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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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중화민국의 정치와 정부










타이완 문제 또는 대만문제(중국어 간체자: 台湾问题, 정체자: 臺灣問題)는 국공 내전으로 분단된 이후 타이완의 정치적 지위 및 주권 귀속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 역사, 문화, 외교 등 각 방면의 문제를 가리킨다. 양안문제(兩岸問題)라고도 한다.

개요

분단국가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자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의 큰 틀에는 양안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 한편,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집권 이후 중화민국은 사실상 무력에 의한 실지 수복을 포기하고, 대륙과의 협력을 통한 평화 통일로 정책을 변경하였다. 한편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양국론'을 내세워 사실상 '하나의 중국'을 부인하였다. 급진적 성향의 야당 출신인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집권 이래로 대만과 중국은 각각 별개의 국가라는 '일국일변론(一國一邊論)'을 내세워 대만 독립 문제가 주요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2008년에 취임한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지만 통일과 독립 중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도 무력 통일 위주의 통일 정책에서 탈피, 평화 통일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05년에 중국 공산당은 '반분열국가법'을 제정, 무력 동원 가능성을 명문화하여 무력에 의한 통일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보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통일 정책과는 차이가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무력 사용 자제를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 공산당은 '양안 문제는 중국 내정의 문제'라며 타국의 간섭을 일축하고 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국 대륙홍콩, 마카오 지역을 다스리고 있고,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과 그 주변의 섬들을 다스리고 있다.

역사적 배경

선사 시대부터 타이완 섬에 말레이시아 혹은 인도네시아 계통의 종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90년 포르투갈의 선박이 타이완 북부에 상륙하여 잠시 거주하였다. 선원들은 귀환 후 섬을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으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그 후 1624년부터 네덜란드동인도 회사가 현재 타이난 시 지역에 소규모 거주지를 건설하고, 1642년부터 총독을 임명하고 거류민들에게 과세하는 등 타이완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1644년부터 청나라의 침입으로 푸젠 성, 광둥 성 등의 유민들이 타이완으로 대거 유입하였다. 이들이 훗날 본성인의 토대가 된다. 정성공정씨왕국 이후 청나라가 점령하여 푸젠 성에 병합시켰다. 그러나 1894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 제국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일본 제국은 추축국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연합국에게 점점 유리하게 되어갔다. 1943년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정상이 모여 카이로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대만의 주권을 중화민국에 반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1945년의 일본 패망 후 연합군의 위탁을 받아 대만에 군대를 진주시킨다. 그리고 카이로 회담의 결정을 근거로 하여서 대만을 자국령에 편입하였고, 1947년 대만성을 다시 설립하였다. 국민정부는 대만의 영유,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중국 대륙에서 난처한 입장에 몰리고 있었다. 1946년부터 격화하기 시작한 국공 내전에서 처음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우세했지만 해를 거듭할 때마다 중공군이 우위인 입장을 차지하게 되었다. 1949년 4월이 되면서 수도인 남경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하고, 10월에는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점령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중공군에게 온전히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국민당은 타이베이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해,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의 병력이나 국가, 개인의 재산등을 속속 타이완으로 옮기기 시작해, 12월에는 중앙 정부 기구도 모두 이전해 타이베이 시를 중화민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이러한 중화민국 정부의 움직임에,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초 헌법에 타이완을 23개 성 중 하나로 명시하고 타이완에 대한 군사적 침공도 검토하고 있었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병력이 한반도로 이동하면서, 1955년에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수 차례 미국에 중국 대륙 공격을 제안했지만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 이후, 타이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화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현재 중국은 서로 다른 정권에 의해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논쟁 거리

국제 기구 가입에 대한 논쟁

중화민국은 국제연합총회 2758호 결의안 이후 국제 연합과 같은 중요 국제 기구나 주요국으로부터 승인이 취소되어 있기 때문에, 중화민국이 국제 기구에 가입 하려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문제가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로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 세계무역기구(WTO),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국제올림픽기구, FIFA), 중국 타이베이 시(Taipei, China, 中國臺北; 아시아개발은행)라는 대체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다.

동시 승인에 대한 논쟁

중화인민공화국하나의 중국을 주장해, 동시 승인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중화민국에서도 그러하였으나 리덩후이 총통이 취임한 후, '양국론'을 내세우며 탄성외교 정책을 펼쳐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별개의 국가로서 중화민국의 지위를 명확히 하려고 해, 동시 승인을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1989년 그레나다중화민국과 수교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이 단교를 선언하여, 동시 승인(수교 포함)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1992년에는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때 중화민국과의 단교를 요구받은 바 있다. 이런 이유로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을 공식적으로 독립적 국가라고 승인하는 나라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한편 중화민국과 수교중인 키리바티바누아투는 양안을 동시에 승인하고 있다.

대만 문제에 관련된 단체, 정부의 의견

  • 유엔의 기 유엔 : 국제 연합 총회 2758호 결의 이후 국제 연합은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 해당 결의에서 타이완 섬이나 중화민국의 지위에 관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타이완 문제에 관련된 결의안이 상정된 적도 없지만 국제 연합은 2007년 중화민국의 "타이완" 명의 가입 신청을 반려하는 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 해외 화교 단체 : 대부분의 해외 화교들은 타이완을 중화민국이든 중화인민공화국이든 중국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으며, 타이완만의 독립에는 반대하고 있다.

연결 고리

바깥 고리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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