킵차크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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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7월 24일 (금) 13:08 판
알탄 오르드 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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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0년대~1502년
국기
수도사라이 바투
정치
정치체제초기에는 선거군주제
후기에는 세습군주제


1226년 ~ 1280년
1242년 ~ 1255년
1379년 ~ 1395년

오르다 칸(백장 칸국)
바투 칸(청장 칸국)
토크타미시 칸(백장 칸국)
입법부쿠릴타이
지리
1310년년 어림 면적6,000,000 km2
인문
공용어중세 몽골어(지배계층)
킵차크 투르크어
종교
종교텐그리교, 경교, 이슬람교, 티베트 불교, 유대교 등(1240년대 ~ 1313년)
이슬람교(1313년 ~ 1502년)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몽골 제국
쿠만-킵차크 연합
볼가 불가르
크림 칸국
카심 칸국
카잔 칸국
카자흐 칸국
우즈베크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시비르 칸국
히바 칸국
티무르 제국

킵차크 칸국(몽골어: ᠠᠯᠲ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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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탄 오르드 울스) 또는 금장 칸국(중국어 간체자: 金帐汗国, 정체자: 金帳汗國, 병음: jīnzhànghànguò, 러시아어: Золотая Орда, 영어: Golden Horde)은 중앙아시아 북부와 동유럽에 성립한 몽골계의 칸국이다. 사한국 중 하나로 바투가 세웠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스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우구데이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한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킵차크 칸국의 바투의 서양 원정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킵차크 칸국에 의해서 키예프 루시가 멸망될 때, 몽골군은 1239년에 이 타만 반도를 점령했다.

전성기

제3대의 베르케 칸에서 제9대 우즈베크 칸까지가 번성기였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드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부하라를 약탈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의 결과 카이두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일 한국을 공격하라는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한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한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한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잘라이르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잘라이르타이를 보내 킵차크 한국 군대에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한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일 한국츄판 왕조는 1357년에 킵차크 한국의 10대 자니 벡 칸의 침략에 의해 멸망당했고 마렉 아시라프는 킵차크 한국군에 잡혀 처형당했다.

추판 조의 영토를 정복한 킵차크 한국은 통치의 어려움을 직감하고 1년 뒤인 1358년에 최종적으로 철수했으며 이 땅은 2년 뒤인 1360년에 자라이르 왕조우웨이스 1세의 손에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마렉 아시라프의 아들인 티무르타스(Temurtas)도 사망하여 이후 추판 왕조의 존재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킵차크 칸국은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쇠퇴와 멸망

14세기 말부터 1440년대에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고, 크림 한국, 아스트라한 한국, 카잔 한국, 시비르 한국으로 나뉘면서 멸망했다.

킵차크 칸국의 왕

  1. 바투 칸(Батый) (1237-1256)
  2. 사르타크 (1255-1256)
  3. 울라크치 (1256?)
  4. 베르케 칸(Берке) (1256?-1266)
  5. 멩구티무르 칸(Менгу-Тимур) (1266—1280) (크림 한국을 지배함)
  6. 투다멩구 칸(Туда-Менгу) (1280—1287)
  7. 탈라부가 칸(Талабуга) (1287—1291)
  8. 토흐타 칸(Тохта) (1291—1312)
  9. 우즈베크 칸(Узбек) (1312—1342)
  10. 자니베크 칸(Джанибек) (1342—1357) (1356년에 아제르바이잔이란을 지배함)
  11. 베르디베크 칸(Бердибек) (1357-1361)
  12. 마마이 칸(Мамай) (1362-1380)
  13. 토크타미시 칸(Тохтамыш) (1380-1395)

백장 칸국

주치의 맏아들 ‘오르다’의 백장 칸국의 칸은 다음과 같다.

청장 칸국

주치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에게 나누어준 청장 칸국의 칸은 다음과 같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