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호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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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호해정
(江陵湖海亭)
대한민국 강원도유형문화재
종목유형문화재 제62호
(1979년 5월 30일 지정)
수량1동
위치
강릉 호해정 (대한민국)
강릉 호해정
주소강원도 강릉시 경포로463번안길 83 (저동)
좌표북위 37° 48′ 06″ 동경 128° 53′ 49″ / 북위 37.801794° 동경 128.897075°  / 37.801794; 128.897075좌표: 북위 37° 48′ 06″ 동경 128° 53′ 49″ / 북위 37.801794° 동경 128.897075°  / 37.801794; 128.897075
정보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강릉 호해정(江陵 湖海亭)은 강원도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이다.
1979년 5월 30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경포호의 북쪽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로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김습독이 처음 지었다. 그 뒤로 그의 사위 장호를 거쳐 장호의 동생 민의 사위 김몽호에게 넘겨진 후, 지금까지 그의 자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이 부근 대부분의 정자들이 경포호가 바라보이는 곳에 있는데 반해, 호해정은 경포호의 동북쪽 깊숙한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사실 호해정(湖海亭)은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호해정’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인데, 과거에는 호해정 바로 앞에 호수가 있었고 10리 밖으로 경포대 바다도 보였다고 하지만, 현재는 아파트단지에 가려 바다도 보이지 않고, 앞에 있던 호수는 매립되어 농경지가 되었다.[1]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소박한 모습을 띤 이 정자는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방 사이에 분리할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아, 필요할 때 하나의 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도 김몽호의 후손들이 해마다 9월에 이곳에서 차례를 지낸다.[2]

지도[편집]

사진/동영상[편집]

호해정 사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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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도면[편집]

옛그림/고지도[편집]

한문학 유산[편집]

전체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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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 제목 저자 출전
기문(記文) 호해정기(湖海亭記) 민우수(閔遇洙) 『정암집(貞菴集)』 권9
기문(記文) 호해정기(湖海亭記) 윤봉조(尹鳳朝) 『포암집(圃巖集)』 권13
시(詩) 호정잡영(湖亭雜詠) 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15
시(詩) 호해정에 대해 짓다(題湖海亭) 이우(李瑀) 『옥산시고(玉山詩稿)』
시(詩)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李玉山韻) 김륵(金玏) 『백암집(栢巖集)』 권2
시(詩)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李玉山韻) 김창흡(金昌翕) 『삼연집(三淵集)』 권15
시(詩) 호해정(湖海亭) 이해조(李海朝) 『명암집(鳴巖集)』 권1
시(詩)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三淵䪨) 이민보(李敏輔) 『풍서집(豊墅集)』 권2
시(詩) 호해정(湖海亭) 조병현(趙秉鉉) 『성재집(成齋集)』 권4
시(詩) 호해정 주인에게 드린다(湖海亭贈主人) 송남수(宋柟壽) 『송담집(松潭集)』 권1
시(詩)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淵翁韻) 김귀주(金龜柱) 『가암유고(可庵遺稿)』 권3


민우수, <호해정기>[편집]

민우수(閔遇洙, 1694~1756), <호해정기(湖海亭記)> ... (한문 원문 보기)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다를 본 자는 웬만한 것은 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이를 풀이하여 “본 것이 이미 크면 작은 것은 볼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하였다.[3] 그러나 천하의 물은 호수·강·실개천·도랑부터 저수지·못·산골 물·시내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또한 많은데, 이것들은 모두 각각 뛰어난 승경을 독차지하여 볼 만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한 번 바다를 본 것으로 자신의 소견을 대단하게 여겨 마침내 천하의 물을 폐기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성인의 문하에 노닐면서 대도(大道)를 들어 천하의 말 중에 그의 뜻에 맞는 것이 없겠지만, 온유하고 돈화하며 명쾌하고 통달한 말이 이치에 합당하여 성인의 문하에 공로가 있다면 모두 취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어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크다고 하여 마침내 그 말들을 폐기하여 들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겠는가?

