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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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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스(gens, 복수형 gentes) 또는 씨족고대 로마에서 동일한 노멘 겐틸리키움(nomen gentilicium, 씨족명)을 공유하며 공통의 조상을 주장하는 개인들로 구성된 친족 집단이었다. 겐스의 분파는 때때로 별개의 코그노멘으로 식별되기도 했는데, 이를 스티르프스(stirps, 복수형 stirpes)라고 불렀다. 겐스는 로마 공화국 시대의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중요한 사회구성체였다. 개인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 부분 그들이 속한 겐스에 따라 결정되었다. 특정 겐스는 파트리키(귀족)로 분류되었고, 다른 겐스는 플레브스(평민)로 분류되었으며, 일부는 귀족과 평민 분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사회 구조로서 겐스의 중요성은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서 상당히 감소했으나, 겐틸리키움은 황제들을 포함한 고대 로마인들의 출신과 왕조를 정의하는 역할을 계속했다.[1][2]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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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의 겐스(gens)라는 단어는 본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인종", "민족"은 물론 "씨족", "친족", "부족"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다만 트리부스(tribus)라는 단어는 로마 문화에서 별개의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겐스는 단일 가족만큼 작을 수도 있고, 수백 명의 사람을 포함할 수도 있다.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479년 파비우스 씨족(Fabia gens)는 그들만으로 전투 연령의 성인 남성 306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겐스의 개념은 로마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고, 라틴어, 오스크어, 움브리아어와 같은 이탈리아어파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들 뿐 아니라 언어 계통이 다른 에트루리아인 등 이탈리아 전역의 집단들이 공유하던 것이었다. 이 모든 민족은 결국 로마 문화권으로 흡수되었다.[1][2][3][4]

가장 오래된 겐스들은 로마의 건국(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이전부터 기원했다고 전해지며, 멀리는 트로이 전쟁(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1184년 종료[5])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적 인물들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겐스의 확립은 세습 성씨의 도입보다 훨씬 앞설 수는 없다. "씨족명"을 뜻하는 노멘 겐틸리키움은 겐스의 구별되는 특징이었는데, 로마 시민의 노멘은 그가 어떤 겐스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기 때문이다.[1][4][5][6]

노멘은 조상의 이름, 개인의 직업, 신체적 외모, 성격, 또는 출신 마을 등 여러 가지 것에서 유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 중 일부는 상당히 흔한 것이라 혈연관계가 없는 가족들이 동일한 노멘을 가질 가능성이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혼동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겐스에 입양되어 그 노멘을 얻을 수 있었다. 해방노예(libertus)는 보통 자신을 해방시켜준 사람의 노멘(때로는 프라이노멘까지)을 따랐으며, 귀화한 시민은 보통 자신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후원자(patron)의 이름을 땄다. 해방노예와 새로 시민권을 얻은 이들은 엄밀히 말해 이름을 공유하는 겐스의 일부는 아니었으나, 몇 세대가 지나면 그들의 후손을 원래의 구성원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실질적으로 이는 한 겐스가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새로운 구성원, 심지어 새로운 분파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1][2][7]

스티르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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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겐스의 서로 다른 분파인 스티르페스(stirpes)는 대개 노멘 뒤에 붙는 추가적인 성씨인 코그노멘에 의해 구별되었으며, 이는 개인적일 수도 있고 세습될 수도 있었다. 특히 규모가 큰 일부 스티르페스는 스스로를 여러 분파로 나누고 추가적인 코그노멘으로 구별하기도 했다.[1][4]

프라이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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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겐스에서는 정해진 수의 개인 이름, 즉 프라이노미나(praenomina)를 정기적으로 바꿔 붙였는데, 겐스 내에서 구성원 간의 구별을 위한 것이었다. 종종 겐스의 분파마다 선호하는 이름에 차이가 있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인 겐스들은 서너 개의 프라이노미나만 사용하기도 했고, 다른 겐스들은 6~7개를 정기적으로 사용했다.[1][2]

이러한 이름의 제한된 선택에는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가문의 이름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것은 전통이었으며, 그렇게 물려받은 이름들이 항상 선호되었다. 둘째,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자신들을 평민과 구별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수의 이름만을 사용했다. 평민들은 귀족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름을 포함하여 더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되고 고귀한 일부 귀족 가문들은 드물고 특이한 프라이노미나를 빈번히 사용하기도 했다.[4][7]

또 어떤 가문들은 특정 프라이노미나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적어도 몇몇 사례에서는, 특정 이름을 가진 겐스의 구성원이 불명예나 수치를 겪은 역사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유니우스 씨족(Junia gens)은 두 명의 구성원이 반역죄로 처형된 후 티투스(Titus)와 티베리우스(Tiberius)라는 이름을 피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만리우스 씨족(Manlia gens)는 집회에서 구성원들이 마르쿠스(Marcus)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전해지나, 이 금지령이 엄격하게 지켜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1][3][4][8]

