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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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원

고려
대사헌(大司憲)
군주 고려 공민왕 왕기
고려 우왕

이름
별명 자 담지(湛之)
호 고헌(苦軒)
신상정보
출생일 1322년
출생지 진주 여사촌
사망일 1376년
국적 고려
학력 1342년 진사, 식년문과 장원 급제
본관 진양(晉陽)
부모 하즙
철성 이씨
직업 문관
작위 대광보국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종교 유교(성리학)
상훈 수충좌리공신(개경수복 2등 공신)

하윤원(河允源, 1322년 ~ 1376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아버지는 문하찬성사 하즙(河楫)이다. 1362년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재직시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워 수충좌리공신(개경수복 2등 공신)이 되었으며 우왕으로부터 문하찬성사로 치사(致仕)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생애 및 활동

1342년 진사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교교감(典校校勘)에 보임되었으며 공민왕 때, 사헌부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재임시에는 모든 관원으로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일찍이 왕명으로 경상도(慶尙道)·서해도(西海道)·양광도(楊廣道)·교주도(交州道) 등 4도(道)를 안찰(按察)하여 백성들의 고충을 살펴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원주목사와 상주목사를 역임했다.

1361년(공민왕 10년) 10여만 명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이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하고, 1362년에는 무예가 출중한 탓인지 그는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을 비롯하여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수충좌리공신(輸忠佐理功臣)이 되었다. 또한 강주원수(康州元帥)로 있을 때에는 이성계(李成桂), 정세운(鄭世雲)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였다. 우왕 초에는 예문관 제학에 이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집무시에는 知非誤斷皇天降罰(잘못된 것을 알고서 그릇 판단한다면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이라는 글귀를 걸어 놓고 공무를 청렴하게 수행하였으며 우왕으로부터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이러한 청렴성과 강직성은 이미 공민왕신돈(辛旽)이 왕의 신임을 등에 엎고 권세와 만용을 부리자 다른 모든 신하들이 신돈에게 아첨할 때에도 그만이 홀로 공직자의 바른 기품과 자세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1375년(우왕 1) 대사헌으로 집무시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도중에 여막에서 사망할 정도로 평소에 효성이 지극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 온 충과 효의 정신을 그의 자손들은 조선조에 출사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받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는 충효일치(忠孝一致)의 가풍은 고려조에 이어 조선조에서도 명문가의 가명(家名)을 떨쳤다.[1]

교우 관계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삼은(三隱)과도 아주 절친한 교우관계였다. 하윤원이 강주원수(康州元帥)로 있을 때 이색이 시문(詩文)을 통하여 그를 위로했으며, 정몽주는 그가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임기를 마치고 내직으로 전임될 때에도 시문(詩文)을 통하여 칭송할 정도였다.

상훈 및 업적

  • 수충좌리공신(개경수복 2등 공신)
  • 우왕의 기복교서(起復敎書)
  • 대광보국숭록대부(重大匡輔國崇祿大夫)
  •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작

가계

직계 후손

참고문헌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晋陽誌
  • 晉陽聯藁(1609년)
  • 晉陽河氏大同譜(庚辰譜,2000년)
  • 《高麗列朝登科錄》
  • 하승무의 晉陽河氏 家門人物硏究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