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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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독립(중국어 (대만): 臺灣獨立; 영어: Taiwan Independence)은 타이완의 완전 독립 지지자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로, 중화민국의 실효 지배 하에 있는 타이완이 중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을 뜻한다. 타이완 공화국 (중국어 (대만): 臺灣共和國; 영어: Republic of Taiwan; R.O. Taiwan; R.O.T.) 또는 타이완국(중국어 (대만): 臺灣國; 영어: State of Taiwan)은 이들에 의해 주로 제시되고 있는 미래 이상적 국가 개념이다.
역사
'타이완 독립 주장'은 일본의 타이완 지배 시기에 나타났다. 이것은 1920년대 대만 공산당의 목표였다.
1950년대 랴오원이의 타이완 지역 공화국이 일본에 세워졌다. 이 정권은 새로 독립한 인도네시아와 유사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아마 수카르노와 타이완 지역 공화국의 천치슝과의 관계를 통해서 일 것이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일본에 대한 지역 저항 운동을 도왔다.
독립의 근거
타이완 원주민은 오스트로네시아족 계열의 민족이며, 한족보다는 오히려 하와이 원주민에 가깝다. 포르투갈이 타이완을 발견하고, 이후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래 많은 한족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타이완은 역대 중국의 왕조에 속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타이완 내의 일부 중국인(본성인, 소위 타이완인)들은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네덜란드로 시작하여 정성공의 정씨왕국, 청나라의 지배, 일본 제국의 지배, 그리고 현재의 중화민국의 통치를 똑같은 외세의 지배로 바라본다. 국공 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집권을 피해 중국 국민당과 함께 들어온 중국인을 자신들 본성인과 대비하여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르며, 실제로 지난 50여년간 본성인들은 외성인들에 비해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소위 타이완인들은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타이완’이라는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한다.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나라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타이완인들은 타이완이 중국 대륙과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타이완의 독립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는 본성인 출신 리덩후이 총통과,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천수이볜 총통을 들 수 있다.
한편 타이완인은 한국인과 달리 일본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다.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 이전에 조선(1392년 ~ 1897년)과 대한제국(1897년 ~ 1910년)이라는 주권국가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권국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타이완인들의 입장에서는 일본 제국의 통치 또한 여러 외세의 지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대 총독 모두 무관이 임명된 조선과 달리, 일본의 타이완 통치는 일부 문관에 의한 소위 ‘문화 통치’가 이루어졌다. 일부 타이완인은 심지어 타이완 총독부의 통치가 중국 국민당의 통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한편 미국 국방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해방군을 잠재적 적성국가로 상정하고 있으며,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타이, 인도 등을 통해 중국 대륙을 포위하려 한다. 만일 타이완이 독립 국가가 되어 미국의 정식 동맹국이 된다면 좀 더 쉽게 중국 대륙을 포위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타이완의 독립에 대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때문에 반대하며 대신 타이완 관계법을 통해 중화민국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민주진보당 집권 시절, 천수이볜은 미국과 일본 우익 세력의 협조 속에 타이완의 독립을 기도한 바 있으나, 중국 공산당의 방해 공작과 미국의 전쟁 우려로 인해 좌절된 바 있다. 중화민국 국군의 군사력과 타이완의 경제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확장되어 왔으며 중국 대륙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반대로 타이완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효 지배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의 태평양 진출 교두보가 열리며, 센카쿠 열도와 이어도, 궁극적으로 제주도가 중국 해군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어 대한민국과 일본의 안보가 심각하게 위협받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해양전략’을 통해 2020년대 후반까지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반론
중화인민공화국측 반론
중화인민공화국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이완 독립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1].
- 선사 시대에 타이완 섬과 대륙은 원래 서로 이어져 있었으나, 후에 지각의 운동으로 서로 연결된 부분의 육지가 내려앉아 해협이 되었다.
- 타이완 섬에서 출토된 문화재가 중국의 것과 거의 상통한다.
- 230년 오나라의 황제 손권이 1만의 대군을 타이완에 파견한 적이 있다.
- 6세기 말, 7세기 초 수나라 수 양제는 타이완에 사람을 파견하여 “타지의 습속을 ‘관찰’하고 현지 주민을 ‘위로’하라고 지시”했다고 전한다.
- 당나라 부터 송나라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전란을 피해 타이완과 펑후 제도로 이주하였다.
- 청나라가 타이완을 복속시켜 푸젠 성 관할로 삼았다.
- 1943년 카이로 선언은 중화민국으로의 타이완 귀속을 명시하였고, 포츠담 선언은 이러한 카이로 선언의 실천을 재천명하였다.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소멸’하였으며, 중화민국의 승계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에 타이완 섬을 영유할 자격을 보유하고 있다.
- 타이완의 정치적 독립은 미국과 타이완 내 친일 인사의 농간으로밖에 볼 수 없다.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타이베이로 거처를 옮긴 중화민국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역시 중국 대륙에서 유래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측 반론
중국 국민당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이완 독립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 1943년 카이로 선언은 중화민국으로의 타이완 귀속을 명시하였고, 포츠담 선언은 이러한 카이로 선언의 실천을 재천명하였다.
- 1945년 이후로 중화민국은 타이완을 합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 현 중화민국의 정치 제도 등은 모두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다. 중화민국 입법원, 중화민국 행정원, 중화민국 사법원 등은 모두 1924년 난징 시에서 설립된 것이다. 국립 중산 대학, 국립 칭화 대학 등 타이완에 위치한 일부 대학 역시 중국 대륙에서 건너왔다.
- 독립론자들은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을 촉발하며, 결과적으로 중화민국의 국민 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 독립론자들은 대부분 친일 성향으로, 일본으로 편입하기 위한 밑그림일 뿐이다.
중화민국의 총통 마잉주는 “하나의 중국은 중화민국”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해외 화교측 반론
해외의 중국인인 화교들은 대부분 타이완을 중화민국의 지역으로 여겨, 독립에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