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고황후(신의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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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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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thejinan.org 전주이씨 진안대군 대동종약원]

* [http://www.koreanroyal.org 전주이씨 진안대군 대한조선 재통일회]
* [[조선 태조|태조]]
* [[조선 태조|태조]]
* [[신덕왕후]]
* [[신덕왕후]]

2013년 1월 6일 (일) 16:34 판

신의왕후
(신의고황후)
추존 왕후
추존 황후
재위 추존
이름
별호 원신택주, 절비
신상정보
출생일 충숙왕 복위 6년(1337) 9월
사망일 공양왕 3년(1391) 09월 23일
배우자 태조
자녀 진안대군, 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 태종, 덕안대군, 경신공주, 경선공주
능묘 제릉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년 음력 9월 ~ 1391년 음력 9월 12일)는 조선 태조(太祖)의 첫 아내로 정종태종의 생모이다. 태조 이성계조선을 개국하여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안천부원군 한경(安川府院君 韓卿)과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의 딸로 본관안변(청주)(安邊,淸州)이다.

태조 2년(1393년)에 절비(節妃)로 추증되었다가 1398년 그녀의 소생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하야하고 그녀의 둘째 아들인 정종이 즉위하여 비로소 왕후로 승격되었다. 시호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이며,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된다.


생애

1337년 음력 9월 고려 동북면 영흥(永興) 풍류산 아래 금리(琴理)라는 곳에서 호족으로 태어났다. 한씨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뒷산에는 오색 영롱한 구름이 감돌았다 하여 이산을 풍류산(風流山)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훗날 왕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조 24년이던 1824년에 이 마을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15살이 되던 1351년에 비슷한 호족 신분의 2살 연상인 이성계와 혼인을 하여 6남 2녀를 낳았다. 1364년 이성계삼선(三善)·삼개(三介)의 난[1]을 진압하여 화주(和州)[2] 이북의 땅을 회복시키는 등 전쟁터를 누비던 동안 고향 집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며 내조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개경에서 고려 명문거족의 딸인 강씨경처(京妻)로 맞이하자 남편의 고향 집을 지키는 향처(鄕妻)로 전락하여 자식들과 여생을 보냈다.

1388년 위화도 회군 때에는 생명의 위협이 염려되어 식구들을 데리고 개경에서 벗어나 동북면으로 피신을 갔으며,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음력 9월 12일위장병의 악화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조선개국된 후 태조는 조강지처인 그녀가 아닌 개국의 공이 있는 경처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조선 최초의 왕비로 만든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인 1393년(태조 2년) 음력 9월 18일에야 비로소 그녀를 추존 왕비로 봉해주었다. 또 태조는 한씨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을 무시하고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을 정궁 소생인 적자로 인정하여 그 중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1396년 현비 강씨가 사망하자 강씨를 신덕왕후로 추존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행각에 크게 반발한 한씨의 소생들이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의 아들들을 살해하는데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분개한 태조는 한씨 소생의 둘째 아들인 방과(정종)에게 양위하고 왕위를 물러난다. 왕으로 등극한 정종은 아버지에게 외면 받았던 생모 한씨를 왕후로 격상하여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해 후궁의 오명을 벗긴다. 그 뒤를 이어 형 정종에게 양위받고 즉위한 태종은 부왕인 태조가 사망하자 강씨 곁에 묻히고자 했던 태조의 유명을 거스르고 따로 장사하였으며 1408년(태종 8년) 음력 9월 6일 생모 한씨를 왕후보다 위인 왕태후(王太后)로 다시금 격상하여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추상했고[3], 태조의 묘비에 한씨를 수비(首妃)로 기록하고 강씨를 차비(次妃)로 바꿔 기록해 두 사람의 서열을 바꾸었다.

“사자(使者)가 이르러 왕의 수비(首妃) 강씨(康氏)가 죽었다는 말을 아뢰니, 심히 슬펐노라. 왕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권련(眷戀)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마지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옛날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만들 때에 근로하여 내조(內助)하고, 삼한(三韓)에 국모로 있던 이가 강씨(康氏)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중략) 이때에 수비(首妃) 강씨의 혼이 아는 것이 있다면 멀리 궁궐을 바라보고 어찌 멀고 아득한 사이에서 처창(悽愴)하지 않겠는가? 이 같은 것을 왕이 회련(懷戀)하는가? 강씨는 갔으니, 왕은 마땅히 자중하여야 하겠으므로 칙유(勅諭)하는 것이다.”

