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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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열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9월 9일 (수) 21:14 판 (→‎주석)

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 ~ 1908년 10월 21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아호는 왕산(旺山).

생애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허위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에 나섰으며[1]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고종은 그를 등용하여 성균관 등에 기용했는데, 1904년에는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해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사건이 일어나자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면서 저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어 또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허위는 이번에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이인영을 총대장을 삼아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였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며 한일 강제 병합을 추진 중이던 일본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결국 1908년 양평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가두고 사형시킨 서대문형무소, 당시 경성감옥의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가족과 후손

허위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은 항쟁에 군자금을 댔고 셋째형 허겸은 의병 투쟁을 함께 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들이 독립 운동에 나섰는데, 이로 인해 자손들이 해외에 뿔뿔이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된다.[2][3][4][5]

  • 조부 : 허운
  • 부친 : 허조(許祚)
  • 첫째형 : 허훈
  • 둘째형 : 허신(許藎 ? ~ ?)
  • 셋째형 : 허겸
  • 장남 : 허학(許壆, 1887 ~ 1941)
    • 손녀 : 허로자(1927 ~ )
  • 차남 : 허영(許瑛, 1890 ~ ?)
    • 손자 : 허경성(許敬誠, 1928 ~ )
    • 손자 : 허도성(許道城, 1936 ~ )
  • 삼남 허준(許埈, 1895 ~ 1956)
    • 손자 : 허웅배(許雄培, 1928 ~ 1997)
    • 손자 : 허환배(許煥培, 1937 ~ )
  • 사남 : 허국(許國, 1899 ~ 1970)
    • 손녀 : 허가이 알렉산드라(1931 ~ )[1]
    • 손녀 : 허클라라(? ~ )
    • 손자 : 허프로코피(1935 ~ )
    • 손자 : 허게오르기(1944 ~ )
    • 손자 : 허블라디슬라브(1951 ~ )
  • 조카 : 허형식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고, 구미시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작품에서 허위

같이 보기

참고자료

주석

틀:2004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