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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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출생1889년 3월 4일
조선 경기도 안성
사망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사인교수형 (전범재판)
성별남성
국적조선
일본 제국
학력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 대학
직업군인
배우자전처 조숙원, 이청영
자녀아들 홍국선, 아들 홍현선
홍사익
출생지 조선 경기도 안성
사망지 필리핀 마닐라
복무 일본 제국 육군
복무기간 1914년 ~ 1945년
근무 도쿄 제1사단 제1연대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
최종계급 중장
지휘 일본군 보병 제3연대 대대장
일본군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
주요 참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홍사익과 그 가족

홍사익(洪思翊, 1889년 3월 4일 ~ 1946년 9월 26일)은 일제 강점기일본군 중장을 지낸 군인이다. 한국인(조선인)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장에 올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필리핀 마닐라 전범 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생애

생애초기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중추원 참의를 지낸 정교원과 사돈관계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지만 양반 집안이었다고 한다. 14세에 결혼하고 출세의 길을 찾아 한성부로 상경을 했다.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1909년 일제가 무관학교를 폐지해버려서 같은 해 9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편입과정에서 이응준, 김석원과 함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혔는데, 이는 황족인 영친왕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유학 동반자로 선발된 것이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 편입한 이후 1912년 5월 졸업했다. 그리고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제26기로 졸업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임관했다. 그와 같은 동기생으로 함께 졸업한 한국인은 13명이었는데, 이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이응준, 신태영, 조철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

군인 활동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

1920년 12월 16일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육사 졸업성적이 매우 우수해 고위장교로 출세할 수 있는 엘리트코스인 속칭 '아카사카의 보 1'인 도쿄 제1사단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7월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1920년 12월에는 일본 육군의 최고급 엘리트 양성 코스인 일본 육군대학교에 제35기로 입학해 3년간 수학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 졸업한 동기생 742명 중에서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66명에 불과한데 일제강점기 기간동안 일본 육군대학에 입학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와 홍사익 네 명 뿐이다.[2][3] 이들 4명 가운데 3명은 모두 왕족이므로 평민 출신은 홍사익 단 한 명이었다.[4]

1924년 3월 육군 대위로 진급해 일본군 보병 제1연대 중대장을 지냈다. 1925년 5월 육군참모본부에 배속되어 전쟁사 편찬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1929년에는 육군 소좌(소령)로 진급해 보병 제3연대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31년 8월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거쳐 1933년 4월 관동군사령부에 배속되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군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만주국이 장교 요원 훈련기관 목적으로 설치한 육군중앙훈련처(펑텐군관학교)를 지도, 감독했다. 특히 만주국군 고문으로 있는 동안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청년들의 만주국군 장교 진입을 제도화했다. 중앙육군훈련처의 입학 자격을 일본계, 몽골계, 만주계로 제한해 놓은 규정을 일부 고쳐 우선 현역으로 만주국군에 들어와 있던 조선인 사병들이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이듬해 군관 학생 입학대상에 조선계를 포함시켜 모집공고를 내도록 조처했다. 1934년 1월에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8월 일본군 육군 중좌로 진급하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 관동군사령부 참모부에서 군무했다. 이후 1936년까지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 제3과에 근무하며 재만조선인을 일본 국민의 일부로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에 적극 협력하도록 하는 사무를 담당했다.

중일전쟁기 활동

1936년 8월 일본 육군보병학교 교관으로 전근했고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때인 11월 육군보병학교 군견육성소장을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중지나 파견군사령부에 배속을 받아 중국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같은 달 관동군 근무시절의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국이 주는 훈3위 '경운장'이라는 훈장을 받았다. 1938년 2월 중지나파견군 특무부원 신분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고, 3월 육군 대좌로 진급했다. 같은달 흥아원(興亞院) 조사관으로 발령받아 상하이의 화중연락부에서 근무했다. 흥아원이란, 중일전쟁 당시 중국 현지에서 중국과 교섭을 담당하던 일본의 특수기관을 말한다. 이 기관은 원래 행정에 해당되므로 문관이 수행해야할 업무지만 일본 육군내 황도파가 주도한 1936년 2.26 쿠테타 사건으로 정치에 개입하면서 변질되어 육군 현역 장교가 정보수집과 정치적 공작을 전담하는 특무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홍사익은 흥아원 제1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작활동을 했다.