— 태조 6년 명국 홍무제(洪武帝)의 칙위 조서(勅慰詔書) 中[4]

“수비(首妃) 한씨(韓氏)는 안변(安邊)의 세가(世家)로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휘(諱)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였다. 처음에 시호(諡號)를 절비(節妃)라고 하였다가, 뒤에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의 호(號)를 더하였다.(중략) 차비(次妃)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처음에 현비(顯妃)를 봉하였으나 먼저 훙(薨)하자, 시호(諡號)를 신덕 왕후(神德王后)라고 하였다.

— 태종 9년 건원릉 비문 내용 中[5]

또한, 태종 10년(1410년) 대상을 마친 태조의 신주를 태묘(太廟)로 부묘하며 마땅히 왕후의 신주도 함께 부묘해야 했지만 생모인 한씨의 신주만을 옮김으로써 강씨는 정식 왕후가 아님을 피력했고,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사대문 밖으로 이장시키고 왕후 능의 단장을 모두 철거하였으며 강씨의 제사를 왕후보다 격을 낮추고 그녀를 왕후가 아닌 현비로 낮춰 일컬음으로써 명실공히 후궁으로 강봉시킨다. 세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씨의 제사가 그녀의 친족에게 맡겨지기에 이른다.

이후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이 현비 강씨의 신주를 태묘로 모시고 무덤의 단장과 제사를 바로 잡음으로써 왕후로 복위되었으나 현종 또한 신의왕후 한씨의 후손이며 이미 조선은 동시에 두 명의 처를 가질 수 없는 법이 지정된 탓에 한씨가 정궁(正宮)로 인정되었고, 태조의 또다른 정궁이었던 신덕왕후는 첩으로서 한씨의 사후에 정궁이 된 계실로 전락한다.

1683년(숙종 9년) 음력 6월 12일, 태종이 한씨에게 올린 왕태후의 작위가 옳지 않다고 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개책되었다. 1899년(광무 3년) 양력 12월 19일에는 고종에 의하여 황후로 격상되어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 능은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에 위치한 제릉(齊陵)이다.

가족 관계

선대

  • 조부 : 증문하좌정승 한규인(贈門下左政丞 韓珪仁, ? ~ ?)
    • 부 : 안천부원군 한경(安川府院君 韓卿, ? ~ ?)
  • 외조부 : 판형조사 신원려(判刑曹事 申元麗, ? ~ ?)
    • 모 : 삼한국대부인 삭녕신씨(三韓國大夫人 朔寧申氏, ? ~ ?)

남편과 후손

  • 남편 : 조선 제1대 국왕 태조(太祖, 1335 ~ 1408)
    • 장남 : 진안대군 이방우(鎭安大君 李芳雨, 1354 ~ 1393)
    • 차남 : 영안대군 이방과(永安大君 李芳果, 1357 ~ 1419) => 제2대 정종(定宗)
    • 3남 : 익안대군 이방의(益安大君 李芳毅, 1360 ~ 1404)
    • 4남 : 회안대군 이방간(懷安大君 李芳幹, 1364 ~ 1421)
    • 5남 : 정안대군 이방원(靖安大君 李芳遠, 1367 ~ 1422) => 제3대 태종(太宗)
    • 6남 : 덕안대군 이방연(德安大君 李芳衍, ? ~ ?)
    • 장녀 : 경신공주(慶愼公主, ? ~ 1426) 정사좌명공신 상당부원군 이애(定社佐命功臣 上黨府院君 李薆)와 혼인
    • 차녀 : 경선공주(慶善公主, ? ~ ?)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淙)과 혼인

같이 보기

주석

  1. 1364년 음력 1월 여진족삼선삼개 등이 여진족을 이끌고 함주(咸州)를 점렴한 사건으로 이성계의 반격으로 격퇴됨.
  2. 옛 지명으로 영흥대도호부(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 일대)의 《고려시대》 이름.
  3. 태조실록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9월 6일(신해) 3번째기사
  4. 태조실록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3월 8일(신유) 1번째기사
  5. 태종실록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윤4월 13일(을묘) 6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