대저 물을 관찰하는 자는 반드시 천하의 물을 다 관찰하고 난 뒤라야 물의 이치를 모두 터득하여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되고, 말을 듣는 자는 반드시 천하의 말을 다 들은 뒤라야 말의 이치를 모두 터득하여 분명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만약 한갓 큰 것만 취하고 작은 것을 홀시한다면 이른바 큰 것은 미진함이 있게 된다. 대개 맹자와 주자의 말씀은 단지 대체를 논한 것일 뿐이니, 그 말만 가지고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옳다.

내가 듣자니 강릉(江陵)경포대(鏡浦臺)는 큰 바다 부근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구역을 형성하여 바다와 접하지 않은데도 승경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이에 짝할 만한 게 거의 없다고 한다. 동해가 참으로 장관이기는 하지만, 경포대가 없다면 동해의 승경은 완전히 갖추어지지 못하는 셈이다. 경포대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호해정(湖海亭)이 있는데, 경포대에서 보면 호해정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호해정에서 보면 경포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영동(嶺東) 사람들이 내호(內湖)·외호(外湖)라고 하여 각각 그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동해를 보는 자가 장관이 동해에만 그친다고 여겨 경포대와 호해정의 승경을 아예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성인의 문하에 노닌 자가 그저 성인의 말만 듣고 천하에 또한 사람들의 법이 될 만한 정언(精言)과 묘론(妙論)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호해정에는 옛날에 화려한 누각이 있었는데, 태허(太虗) 장호(張昊)가 창건한 것으로 들불에 소실되기는 하였으나 주춧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난 무술년(1718)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선생이 이곳에 이르러 제1의 명승지라고 단정하였는데, 호해정의 주인 신정복(辛正復)이 세 칸의 집을 지어 선생이 거처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생은 이곳에 거처하며 매우 좋아하여 문인 제자들과 함께 주역(周易)시경(詩經)을 강론하였으나 1년이 되기 전에 오대산(五臺山)으로 유람을 떠나 마침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그 정자만이 홀로 우뚝하게 남아 있은 것이 30여 년이었다. 선생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이 정자에 올라 둘러볼 때마다 크게 탄식하는지라 주인이 서너 명의 제자들과 이곳에서 대략 선생이 계실 때처럼 강송하였다.

경오년(1750)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완전히 폐허가 되니, 정자의 주인은 이름난 정자가 잿더미로 폐기된 것을 아파하고, 또 전현(前賢)의 유적이 함께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였기에 정자를 새로 짓고, 후인들에게 보일 수 있는 기문을 지어달라고 내게 부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호해정의 승경을 알고 있었으나 그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정자의 주인도 운사(韻士)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일면식도 없었으니 이 점이 한스럽다. 그러나 수백 리 밖에서 편지를 보내 매우 지성스럽게 요청하였기에 나 또한 거기에 이름을 의탁하는 것이 기뻐서 마침내 사양할 수 없었다.

옛날의 진원룡(陳元龍)은 호해지사(湖海之士)로서 호기(豪氣)를 떨쳐버리지 못했으니, 이것은 객기의 부림을 당한 것이어서 도를 배우는 데에 방해가 된다.[4] 그러나 이른바 객기라는 것은 대부분 그저 큰 것만을 사모하고 미세한 것을 살피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만약 크고 작은 것과 정밀하고 거친 것을 아우르고 빠뜨리는 것이 없다면 곧 지언(知言)과 양기(養氣)를 다 갖추어 그 기(氣)를 잘 사용하는 자라 할 만하니 이 사람이 참으로 맹자가 말한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5] 그렇다면 호해정의 호기(豪氣)는 반드시 도를 배우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고 도리어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비록 질병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여전히 호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람이니, 세상의 좀스럽고 치졸한 것을 근심스럽게 본 지가 오래되었다. 다른 날 한 번 가서 동해의 힘찬 파도와 내호·외호의 빼어난 풍경을 마음껏 둘러보고, 주인과 함께 누정에 올라 침상에 누워 맹자의 뜻을 주고받으며 객기를 사라지게 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발양한다면[6] 이 또한 김창흡 선생이 후인들에게 바랐던 바일 것이다. 주인의 뜻은 과연 어떠하신가? 정자의 승경에 대해서는 내가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어 말하지 못하겠고, 김창흡 선생의 시( <호정잡영(湖亭雜詠)>)[7]에 이미 잘 표현되어 있으니 이 시를 보는 자는 응당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8]

