석상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일명 '갓바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대한리에 위치한 조계종 직영의 선본사가 소유 및 관리를 맡고 있다.
처음 통일신라시대에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로 조성되어, 고려시대에 8각 보관이 씌여져 미륵불이 되었다. 조선시대 이후로 팔공산이 약사여래신앙의 성지가 되면서 약사여래불이 된 것으로 보인다.[1][2]
위치[편집]
경상북도 경산시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의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좌불상이다. 원래 불상이 있는 봉우리의 이름이 관봉이 아니었는데, 고려시대부터 '갓(冠)'을 쓴 불상이 유명해져 봉우리의 이름이 관봉으로 바뀐 특이한 경우이다.
지세[편집]
팔공산은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다. 팔공산의 중앙부는 산세가 좋은 편이며, 동화사가 있는 자리는 따뜻하고 바람을 막아준다.
동화사라는 이름 자체가 한 겨울 눈 속에서도 오동나무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절의 위치가 봉황의 아기궁이라 하여 입구에 알 모양 조각이 있다.
반면 관봉은 날개부분이라 경사가 심한 편이며 중앙부에서 능선을 타고 외곽인 관봉까지 올 경우 밧줄로 암벽을 타고 오는 등산로까지 있을 정도로 험하다. 그러므로 경산시에서 선본사를 통해 오거나, 대구시에서는 401번 종점을 통해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이 현명하다.
오는 길[편집]
팔공산은 대구 쪽에서는 경사가 가파르고 경상북도 쪽에서는 경사가 완만하다. 등산로는 제외한 길을 다음과 같다.
대구[편집]
자가용, 401번 버스, 관광용 버스를 타고 팔공산 갓바위시설 지구 주차장에 내린다. 팔공산 관리사무소를 지나 관광해설소, 관암사에 도착하면 1년 365일을 뜻하는 1365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길을 따라 45분 정도 올라가면 갓바위에 도착한다. 한 겨울 눈이 내리면 빙판이 되어 올라가기가 힘들다. 그러나 대구 401번 버스가 10분마다 운행해서 대중교통이 편하다.
경산[편집]
자가용, 803번 버스, 관광용 버스를 타고 선본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선본사 계단이 대구쪽 계단 보다 훨씬 더 좋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사찰에서 제설가루를 뿌려 빙판이 되는 일도 없다. 보통 25분이 걸린다. 그러나 경산 803번 버스의 운행간격이 30분 ~ 1시간에 달해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특징[편집]
팔공산의 봉우리에 있던 천연 암석을 깎아 들어가며 만든 불상이다.[3]
후에 팔각형 연꽃무늬 관(冠)을 불상의 머리에 얹었으나 지금이 많이 훼손되어 '갓'처럼 보인다.
제작자[편집]
통일신라때 의현스님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불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밤이면 학들이 날아와 추위를 지들이 물어준 양식으로 연명하며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4]
신체적 특징[편집]
-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뚜렷하다.
-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탄력이 있지만,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있다.
-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굵고 짧은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시되어 있다.
- 어깨는 다소 올라가고 넓고 반듯해서 당당하고 건장하지만 가슴은 평판적이고 신체의 형태는 둔중해진 듯하다.
- 두 손은 투박하지만 정교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 색깔[편집]
1990년대 초만 해도 부처의 몸에까지 촛불을 피우는 별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으름으로 지금보다 더 시커맸다.
또한 예전에 가뭄이 들면 사람들이 팔공산 관봉(갓바위) 부처에게 불을 질렀다. 부처가 쌔까매지면 용이 놀라 부처를 씻기 위해서 비를 내려주었다고 한다.[5]
이 두 가지 요인때문에 부처의 색깔이 군데군데 거뭇하다.
수인[편집]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불좌상이다.
대좌[편집]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4각형인데 앞면과 옆면으로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다.
광배[편집]
불상의 뒷면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광배의 구실을 하고 있으나, 뒷면의 바위하고는 떨어져 따로 존재하고 있다.
제작 시기[편집]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형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9세기 불상의 특징이 있다. 하지만 부처의 얼굴이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대좌 형식이 고식이어서 8세기 불상의 특징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9세기 초반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6]
'갓(冠)'에 대한 논란[편집]
2012년 경에 선본사는 1억 6천 만원을 들여 불교문화연구소와 3D 촬영을 하고 분석을 하였다.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7]
'갓'은 자연석인가?[편집]
흔히 알려지기는 갓바위의 '갓'은 자연석을 단순 가공해 머리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사 결과 '갓'의 윗면에는 보상화(寶相華)가 새겨져 있었다.
보상화는 꽃잎이 5개의 가상의 꽃으로 불교에서 만다라화라고 부르는 흰색 연꽃이다.
그러므로 돌을 8각형으로 가공하고 보상화 무늬를 새긴 다음 홈을 내어 부처의 머리에 올린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풍화되고 사람들이 불을 지르는 등의 훼손을 가하였다.
그 결과 깔끔한 8각형의 '관(冠)'이 세월이 지나면서 현재의 불규칙한 '갓'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갓'은 언제 올렸나?[편집]
익히 알려진 바로는 부처는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고 '갓'은 고려시대에 올렸다고 전해져 왔었다.
하지만 선본사와 불교문화연구소는 3D 촬영을 통해 '갓'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보상화 무늬는 통일신라 기와 등에 나타나고 있어 '갓'도 통일신라 시기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종류에 대한 논란[편집]
보통 이 부처를 약사여래불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따른 유추[편집]
수인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석가모니불인 석굴암 본존불, 아미타불인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와 똑같다.
