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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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pkzw6685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8월 8일 (목) 21:26 판 (→‎후손)

전공지(田拱之, 미상 ~ 1014년 6월 21일(음력 5월 21일[1]))는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벼슬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생애

정주(靜州)[2] 영광현(靈光縣) 사람이다. 성종 때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고, 목종 말에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임명되었다.

1007년(목종 10) 탐라(耽羅: 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상서로운 산[瑞山]이 바다에서 솟아나왔다고 보고해오자, 조정에서 전공지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탐라 사람이 "산의 모양이 기이하여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라고 말하자[3] 전공지는 직접 산 밑에 가 그 모양을 그려서 왕에게 바쳤다.

1012년(현종 3) 6월에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하절문후사(夏節問候使)가 되어 거란(契丹)에 가서 현종이 병이 있어 친조(親朝)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분노한 거란의 왕이 강동 6주(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 성명을 내고 군사행동을 했다.[4]

1014년(현종 5)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5월 21일(양력 6월 21일)에 사망했다.[1]

평가 및 추증

외교문서를 잘 작성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한 20여 년 동안 근면하고 조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추증되었다.[5]

후손

이 사람의 6대손이 승려인 지겸(志謙: 1145년~1229년 7월 29일(음력 7월 8일[6]))이다.

전기 자료

  • 《고려사》 권94, 〈열전〉7, 전공지

각주

  1.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5년(1014) 5월 21일(병오)
  2. 《고려사》에는 연혁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영광군 군명 조에 기록되어 있다.
  3. 《고려사》 권55, 〈지(志)〉9, [오행3], 산붕(山崩), 목종 10년(1007년)에는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100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4.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3년(1012) 6월 28일(갑자)
  5. 《고려사》 권94, 열전7, 전공지
  6.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전집〉35, 고(故)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