[해설]
강원도 강릉에 위치해 있는 호해정(湖海亭)은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호해정’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인데, 이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글 속에서도 별도의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호해(湖海)’라는 명칭을 ‘호해지사(湖海之士)’와 연결하고, 이를 다시 ‘호걸지사(豪傑之士)’로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한 점을 주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진원룡(陳元龍)은 호해지사(湖海之士)로서 호기(豪氣)를 떨쳐버리지 못했으니 이것은 객기의 부림을 당한 것이어서 도를 배우는 데에 방해가 된다."라고 한 부분이 핵심적인데, 각주 4번에서 그 출처를 자세히 살폈지만, 바로 이어지는 민우수의 서술을 보면 그의 본뜻은 진원룡을 깎아내리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호기가 있더라도 객기를 잘 다스린다면 도를 배우는 데에 도리어 보탬이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끌어들인 장치라 할 수 있다. 즉, ‘호해정-호해지사-호기’를 연결하면서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데, 여기에 걸림이 되는 허사의 진원룡에 대한 평을 ‘객기’로 정리하고, 이 객기만 잘 다스린다면 호기도 선비의 수양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맹자가 말한 호걸지사(豪傑之士)이다."라고 하였는데, 조선조 사대부들에게 절대적인 존숭의 대상이었던 맹자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논의에 더욱 힘을 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다른 날 한 번 가서 동해의 힘찬 파도와 내호·외호의 빼어난 풍경을 마음껏 둘러보고, 주인과 함께 누정에 올라 침상에 누워 맹자의 뜻을 주고받으며 객기를 사라지게 하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발양한다면 이 또한 김창흡 선생이 후인들에게 바랐던 바일 것이다.”라고 하여 ‘호해정-호해지사-호걸지사-호연지기’로까지 논리를 확장시켰다.
누정기는 대개 청탁을 받고 쓰는 글이며, 청탁받은 이는 누정과 누정 주인에 대한 적극적인 찬사와 세련된 의미 부여를 하기 마련인데, 민우수의 ‘호해정’에 대한 서술 또한 유명한 문장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후손들이 마음에 담아둘만한 뜻 깊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윤봉조, <호해정기>[편집]

윤봉조(尹鳳朝, 1680~1761), <호해정기(湖海亭記)>

滙而爲湖。拓而爲海。截其間。又爲一沙埭。置數三漁戶。錯落如畫圖。前有石峰涌海。遠望益奇峭者。歙之侍中㙜所據之勝也。㙜距邑治廑五里。前浸湖水。後被萬株松。其始由林木中入。及乎㙜而始豁然通眺。俗傳故宰相上黨韓公遊是㙜。適其日聞拜相。故遂以侍中爲號。嶺之東並海而亭㙜者幾十數。㙜其一也。近歙之地。若通之叢石亭。高之三日浦。䧺詭瑰奇。遊者之所歸趨。而彼其有海者或無湖。有湖者又無海。未有如是㙜攬湖海之全。歸之几席之內。其品論a193_360a之定。又未易遽言也。獨是㙜只據其天設。而人未有賁餙者。無亭榭可以延憇。無舸舫可以留連。遊者咸以是病之。趙侯鳳周始至。慨然有意。亟捐財庀工。搆亭於㙜之顚。斥其餘。又治一小艇。備其沿濯。而遊事始無憾。亭旣成。侯就以名之曰湖海。志其所矚。且欲托於陳元龍之豪氣以自見。夫論天下偉觀者。必之湖海。是能振發乎耳目。培植乎風槩。氣足以抗千古之豪。而物無攖於前矣。然吾聞君子不專恃血氣。而一遊一觀。皆有其則。恬平瑩淨。蘊爲德性。而喩其明於湖者心也。開廓涵迤。恢爲度量。而絜其廣於海者a193_360b器也。是之謂昭曠之見。而命之曰眞正大豪䧺。不亦可乎。孟子論浩然之氣。必先以黝舍爲開端。吾未知侯所稱元龍者。姑以發其端。而其微意所不言。欲使人自會歟。苟無以發揮之。則吾又恐大觀之旨荒矣。侯有書索余文。旣以是復之。因以記其亭。[9]


김창흡, <호정잡영>[편집]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호정잡영(湖亭雜詠)>

月出多奇變 달이 뜨니 기이한 변화 많고,
勝於日出時 해 뜰 때보다 더욱 빼어나도다.
層層金塔涌 층층이 금탑같은 바닷물 솟아올라,
湖面漾光遲 호수면에 출렁이는 빛 드리워지네.