이렇게 유추하면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둘 중에 하나이다.
약합에 따른 유추[편집]
불상의 왼손바닥 안에 조그만 약합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이 사실로 유추하면 약으로 중생을 치료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불이다.
그러나 이 왼손바닥에 있는 것이 약합이 아닌 엄지손가락으로 밝혀졌다.[8]
'갓'에 따른 유추[편집]
'갓(冠)'을 쓰고 있다는 것에 따르면 미륵불이다. 고려시대 문화재인 논산 관촉사 은진 미륵을 보듯이 미륵불상은 흔히 관(冠)을쓰고 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가모니불(또는 아미타불)에다가, 8각 보관을 고려시대에 씌워서 미륵불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9]
잘 보이지도 않는 손가락 또는 약합을 가지고 약사여래로 칭하는 것보다는 거대한 '갓'을 가지고 있어 미륵불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또한 1934년 편찬된 화성지(花城誌)에 다음 기록이 있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을 관봉 미륵불이라고 불렀고, 이 부처님에게 비를 빌거나 복을 빌면 바로 이루어졌다고 한다."[10]
시대별 갓바위 부처 종류의 변천[편집]
- 통일신라 :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 고려시대 : 미륵불
- 조선시대 : 미륵불 또는 약사여래불
- 현재 : 약사여래불
불상 종류에 대한 논쟁이 의미가 없는 이유[편집]
불상은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다른 공간이나 세계에 있는 부처님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불상은 부처님과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직통 휴대폰이라고 보면 된다. 이 불상이라는 휴대폰의 성능은 사람들의 기도와 믿음, 정성, 노력으로 한없이 발전된다.
그래서 매일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은 기도처에 있는 불상들이 영험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매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명호)으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현재는 약사여래불로 보면 되는 것이다.
문화재 지정[편집]
사진[편집]
팔공산의 다른 봉우리들[편집]
각주[편집]
- ↑ 본문 "불상의 종류에 대한 논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 ↑ 이, 재우 (2013년 5월 16일). “팔공산은 '약사여래 신앙' 발상지…?”. 《주간불교》 (주간불교). 2023년 2월 28일에 확인함.
- ↑ 박, 봉영 (2013년 5월 30일). “기도성지 갓바위는 어떤 부처님일까”. 《불교포커스》. 불교포커스.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측정 결과 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암석은 회백색의 조립질, 반상조직의 화강암으로 몬조 화강암에 해당한다. 팔공산 화강암체를 이루는 화강함과 재질이 유사해 팔공산의 바위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경산팔공산갓바위”. 《경산시 문화관광》. 경산시. 2019년 6월 7일.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신라때 의현스님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밤이면 학들이 날아와 추위를 지켜주고 3식 식사도 그들이 물어준 양식으로 연명하며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 ↑ “경산팔공산갓바위”. 《경산시 문화관광》. 경산시. 2019년 6월 7일.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와촌에는 가뭄이 들면 팔공산 관봉(갓바위)에 불을 지르고 새까맣게 태우면 용이 놀라 부처를 씻기 위해서 비를 내린다고 한다.
- ↑ 박, 봉영 (2013년 5월 30일). “기도성지 갓바위는 어떤 부처님일까”. 《불교포커스》. 불교포커스.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불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34년 편찬된 화성지(花城誌)에 의하면 사람들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을 관봉 미륵불이라고 불렀고, 이 부처님에게 비를 빌거나 복을 빌면 바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서도 "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존명에 대해 미륵불이라고 한 경우도 있고, 약사불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팔공산 갓바위 부처…국보 지정 신청할 것””. 《조인스닷컴》. 중앙일보. 2010년 6월 10일. 2020년 4월 5일에 확인함.
조성시기에 대해서도 9세기 후반 보다 앞선 9세기 전반일 가능성이 높다고 김 교수는 밝혔다. 9세기 양식이면서도 8세기 양식으로 보이는 일부 특징이 확인되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갓바위 부처님의 얼굴부분이 입체적이면서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대좌 형식이 고식인 점은 8세기 조성된 불상의 특징적 요소이며, 거불이면서도 얼굴이나 항마촉지인의 손 조각이 섬세하고 상체의 입체감이 살아 있는 점을 볼 때 9세기 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강조했다.
- ↑ 문화부, 문화부 (2019년 4월 20일). “[광장] 갓바위 불상에 관한 단상(斷想)”. 《아이매일》. 매일신문.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불상의 왼손에 작은 약합이 있어 약사여래불로 인식되어 왔으나 실은 약합이 아니라 엄지손가락이며, 갓을 쓰고 있어 미륵불로 보는 시각도 있다.
- ↑ 배, 기수 (2022년 11월 11일). “[탐방] 대구 팔공산(선본사) 갓바위를 찾아서”. 《티뉴스》 (티뉴스). 2023년 2월 28일에 확인함.
- ↑ 박, 봉영 (2013년 5월 30일). “기도성지 갓바위는 어떤 부처님일까”. 《불교포커스》. 불교포커스. 2020년 4월 6일에 확인함.
불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34년 편찬된 화성지(花城誌)에 의하면 사람들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을 관봉 미륵불이라고 불렀고, 이 부처님에게 비를 빌거나 복을 빌면 바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서도 "관봉 석조여래좌상의 존명에 대해 미륵불이라고 한 경우도 있고, 약사불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문화재청고시제2010-89호(국가지정문화재 보물지정), 제17328호 / 관보(정호) / 발행일 : 2010. 8. 25. / 63 페이지 / 1.2MB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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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