1940년 8월 유수(留守) 제1사단 사령부를 거쳐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 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 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었다. 이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일본군 전차대, 경장갑차대 조종 및 사격훈련을 담당하는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간사(부교장)로 근무했다.

태평양전쟁기 활동

태평양 전쟁 중에 중국에서 여단장 및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부교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3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의 병참총감에 임명되었고, 약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종전 후

1946년 전범법정에서의 홍사익 (오른쪽 끝)

홍사익이 속한 필리핀주둔군은 1945년 8월 루손 섬 산악지대에서 고립된 상태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패전을 맞았다. 홍사익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경기도 안성)에 돌아가 중학교 수학 교사로 조용히 살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필리핀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그 이유는 1944년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근무했을 때, 1944년 12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총군 제14방면군 병참감 재직시의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처우와 포로학대, 살해의 원인 제공혐의때문이었다. 일본 전쟁범죄자를 처벌하는 마닐라 국제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4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무렵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홍사익 구명운동' 등을 비롯해 각 언론사에서도 구명운동 등 벌였으나 무위로 끝나고, 형량이 과도하다는 등 일본 극우세력의 여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수용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5]

홍사익은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B·C급 전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국인이었다.[6]

사후

1966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7]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평가

홍사익은 '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한, 개인적으로는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으나[8], 중일전쟁 당시 화북지대에서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다수있는 팔로군 제18전총 등과 교전하여 독립운동가들 탄압한 경력과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로 지내면서 연합군 포로들 학살을 묵인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있다.

가족

첫 번째부인으로 조숙원이 있었지만, 조숙원은 오랜기간동안 병상에 누었다가 1943년에 병사했다고 한다. 첫째 아들인 홍국선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광복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1984년에 고향 경기도 안성에서 죽었고, 오늘날 안성에는 홍씨 문중산에 「남양공홍사익 배한양조씨지묘」라는 오석 묘석이 서 있는데 시신 아닌 유품을 묻은 것이라 한다.[9]

후처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의 이청영 부인이 있는데, 그녀 소생의 둘째 아들 홍현선이 있다고 한다. 전시체제때는 일본에 거주했었으나 일제 패망 이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거주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이하의 대한민국 정부는 홍사익 가족들에 대해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한국전쟁 후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부인 이청영은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을 때, 여비가 없어서 생각다 못해 일본 수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인의 편지를 받고 당시 일본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곰곰히 생각하다 비서를 불러 '100만엔을 송금해 주라.'고 했다고 한다. 홍사익 부인은 그 돈으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둘째 아들 홍현선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학했고, 부인 역시 아들하고 같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살다가 1978년 교통사고로 죽었다.[9]

일화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떳떳히 조선인임을 밝히면서도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자로서는 유일한 사례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설명도 있어서,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가 '창씨개명이 강제적인게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 그의 존재를 이용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하기도 한다.[10]

같이 보기

참고자료

주석

  1. 역사문제연구소.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 서울: 역사비평사. 146쪽쪽. ISBN 8976962249. 
  2. 정범준. 《제국의 후예들》. 서울: 황소자리. 490쪽쪽. ISBN 8991508189. 
  3. 길윤형. “황실, 친일과 항일 사이”. 《한겨레21》 (제624호). 
  4. 정범준. 《제국의 후예들》. 서울: 황소자리. 552쪽쪽. ISBN 8991508189. 
  5. 전봉관. “[제국의 황혼 '100년 전 우리는'][2]마지막 무관생도 홍사익·지대형·이응준[정정내용 있음]”. 조선일보. 2010년 1월 21일에 확인함. 
  6. 길윤형. “B·C급 전범 히로무라 가쿠라이 “나는 억울하다””. 《한겨레21》 (제650호). 
  7.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8. 홍사익 이야기
  9. 홍사익 이야기
  10. (http://www2.ktrwa.or.kr/new/new_webzine/index.php?idx=440&schYear=2007&schMonth=5 군자는 궁해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 전범(戰犯) 홍사익 중장의 의연한 최후)

틀:일본 제국 황군의 조선인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