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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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
alt=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의 위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오른쪽)이 시진핑(왼쪽)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2015년)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중국 대륙) 간의 관계를 말한다. 대한민국의 대(對)중국 수출은 1121억8500만 미국 달러, 중국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054억3223만 미국 달러(각 2011년)에 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의 수출·수입국이다. 모두 1,999,994명(재외국민 699,026, 시민권자 2,335,968)의 한민족들이 중국에 거주(2009년 12월 기준)하고 있다. [1]이들 한민족들, 특히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외교사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은 1989년대 말이 되면서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1997년 8월부터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있다.

1950년대 초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고 따라서 대한민국은 타이완중화민국과 수교 상태를 유지하였다. 중화민국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은 1950년 10월 국제연합군에 대항하여 한국 전쟁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38도 주변 지역의 북쪽에서는 국제연합군을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남 지역에서의 공세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잔존하다가 1958년에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는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 국가중화인민공화국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적대적 관계가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대한민국으로서는 한국독점적 통치권을 침해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고,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도 적국인 중화민국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대한민국과 수교할 수가 없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각각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한중간 공식적인 관계의 부재는 양 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내의 자국 국민과 기업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도 변화

덩샤오핑

한편 중화인민공화국의 태도 변화는 1980년대에 들어와 감지되기 시작했다. 1980년 1월 "4개 현대화의 성공적인 추진을 국내문제와 국제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덩샤오핑의 연설은 주변정세의 안정과 경제발전이 국가의 최대목표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한반도에 있어서 분쟁발발억제에는 현상유지가 필수적이며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성장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갖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많았다. 새로운 경제파트너로서 대한민국과의 교역은 기존의 대(對)대한민국 인식을 변화시키게 만들었다. 이러한 서방과의 적극적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개방외교는 한국과의 제3국을 통한 교역을 1980년 말에는 1,900만 달러에 이르게 했다. 198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황화는 "관문불상쇄(關門不上鎖"(문은 잠겨 있으나 빗장은 걸지 않았다)라는 말로 대한민국과의 교류확대의사가 있음을 사실상 부인하지 않았다. [2]

중국민용항공총국의 항공기 (현 중국국제항공)

양국이 1983년 5월의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고 나서, 서로 외교 관계가 없던 양국이 1983년 8월, 중국 민항기가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이 사건은 체육·문화·관광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양국이 교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노태우 정부가 표방한 북방 정책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에 비하여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또한 소련에 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1980년대에 대한민국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양국 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디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일본 간 관계의 중재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들(조선족)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3] 1992년 8월부터 대한민국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있다.

수교 이후

대한민국 남자들의 국제결혼을 아내의 출신지 별로 볼 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여자가 가장 많다. 2000년 3,566건 (전체 6,945건 중 51%)에서 2008년 13,203건(전체 28,163 건 중 46.8%)으로 증가하였다. [4] 한국에서는 2001년 즈음부터 중국 유학 붐이 일어났다. [5]

2008년 4월 27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재한중국인 및 중국인 유학생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한국인외국인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2008년 중국인 성화봉송 폭력시위 사건) 이 때문에 각국 사이에 반한, 반중 감정이 생겨나는 등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한중 관계에서는 탈북자 문제도 갈등요소로 남아있다. 중국은 그동안 탈북자들이 중국에 들어올때마다 강제로 북송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2012년 2월에는 탈북자가 대거 중국에 잡혀있다가 강제로 북송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그리고 3월에는 탈북자북송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6] 그리고 3월 12일에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탈북자북송문제로 남북대표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고, 게다가 중국은 탈북자문제를 정치화하지말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7][8] 중국은 대한민국(한국)과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인식하고 수교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요청인 탈북자 북송을 시행하는 중이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마찰 사항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국제 연합의 대북 제재에 반대하고 있으며,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고대사를 왜곡하는 정책을 펼치고, 이어도 주변 해역을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주장하여 한중간 외교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반면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조선민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핵개발이나 여러 행보에 반대 의사나 압박을 주는 중이며, 대한민국을 중요 경제 파트너로 인식하여 교류를 크게 늘리는 중이고, 근현대사에서 일본 제국으로 인해 피해를 겪었다는 점에서 일본의 우경화 외교에 대한민국과 공조, 협력하여 압박을 가하는 중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731 부대 생체실험 사건을, 대한민국은 위안부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리는 중이며, 대한민국이 중국 하얼빈안중근 의사 기념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에 중국은 기념비가 아니라 기념관을 만드는 것으로 응대하여 일본을 압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시진핑 집권 이후로 한국과 중국 사이는 더 가까워져 한중 FTA 추진과 시진핑 주석의 대한민국 방한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미국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가까워지는 한중관계를 매우 의식하고 있다.

