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지
전공지(田拱之, 미상 ~ 1014년 6월 21일(음력 5월 21일[1]))는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벼슬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생애
정주(靜州)[2] 영광현(靈光縣) 사람이다. 성종 때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하였고, 목종 말에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임명되었다.
1007년(목종 10) 탐라(耽羅: 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상서로운 산[瑞山]이 바다에서 솟아나왔다고 보고해오자, 조정에서 전공지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탐라 사람이 "산의 모양이 기이하여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라고 말하자[3] 전공지는 직접 산 밑에 가 그 모양을 그려서 왕에게 바쳤다.
1012년(현종 3) 6월에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하절문후사(夏節問候使)가 되어 거란(契丹)에 가서 현종이 병이 있어 친조(親朝)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였다. 이에 분노한 거란의 왕이 강동 6주(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 성명을 내고 군사행동을 했다.[4]
1014년(현종 5)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5월 21일(양력 6월 21일)에 사망했다.[1]
평가 및 추증
외교문서를 잘 작성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한 20여 년 동안 근면하고 조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추증되었다.[5]
후손
이 사람의 6대손이 승려인 지겸(志謙: 1145년~1229년 7월 29일(음력 7월 8일[6]))이다.
전기 자료
- 《고려사》 권94, 〈열전〉7, 전공지
각주
- ↑ 가 나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5년(1014) 5월 21일(병오)
- ↑ 《고려사》에는 연혁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6, 영광군 군명 조에 기록되어 있다.
- ↑ 《고려사》 권55, 〈지(志)〉9, [오행3], 산붕(山崩), 목종 10년(1007년)에는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100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3년(1012) 6월 28일(갑자)
- ↑ 《고려사》 권94, 열전7, 전공지
-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전집〉35, 고(故) 화장사 주지 왕사 정인대선사 추봉 정각국사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