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앙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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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
포르투갈과 알가르베스의 왕
재위 1557년 6월 11일 – 1578년 8월 4일
전임 주앙 3세
후임 엔히크
신상정보
출생일 1554년 1월 20일
출생지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일 1578년 8월 4일
사망지 알카세르퀴비르
가문 아비스 가
부친 주앙 마누엘
모친 오스트리아의 후아나
배우자 아라곤의 엘레아노르
묘소 제로니무스 수도원
서명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 1554년 1월 20일 - 1578년 8월 4일)는 아비스 왕조 포르투갈 왕국(재위: 1557년 - 1578년). 별명은 대망왕(o Desejado).

주앙 3세의 5남 주앙 마누엘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딸 후아나의 소생. 아버지 주앙 마누엘의 어머니 카타리나는 카를로스 1세의 여동생, 어머니 후아나의 어머니 이사벨은 주앙 3세의 여동생이며, 세바스티앙의 부모는 부계와 모계 쌍방에서 사촌남매의 관계에 있었다.

생애[편집]

조부 주앙 3세(João III)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세바스티앙의 아버지 주앙 마누엘(João Manuel)을 포함해 전원이 앞서 사망해 세바스티앙은 아버지 주앙이 죽은 지 18일 뒤 탄생하였다[1]. 광장에 몰려든 군중에게 왕자의 탄생을 알렸을 때, 군중은 왕자의 탄생에 환희하며 축복하였다[2]. 후아나에게 남아가 탄생하지 않으면,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아들 돈 카를로스에게 포르투갈 왕위가 옮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티앙의 탄생은 국민에게 바람직하여 「대망왕」이라고 애칭되었다[1]. 태어난 왕자는 1월 28일 영세하여, 생일의 성인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기념하여 세바스티앙이라고 명명되었다[2]. 세바스티앙의 탄생으로부터 4개월 후, 모후 후아나는 약혼시의 결정에 따라 모국 에스파냐로 돌아갔다[2].

1557년에 주앙 3세가 승하한 후 세바스티앙이 3세의 나이로 즉위, 조모 카타리나가 섭정으로서 세바스티앙을 후견하였다. 1562년으로부터 1568년까지는 대숙부인 추기경 돈 엔히크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에 소집된 코르테스는 세바스티앙에게 결혼을 요청, 백부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의 약혼이 결정되었다[3].

담력 있고, 모험심이 풍부했기 때문에 세바스티앙은 「기사왕」이라고도 불린다[4]. 그러나, 정서가 불안정하고 허영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여, 타인의 의견을 거의 경청하지 않았다[1]. 자신에게 아첨해, 듣기 좋은 의견을 말하는 인물에게만 친밀한 태도를 보였다[5]. 11세 때에 바탈랴를 방문한 세바스티앙은 주앙 2세의 무덤을 파내고 사체를 세워 놓고는 「그야말로 왕의 책무를 가장 잘 완수한 인물이다」라고 말하였다[4].

세바스티앙은 수렵과 승마에 빠져 국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정무의 실권은 엔히크 추기경과 그 측근들에게로 옮겨 갔다[2]. 가정교사인 예수회의 카마라 신부, 아시아 · 아프리카를 전전한 경력이 있는 부적역의 돈 아레이죠는 세바스티앙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2]. 14세가 된 세바스티앙은 친정을 실시하지만, 유소년기부터 전쟁과 종교에 이상할 정도의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1]. 조부인 주앙 3세와 카를로스 1세, 백부인 펠리페 2세라는 유럽 대국의 군주들을 둔 탓에 세바스티앙은 자기 자신도 위대한 왕이 되는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해갔다[2].