2012년 8월 수교 20주년을 맞았다.[9] 2013년 6월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근혜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를 방문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대한민국-홍콩 관계

홍콩의 기
영국령 홍콩의 기 (~ 1997)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직후 1949년 5월 11일 홍콩 (당시 영국령)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동년 11월 29일 총영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50년대에 김포 - 쑹산 - 카이탁 간을 대한국민항공이 운항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에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캐세이퍼시픽 항공 등이 인천 - 홍콩 노선을 운항중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對)홍콩 수출은 309억6840만USD, 홍콩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23억1507만USD(각 2011년)에 달하여, 홍콩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4위의 수출국이자 제34위의 수입국이다. [10]

교통

양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 [11]

한-중간 항공노선
거점 도시 공항
IATA
공항
ICAO
거점 공항
이름
항공사 및 상대국 취항지
대한민국 서울/인천 ICN RKSI 인천 대한항공(17개) : 광저우, 다롄, 무단장, 베이징, 상하이(푸둥), 선전, 시안, 샤먼, 옌지, 옌타이, 웨이하이, 창사, 칭다오, 톈진, 항저우, 황산[12] 홍콩
아시아나항공(20개) : 베이징, 항저우, 톈진, 광저우, 창사, 구이린, 선전, 산야, 시안, 난징, 웨이하이, 상하이(푸둥), 칭다오, 옌타이, 청두, 창춘, 하얼빈, 다롄, 옌지, 홍콩
제주항공(1개): 홍콩[13]
진에어(2개): 마카오[14], 홍콩 (10월 30일 취항)
대한민국 서울/김포 GMP RKSS 김포 대한항공 : 베이징, 상하이(훙차오)
아시아나항공 : 베이징, 상하이(훙차오)
대한민국 부산/김해 PUS RKPK 김해 대한항공 : 베이징, 상하이(푸둥), 칭다오, 홍콩
아시아나항공 : 베이징, 광저우, 상하이(푸둥), 선양, 웨이하이, 항저우
에어부산 :칭다오
대한민국 제주 CJU RKPC 제주 대한항공 : 베이징, 난닝
아시아나항공 :베이징
대한민국 무안 MWX RKJB 무안 아시아나항공 : 베이징
틀:RKCJ 아시아나항공 : 베이징
중국 베이징 PEK ZBAA 수도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서울(김포), 부산, 대구, 제주
중국 톈진 TSN ZBTJ 빈하이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중국 항저우 HGH ZCHC 샤오산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부산
중국 샤먼 XMN ZSAM 가오치 샤먼항공 : 서울(인천)
중국 칭다오 TAO ZSQD 류팅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중국 웨이하이 WEH ZSWH 웨이하이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중국 청두 CTU ZUUU 솽류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중국 옌지 YNJ ZYYJ 차오양촨 중국국제항공 : 서울(인천)
홍콩 홍콩 HKG VHHH 홍콩 캐세이퍼시픽 항공 : 서울(인천)
홍콩 드래곤 항공 : 부산, 제주
홍콩 항공 : 서울(인천)
홍콩 익스프레스 항공 : 서울(인천)
에어 인디아 : 서울(인천)
에티오피아항공 : 서울(인천)
타이 항공 : 서울(인천)
마카오 마카오 MFM VMMC 마카오 마카오 항공 : 서울(인천), 무안(계절편)

역대 공관장

베이징에 대한민국 대사관이, 광저우 · 상하이 · 선양 · 시안 · 청두 · 칭다오 · 홍콩에 각 총영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서울에 주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부산광주에는 총영사관이 개설되어 있다.

주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대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소재

대수 이 름 임기
제1대 대사 노재원 1992년 9월 7일 ~ 1993년 5월 25일
제2대 대사 황병태 1993년 6월 5일(신임장 제정) ~ 1995년 12월 10일
제3대 대사 정종욱 1996년 2월 24일(신임장 제정) ~ 1998년 4월 25일
제4대 대사 권병현 1998년 4월 28일(신임장 제정) ~ 2000년 8월 7일
제5대 대사 홍순영 2000년 8월 31일(신임장 제정) ~ 2001년 9월 12일
제6대 대사 김하중 2001년 10월 10일(신임장 제정) ~ 2008년 3월 11일
제7대 대사 신정승 2008년 5월 27일(신임장 제정) ~ 2009년 12월 25일
제8대 대사 류우익 2010년 1월 11일(신임장 제정) ~ 2011년 5월 7일
제9대 대사 이규형 2011년 5월 19일(취임) ~ 현재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소재

주홍콩 대한민국 총영사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소재

같이 보기

주석

  1. “국가별 재외동포현황(2011).xls” (엑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2. Sung-po Chu, "Peking's Relations with South and North Korea in the 1980's, "Issues & Studies, vol. 22, no. 1 (november 1986) p. 71
  3.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한-중 수교 (1992.8)”. 2009년 7월 11일에 확인함. 
  4. “한국인 남편의 혼인종류/외국인 아내의 국적별 혼인” (HTML). 2009년 7월 11일에 확인함. 
  5. ““내 능력 키운 8할은 중국 유학””. 동아일보사. 
  6. 탈북자 북송 반대집회 서울·부산 동시 개최
  7. '탈북자 북송 반대' 국회대표단, 제네바서 北 대표부와 충돌
  8. 中 “탈북자문제 정치화 말라”
  9. 한중 양국의 수교일은 대한제국청나라가 근대적 외교 관계를 수립한 1897년 10월 12일이나 대한민국중화민국이 수교한 1948년 8월 13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외교 관계를 재개한 1992년 8월 24일부터 계산한다.
  10. “국가별 수출입”. 한국무역협회. 
  11. “중국 노선 탑승률 사상 첫 80% 돌파”. 조선일보. 
  12. “대한항공, 인천~황산 노선 신규 취항”. 아시아투데이.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13. “제주항공, '인천-홍콩' 신규 취항”. 머니투데이. 
  14. “진에어, 국내 최초 ´인천-마카오´ 노선 취항”. EBN 산업뉴스.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