二子刺船去 두 사람 배 저어 가니,
煙波延碧虗 안개 속 물결이 푸른 하늘에 가닿네.
何須同鼓枻 어찌 뱃전 두드리는 어부와 같을 것 있으랴,
相望水僊如 서로 바라보니 신선된 듯하여라.


海月纖如鉤 바다 위 달은 갈고리처럼 가늘고,
殘星在其下 새벽 별이 그 아래 빛나고 있네.
來往白蘋洲 흰 마름풀 물가 오고 가는데,
興歸收網者 그물 거둔 이 흥겹게 돌아가네.


鏡湖三十里 경포호 삼십 리,
深不沒人肩 깊이는 사람 어깨도 빠지지 않는다네.
無復安危慮 다시 또 안위(安危)를 걱정하지 말게나,
船行興自全 배를 타고 다니니 흥이 절로 가득하다네.


藏船白蘋岸 흰 마름풀 언덕에 감춰둔 배,
船走入洪溟 떠내려가 큰 바다로 들어갔네.
爲報湖魚道 호수 물고기의 길 알려줄테니,
從容近我亭 조용히 내 정자(호해정)로 가까이오게.[10]


이우, <호해정에 대해 짓다>[편집]

이우(李瑀), <호해정에 대해 짓다(題湖海亭)>

洪波萬頃達滄溟。點點雲山繞杳冥。眞宰蓄精開異境。高人覷奧搆名亭。一天明月分湖海。三島祥烟接戶庭。有客登臨迷處所。自疑銀漢泛槎星。 [11]


김륵,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편집]

김륵(金玏),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李玉山韻)>

地極東頭接大溟。遊仙醉夢入昏冥。千年桑海唯三島。萬里乾坤有一亭。天上瑞雲經外檻。月中香桂落前庭。應知湖水連河漢。莫把輕槎犯客星。

幾洗塵寰倒八溟。散仙奇跡入沈冥。雲和慣聽風前笛。鶴馭欣登水上亭。心匠已能開棟宇。耳孫無復護門庭。巖扃久鎖春宵月。湖海茫茫落曉星。

濛濛元氣起重溟。萬里仙槎入眼冥。鵬背晴天臨大地。鼇頭斷岸戴高亭。湖山巨細皆當戶。雲日高低已滿庭。暗想詩人吟嘯處。欲談奇勝鬢星星。 [12]


김창흡,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편집]

김창흡(金昌翕), <이우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李玉山韻)>

殘年活計吸東溟。天水身心兩際冥。度枕漁帆風拍拍。照牀湖月影亭亭。鴻鳧小渚呑彭蠡。鯨鰐洪波隘洞庭。解事玉山題品在。古今相接幾移星。

其二
方知物巨莫如溟。目極魂迷竟淼冥。欲釣呑舟徒壯語。惟賓出日自高亭。銀河赤岸空明界。鬱島扶桑浩蕩庭。歲暮金丹延佇久。羣僊憐我鬢星星。 [13]


이해조, <호해정>[편집]

이해조(李海朝), <호해정(湖海亭)>

傍海喧喧無靜界。敗檣危檝互欹斜。臨湖却愛風波少。涵泳天光與月華。

其二
秦王謾念長生藥。曾不求仙向此間。湖海亭中無事客。一窓容易對三山。 [14]


이민보,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편집]

이민보(李敏輔),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三淵䪨)>

表裏圓湖與巨溟。東南一氣混靑冥。人間信有神仙界。天下非無海嶽亭。桃柳色交臨瑩鏡。魚龍影動入虛庭。淵翁詩在曾棲地。浦上餘輝處士星。 [15]


조병현, <호해정>[편집]

조병현(趙秉鉉), <호해정(湖海亭)>

秋日臨瀛判勝遊。萬川傾瀉納泡漚。秦皇漢武還多事。渭潔涇渾合一流。桑老三生銀色湧。荷香十里鏡光浮。陽侯有信迴羣狀。漁笛斜風滿畫樓。 [16]