해를 거침에 따라, 세바스티앙의 내면에는 십자군을 실시하고자 하는 소망이 강해져 갔다[6]. 주앙 3세는 고액의 유지· 방위비를 필요로 하는 모로코의 도시 대부분을 방폐하였지만, 세바스티앙은 이러한 도시들의 회복을 바랐다[2]. 세바스티앙이 세운 원정의 구상은 대담하였지만 계획, 전략, 퇴각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고, 그는 그러한 요소들을 겁쟁이의 생각이라 일축하였다[5]. 전비를 염출하기 위하여 국민과 교회에 무거운 부담이 지워지자, 외국상인들로부터 고액의 군자금을 차입하였다[5]. 1574년에 세바스티앙은 사아드 아킴 지배하의 모로코에 처음으로 상륙해, 3개월간 머물었지만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다[5]. 귀국후 세바스티앙은 원정의 준비를 재개해, 백부 펠리페 2세에 지원을 요구하였지만, 원조는 얻을 수 없었다. 세바스티앙과 회견한 펠리페는 원정의 결과를 불안하게 여기어, 일찍이 결정한 결혼의 연기를 요청하였다[3].

아브 마르완 압드 알 말리크 1세에 의해서 모로코의 왕위를 빼앗긴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포르투갈에 지원을 요청하자, 1578년 여름 세바스티앙은 용병을 포함한 약 15,000명의 병사를 인솔해 다시 모로코에 상륙한다. 세바스티앙의 군대는 통제를 취할 수 없고, 규율이 부족하였다[7]. 1578년 8월 4일에 알 크사르 알 카비르 전투로 포르투갈군은 이슬람군과 교전해, 포르투갈 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하였다[7][8]. 세바스티앙은 전사하였지만,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8]. 모로코 원정에 소요된 전비는 세입의 반에 이르러, 국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7][8]. 또, 세바스티앙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왕비 후보자를 모두 거절해왔기 때문에, 적자는 없었다[8].

정책[편집]

세바스티앙 1세가 친정을 맡고 있던 기간의 대부분, 포르투갈 국내는 안정된 상태에 있어, 대규모 정치 개혁은 행해지지 않았다[5]. 신앙 · 교회에 관련하는 법령이 많이 제정되어 포르투갈 본토와 식민지의 새로운 교구의 설치, 종교재판소의 권한의 강화 등이 실시되었다.

주앙 3세가 승하하여 세바스티앙이 즉위한 후도,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는 확장을 지속하였다[4]. 1559년에 포르투갈군은 인도 서해안의 다만의 재정복에 성공한다. 1567년에 브라질 총독 Mem de Sa가 남아메리카의 리우 데 자네이루 만에서 프랑스군을 격퇴, 요새를 점령한다. 요새는 식민지로 재건되어 후의 리우 데 자네이루로 발전한다. 1570년에는 앙골라의 식민지화를 개시하였다. 1562년에 모로코, 1570년에 인도의 고아, 체울이 공격을 받지만, 방위에 성공하였다.

세바스티앙주의[편집]

1580년으로부터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놓여져 곤궁해진 민중은 구세주의 출현을 열망하고 있었다[9]. 1530년에 신발 가게의 반다라가 쓴 숨은 왕이 민중을 해방한다는 예언시에 세바스티앙을 적용시켜 세바스티앙은 전사하고 있지 않고, 패배를 수치스럽게 여기어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믿게 된다. 민중은 세바스티앙의 귀국을 믿어 각지에 세바스티앙을 사칭하는 자들이 다수 나타났다[9].

세바스티앙주의(메시아 대망론)는 에스파냐 지배를 끝내는 민중의 반란의 원동력이 되어, 브라간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다[9].

각주[편집]

  1. 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3 페이지
  2. 금7 「세바스티앙」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5권,437-439페이지
  3. 아베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139페이지
  4. 아베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 136페이지
  5. 마르케스 「포르투갈」2, 37 페이지
  6. 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53-54페이지
  7. 마르케스 「포르투갈」2, 38 페이지
  8. 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4 페이지
  9. 금7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 57 페이지

참고 문헌[편집]

  • 아베 신온 「파란만장의 포르투갈사」(태류추천도서, 태류사, 1994년 7월)
  • 금7기남 「세바스티앙」 「세계 전기 대사전세계편」5권수록(구오바라 다케오편, 호루푸출판, 1980년 12월)
  • 금7기남 「그림 해설 포르투갈의 역사」(올빼미의 책, 카와이데 쇼보 신사, 2011년 5월)
  • A. H. 데 올리베라 마르케스 「포르투갈」2(금7기남 역, 세계의 교과서=역사, 호루푸출판, 1981년 11월)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