겐스의 사회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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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 각 겐스는 국가 내의 국가처럼 기능하여, 가문의 원로들과 집회에 의해 통치되고, 고유의 관습을 따르며, 독자적인 종교적 의식을 수행했다. 특정 숭배 의식은 전통적으로 정해진 겐스와 연관되어 있었다. 겐스 집회는 구성원들에 대한 입양과 후견의 책임을 졌다. 만약 겐스의 구성원이 유언을 남기지 않고(intestatus) 직계 가족도 없이 사망하면, 그의 재산은 겐스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배분되었다.[1][2]

겐스의 결정은 이론적으로 모든 구성원에게 구속력을 가졌다. 그러나 겐스 집회에서 통과된 공공 법령이 기록된 바는 없다. 집단으로서 겐스는 로마법과 종교 관습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로마의 정치 및 헌법 역사에 미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1][2]

귀족 및 평민 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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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겐스는 귀족(파트리키)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겐스는 평민(플레브스)으로 간주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귀족들은 "국부들"을 뜻하는 파트레스(patres), 즉 초대 로마 국왕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당시의 가부장들의 후손이었다. 왕정 시대에 로마로 온 다른 고귀한 가문들도 귀족 계급에 수용되었는데, 여기에는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 후 알바 롱가에서 이주해 온 여러 가문이 포함된다. 기원전 1세기 이전 귀족 계급에 수용된 마지막으로 알려진 사례는 기원전 504년, 공화정 수립 5년 후 로마로 온 클라우디우스 가문(Claudii)이 귀족 반열에 합류했을 때이다.[1][2][3][6]

많은 자료는 귀족 겐스 내에 '겐테스 마이오레스'(gentes maiores, 대성씨)와 '겐테스 미노레스'(gentes minores, 소성씨)로 알려진 두 계급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어떤 가문이 대성씨에 포함되었는지, 그 수가 몇이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으나, 여기에는 거의 확실히 아이밀리우스(Aemilii), 클라우디우스(Claudii), 코르넬리우스(Cornelii), 파비우스(Fabii), 만리우스(Manlii), 그리고 발레리우스(Valerii) 씨족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구분이 실질적으로 중요했는지도 확실치 않으나, 로마 원로원의 의장인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가 대개 이들 중에서 선출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

공화정 초기 수십 년 동안 어떤 겐스가 귀족이고 평민이었는지는 온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 451년과 450년에 공포된 12표법은 계급 간의 엄격한 구분을 법전화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때부터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이 통과될 때까지 평민들이 주요 관직을 맡는 것을 공식적으로 배제했다. 12표법의 일부로 공포된 또 다른 법은 귀족과 평민의 통혼을 금지했으나, 이는 불과 몇 년 후인 기원전 445년 카눌레이우스 법에 의해 폐지되었다.[1][2]

기원전 367년 계급 간의 공식적인 화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귀족 가문들은 가능한 한 많은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이는 이후 2세기 동안 계급 간의 빈번한 갈등을 초래했다. 특정 귀족 가문들은 평민과의 권력 공유에 정기적으로 반대했고, 다른 가문들은 이를 찬성했으며, 일부는 가문 내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2][4][9]

많은 겐스에는 귀족과 평민 분파가 모두 존재했다. 이는 입양이나 해방을 통해 발생했을 수도 있고, 동일한 노멘을 가진 두 개의 무관한 가문이 혼동되면서 발생했을 수도 있다. 또한 겐스의 개별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귀족 계급을 떠나거나 그들의 후손과 함께 추방된 경우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본래 확실히 귀족이었거나 공화정 초기에 귀족으로 간주되었던 겐스들이 나중에는 평민 후손들로만 알려지기도 했다.[2]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실질적인 구분은 거의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단지 소수의 사제직과 의례적 관직만이 귀족에게 제한되었다. 그러나 귀족의 위상은 여전히 높았기에, 카이사르의 통치를 시작으로 제정 시대까지 멸문되거나 잊혀져 더 이상 로마 원로원에 의석을 갖지 못한 옛 가문들을 대체하기 위해 다수의 가문이 귀족 반열에 올랐다. 3세기에 이르러 귀족과 평민의 구분은 의미를 잃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 칭호를 가문 전체가 속한 계급이 아니라 개인에게 부여되는 명예의 표식으로 부활시켰다.[1][2]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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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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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Harper's Dictionary of Classical Literature and Antiquities, Second Edition, Harry Thurston Peck, Editor (1897).
  2. 1 2 3 4 5 6 7 8 9 10 11 Oxford Classical Dictionary, 2nd Ed. (1970).
  3. 1 2 3 Livy, Ab Urbe Condita, Book II
  4. 1 2 3 4 5 6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William Smith, Editor.
  5. 1 2 Eratosthenes, Chronographia, cited in Michael Wood, In Search of the Trojan War (1985).
  6. 1 2 Livy, Ab Urbe Condita, Book I.
  7. 1 2 Realencyclopädie der classischen Altertumswissenschaft, August Pauly and Georg Wissowa, Editors.
  8. Livy, Ab Urbe Condita, Book VI.
  9. Michael Grant, History of Rome (197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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