송남수, <호해정 주인에게 드린다>[편집]

송남수(宋柟壽), <호해정 주인에게 드린다(湖海亭贈主人)>

勝勢兼湖海。幽亭稱野居。簷虗樽帶月。波凈鷺窺魚。松竹千竿足。圖書萬卷餘。閑忙不同調。自與世相踈。 [17]


김귀주,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편집]

김귀주(金龜柱), <김창흡의 호해정 시에 차운하다(湖海亭次淵翁韻)>

湖外淵源接大溟。魚龍氣積共冥冥。方瀛日月生孤嶼。吳楚乾坤泛一亭。別地開區山繞檻。高人卜宅檜留庭。漁歌跌宕乘流去。誰喚淸狂作使星。 [18]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경포대와 승경을 다투던, 강릉 호해정 - 웹사이트 <역사문화유산 선비문화의 산실, 누정>
  2. *강릉호해정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3. 『맹자』 「진심 상(盡心上)」24장에 동일한 문장(觀於海者難爲水)이 보이며, 주자의 집주(集註)에도 동일한 문장(所見旣大 則其小不足觀也)이 보인다. (『맹자집주』 「진심 상(盡心上)」24장 전체 보러가기)
  4. 먼저 “진원룡(陳元龍)은 호해지사(湖海之士)로서 호기(豪氣)를 떨쳐버리지 못했으니”라고 한 말의 출처는 정사 『삼국지(三國志)』에 보이며,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 말 진등(陳登)은 자가 원룡(元龍)이고 광릉에서 위세와 명성이 있었다. 또한 협력하여 여포의 배후를 친 공적이 있어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더해졌는데 39세에 죽었다. 그 뒤 허사(許汜)와 유비(劉備)가 형주목 유표(劉表)와 함께 자리했는데, 유표가 유비와 함께 천하의 인재에 관해 논할 때 허사가 말했다. ‘진원룡은 호해지사(湖海之士)이나 호기(豪氣)를 없애지 못했습니다.’(陳登者 字元龍 在廣陵有威名 又掎角呂布有功 加伏波將軍 年三十九卒 後許汜與劉備並在荊州牧劉表坐 表與備共論天下人 汜曰 陳元龍湖海之士 豪氣不除)”
    그리고, “이것은 객기의 부림을 당한 것이어서 도를 배우는 데에 방해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한 까닭은 위 인용문 뒤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서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허사에게 물었다. ‘그대가 호(豪)라고 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허사가 말했다. ‘예전에 전란을 만나 하비성을 지나가다 진원룡을 만났습니다. 원룡은 손님을 대하는 주인의 예의가 없었으니, 오랫동안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고, 자신은 혼자 큰 침상에 누운 채 손님인 나는 침상 아래 누워있게 했습니다.’(備問汜 君言豪 寧有事邪 汜曰 昔遭亂過下邳 見元龍 元龍無客主之意 久不相與語 自上大床臥 使客臥下床)’
    이에 유비는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진원룡에게 사사로운 이익이나 얻고자 했던 허사의 태도가 문제였다고 반박하면서 진원룡이야말로 더없이 훌륭한 인재라고 평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지만, 민우수는 허사의 태도가 어찌 됐건 위와 같은 행동은 객기의 부림을 당한 것이라 본 것이다.
  5. 『맹자』 「진심 상」에 “문왕을 기다린 뒤에 흥기하는 자는 일반 백성이니, 호걸지사는 비록 문왕이 없더라도 흥기한다(待文王而後興者凡民也 若夫豪傑之士 雖無文王猶興)”라는 문장이 보인다.
  6.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감히 여쭙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장점이 있으십니까?’ ‘나는 남의 말을 잘 알며,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 합니까?’ ‘말하기 어렵다. 이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이 호연지기가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敢問夫子 惡乎長 曰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 敢問 何謂浩然之氣 曰難言也 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는 문장이 보인다.
  7. 김창흡이 호해정에 대해 지은〈호정잡영(湖亭雜詠)〉 다섯 수를 말한다. 본 문서의 한문학 유산 부분에서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다.
  8. 번역은 한국고전종합DB 참조
  9.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0.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1.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2.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3.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4.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5.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6.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7.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18. 원문 출처: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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