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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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출생1888년 5월 23일
대한제국의 기 조선 충청북도 괴산
사망1968년 3월 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인노환
성별남성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호 벽초(碧初), 필명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
직업정치인
자녀아들 홍기문
친척이복 고모부 조완구

홍명희(洪命熹, 1888년 5월 23일 ~ 1968년 3월 5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가이다. 해방 후 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9월부터 1962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부총리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초대, 제3대 부위원장(1948년 0월 - 1957년, 1958년 10월 - 1968년)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으며[1], 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유명하다. 본관은 풍산으로 호는 벽초(碧初), 필명은 가인(假人) 또는 가인(可人)·백옥석(白玉石)이다. 일생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태생이며[2],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2]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그의 방계 선조들 중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와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이 그의 방계 선조였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가까운 방계 혈족들이었다. 배다른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

홍명희의 증조부는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친척 족숙 홍영식 등의 영향으로 개화 사상에 눈뜬 그는 일찍부터 일본으로 유학, 일본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그의 아버지 홍범식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3]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4]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루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1927년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5]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광복 이후

사회운동

1945년 해방 뒤, 벽초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했는데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였다.[6] 순국선열추념대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6]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7]

그러나 박헌영, 여운형 등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반탁운동에서 탈퇴하였다. 1947년 7월에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홍명희가 근로인민당의 당수가 되어 활동하였으나 홍명희의 인기는 여운형에 댈 것이 못 되었다. 홍명희는 소설가, 문학가로 정평나 있지 정치적 입지로는 어울리지 못했다.

단정수립 반대와 남북협상 참여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 왼쪽부터 백남운,허헌,박헌영,홍명희.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도착하면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과 남북협상론이 나오자 그는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친일파를 앞세운 이승만이 못 마땅해 한 것으로 월북전 문중에 인사를 하면서 '이승만이가 김일성 반절만 되어도 안 가겠습니다'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정치활동

파일:Northkoreank1.jpg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홍명희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1949년 3월, 평양에서, 김일성의 옆이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던 홍명희는 이후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8],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한국전쟁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전쟁 때 피난오던 도중 이광수가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그는 직접 이광수를 찾아 왔다. 그는 김일성의 재가를 얻어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자기 숙소에 데려갔다가 인민군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광수폐결핵의 악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8] 홍명희는 한국전쟁 후 공직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문화선전성 제1주상을 맡았던 고려인 정상진은 홍명희와 최승희 등을 옹호했다가 소련으로 추방당하였다.[9]

1948년 9월 9일, 북한 부수상에 선출 되었다. [10]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11]

사후

1968년 3월 5일 별세하였다.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의 생가는 충북 괴산군에 의해서 보전되어 있다.

기념문학비 건립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서 홍명희 선생의 문학가로서의 업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월북사실을 문제삼은 괴산 재향군인회 등의 우파단체들의 반발때문에 1948년 월북했다는 문구가 삽입된 새로운 비문이 2000년 6월 12일 건립되었다.

작품 세계

1928년 조선일보에 소설《임꺽정》을 연재하였는데, 집안에 있던 열 두명의 머슴들 이야기를 듣고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라는 문학가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임꺽정은 도적에 불과한데, 사회주의자인 홍명희가 의적으로 미화시켰다는 역사학자들의 부정적인 평가 등 모두 존재할 정도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12] 손자 홍석중의 말에 따르면, 홍명희는 '왜놈들이 조선말과 조선 정조를 탄압하니까 그것을 살려서 널리 알리려고 임꺽정을 쓴 거였지 소설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 뒤, 미완으로 끝난 임꺽정을 마저 완성시키시라는 주문에 대해서도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미완으로 놔두는 게 좋다'며 끝내 완성시키기를 거부하였다.[13]

가족

기타

충청남도 괴산군에 있던 그의 가족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형수와 계모는 한국 전쟁 중 총살형을 당하였다.

일찍 결혼한 그에게는 열 세살 차이의 친아들이 있었다. 장남 홍기문 역사학자 한글학자로 활동했으며, 그와는 나이 차이가 15세였다.

홍명희를 연기한 배우들

같이 보기

주석

  1. 강신욱 기자. “<NEWSIS FOCUS>고향서 외면당하는 벽초 홍명희”. 뉴시스. 2009년 10월 19일에 확인함. 
  2. (신문로) 벽초 홍명희, 그 진실과 화해(신명식 2009.03.05) 내일신문 2009-03-05일자
  3.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6페이지
  4.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27페이지
  5. 1927년 ~: 이긍종(李肯鍾) - 한국학중앙연구원
  6.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13
  7.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8.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30페이지
  9. 조선일보 2009년 6월 20일 B3
  10.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면. 
  11. 홍명희 - Daum 백과사전
  12. 《우리역사 수수께끼》1권/이덕일외 공저/김영사
  13. “홍석중의 증언”.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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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1대 부총리
(박헌영, 김책과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후임
박헌영, 홍명희
전임
박헌영, 김책,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부총리
(박헌영, 최창익과 공동)
1951년 1월 30일 ~ 1953년 3월 31일
후임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전임
박헌영, 홍명희, 최창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3대 부총리
(김일, 박창옥, 최창익과 공동)
1953년 3월 31일 ~ 1956년 9월
후임
홍명희, 김일
전임
김일, 홍명희, 박창옥, 최창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4대 부총리
(김일과 공동)
1956년 9월 ~ 1957년 9월 20일
후임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전임
홍명희, 김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5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7년 9월 20일 ~ 1958년 10월
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전임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 홍명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6대 부총리
(김일, 남일, 박의완, 정일룡, 정준택, 최용건과 공동)
1958년 10월 ~ 1962년 10월 23일
후임
김광협, 김창만, 남일, 리종옥, 리주연, 정일룡, 정준택
전임
(없음)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 1953년
후임
홍명희
이극로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후임
최용건
전임
(없음)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1948년 - 1953년
후임
홍명희
이극로
전임
홍명희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3년 - 1957년 9월
후임
김원봉
전임
김원봉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리극로와 공동)
1958년 10월 - 1961년 3월 25일
후임
홍명희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박금철과 공동)
1961년 3월 25일 - 1968년
후임
최용건
전임
여운형
진보정당 당수
1947년 7월 - 1948년 4월
후임
장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