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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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대(洪承大, 1856년 ~ 1935년)는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다. 1910년 10월 충주군 노은면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였다. 1924년에는 충주의 국도를 닦는데 백성들을 강제로 징발한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승소하고 돌아왔다. 본관은 풍산이고 호는 예남(蘂南)이다.

생애

초기 활동

1856년 충청북도 충주군 노은면 가신리 홍골에서 태어났다.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의 후손으로, 홍이상의 차남 황해감사 독정재(獨靜齋) 홍립(洪雨+立)의 11대손이다. 그의 7대조인 홍문관 교리 천일재 홍중현(天一齋 洪重鉉)이 충주군 노은면 홍골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숙종 때의 당쟁에 염증을 느껴 조선 팔도를 유람하던 홍중현은 충주군의 노은면에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된다.

어려서 외가인 오갑 신씨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에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다시 충주로 피신왔다. 이때 가신리 근처에 은신하게 되었다. 홍승대의 학문과 인물됨을 본 명성황후는 "선생같은 인물이 어찌 벼슬도 하지 않고 이런 시골에서 지내느냐?"고 묻자 그는 "난세의 벼슬은 욕이옵나이다." 하였고,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의 확산으로 임시 행궁을 짓게 되자 도우라는 명을 받들어 충주에서 공주 일대를 순행하며 임시궁궐 건립 기금을 모금해 돌아왔다. 그러나 정세가 바뀌어 명성황후께서 갑자기 상경하자 그는 "탐관오리의 돈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 하고 여러 고을 선비들을 초청하여 시회를 여는데 썼을 뿐 한 푼도 사적으로 취하지 않았다.

구한말 활동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종, 노비들을 면천시켜 주었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구한 말 의병들은 독립운동을 한다 하였으나 행진할 때 소녀 아이들이 길에 나서면 행군길을 가로질렀다 하여 함부로 총을 쏘아 죽이고 횡포를 부렸다. 그러자 홍승대는 나서서 어린 목숨을 죽여 무엇하느냐, 그냥 겉옷을 벗겨 걸고 거기다 쏘라고 하자 의병들이 기세에 눌려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 충주 고을에는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다.

1910년 충주군면민들의 천거로 노은면 면장을 맡으시었으나 결국 왜놈들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듬해 그만두었다. 노은면장 재직 중 호적을 파기하여 종, 노비, 관청의 노비들도 모두 면천, 석방시켜 보내고, 의병에게 포위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살렸다. 한편, 의병들에게 끌려가 죽게 되었을 때 근처 마을에 살던 농악의 상수잡이가 달려와 기지를 발휘해 그를 외삼촌이라 부르며 외삼촌을 사형시키고 내가 어떻게 살겠느냐며 군복을 벗으니 동료 의병들이 그를 풀어주었다.

생애 후반

1924년 여름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이 농번기에 1~2개월 이상 농민들을 함부로 징집하여 충주 국도를 닦고 나중에 임금을 주지 않자 홍승대는 충청북도지사 박중양을 상대로 하여 소송을 제기, 경성으로 올라가 경성지방법원경성복심법원에서 결국 승소판결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박중양 고소 건으로 경성에 올라갔을 때 일본헌병들이 집에 들어와 늘 진을 치고 있었다 하며, 훗날 그의 두 아들 홍춘식, 홍최식은 일본 경찰이 당시 몹씨 두려웠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당시 장호원에서 충주로 나는 국도는 당초 충주 노은면을 가로질러 가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용원, 주덕면으로 돌아간 것은 그의 반대 때문이었다 한다.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국도의 직선거리는 장호원 - 노은 - 충주였으나 그는 대로가 마을로 날 경우 미풍양속을 해칠 염려가 있다고 주장하여 결국 국도가 마을을 통과하는 것을 막아냈다.

1935년 충주군 노은면 가신리 홍골 자택에서 별세, 주덕면 국망산에 안장되었다.

半窓明月寒蟲語(반창명월한충어) 遠浦歸雲暮雁聲(원포귀운모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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