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3세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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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mersen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5월 4일 (일) 23:05 판 (영어식 '프러시아'를 독일어 '프로이센'으로 바꿈)
카를 3세
카를 3세
카를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동프랑크의 왕
이탈리아 왕
서프랑크의 왕
아키텐 왕
재위 881년 - 888년
전임 소 루트비히(동프랑크)
바이에른의 카를만(이탈리아)
샤를로망(서프랑크)
후임 아르눌프(이탈리아, 동프랑크)
외드(서프랑크)
이름
별호 뚱보왕
비만왕
신상정보
배우자 슈바벤의 리첼다

카를 3세 또는 샤를 3세 비만왕 또는 뚱보왕 (영어: Charles III the Fat, 프랑스어: Charles III le Gros, 독일어: Karl der Dicke, 839년 6월 13일888년 1월 13일)은 동프랑크 왕, 이탈리아 왕이었고 881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884년에는 서프랑크의 왕이 되어 카를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했다. 카롤링거 왕조의 일원으로 독일왕 루트비히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880년 맏형 카를만에게서 이탈리아바이에른을 물려받았고, 882년루트비히 청년에게서는 작센슈바벤을 물려받아 동프랑크 왕국을 재통일하였다. 그 뒤 884년 서프랑크 국왕 샤를로망 2세가 요절하였으나 성인이 된 후계자가 없어 서프랑크 국왕까지 겸하게 되어 베르덩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으로 분열된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위기간 중 886년부터 887년 노르만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다.

샤를마뉴의 사후 일시적으로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여 유럽 전지역을 재통일하였으나 마자르 족과 슬라브 족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886년에는 바이킹을 뇌물로 매수,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가 발각, 조카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폐위되었으며 빈곤과 병마로 비참하게 사망했다. 이후 제후들의 반란으로 왕조는 해체되었다. 서프랑크의 통치자로도 재위했지만 보통 그는 서프랑크의 왕으로 간주되지는 않아 서프랑크의 왕계표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등장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간질을 앓았으며 비만이었다 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는 세 번째 카를로서 카를 3세로 부른다. 별명은 뚱보 왕, 비만 왕(the Fat, Le Gros)이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초기 삶

카를 3세

839년 6월 13일 카를 3세는 동프랑크의 국왕 독일인 루트비히바이에른 공작 구엘프의 딸인 바이에른의 엠므의 셋째 아들로 바이에른에서 태어났다. 라틴어로는 카롤루스였고, 독일어로는 카를, 프랑스어로는 샤를로 불리게 된다. 샤를마뉴의 증손자이자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

그는 유아기 때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비만이었던 그는 나중에 뚱보왕(Charles the Fat), 큰 사람(Kral le Grose)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큰 덩치와는 다르게 카를은 유년 시절부터 몸이 상당히 병약했으며, 간질을 앓았다. 그는 나중에 서프랑크도 다스렸는데 그리하여 서프랑크에는 두 명의 샤를 3세가 존재하게 되었다.

859년 바이에른 왕국의 왕인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알레만니아의 일부와 로트링겐의 남부를 합쳐 브라이스가우(Breisgau)라는 지역을 신설하고 카를을 브라이스가우의 백작으로 임명했다. 863년 맏형 카를만이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반란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자 864년 둘째 형 소 루트비히와 함께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슈바벤과 알레만니아의 영주

카를 3세

864년 카를은 슈바벤 공작에 임명되었다가 865년 알레만니아의 분봉왕으로 봉해졌다. 876년 아버지 독일인 루트비히카를 2세를 치기 위해 준비하다가 갑자기 죽자, 슈바벤을 상속받아 슈바벤의 왕이 되었다. 879년부터는 병석에 누운 맏형 카를만을 대신하여 이탈리아를 다스리기도 했다.

880년뇌졸중으로 쓰러진 맏형 카를만에게 적장자가 없었으므로 형 카를만에게서 이탈리아를 물려받았고,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리[1]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었던 카를만의 서자 케른텐 공작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하기도 했다.

880년 서프랑크서프랑크의 루이 2세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리베몽에서 로트링겐의 영토 분할 조약(리베몽 조약)을 체결하는 데 참석하였다. 그해 8월9월에는 서프랑크서프랑크의 루이 2세샤를로망 형제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비엔나를 침공, 스스로 프로방스의 왕을 자처하는 보소를 공격했으나 제거하지 못한다. 카를은 보소의 친척인 오툉의 리사르를 시켜 882년 8월 보소의 영역을 공략하고 그를 비엔나로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치세기간 중

이탈리아 원정과 서로마 황제 즉위

카를 3세의 제관 수여식
카를 3세 초반의 데나리온 동전 (881-882년)

881년 7월 18일 교황 요한네스 8세바티칸을 위협하는 스폴레토 공작 귀도 3세에게 반발하여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동시에 황제관을 약속한다. 정치적 야심이 고려되지 않고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인 점을 주목한 교황은 그가 황제관을 받을 적임자로 보고 그를 불러서 제관을 수여한다.

그해 교황 요한네스 8세의 초청으로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가 교황에게 881년 12월 로마에 도착, 요한네스 8세의 축성세례를 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바로 회군, 베르덩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 몸이 약해, 자주 병을 앓아 정사를 돌보는데 무기력했다 한다.

이에 앞서 11월이탈리아에 사자를 보내 귀도 3세에게 불법으로 교황을 위협하지 말도록 크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881년 봄과 겨울 제국의 북동부 네덜란드바이킹족이 침략, 카를은 이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통일 전쟁

바이킹이 사용하던 배

한편 교황귀도 3세에게 수시로 시달림을 당했고 그에게 원병을 요청했지만 그는 군대를 보내지 못했고, 사자만 몇 번을 보냈다. 882년 이후 거의 이탈리아 문제에 손을 대지 못했다. 카를은 친척인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를 시켜 귀도 3세를 치게 했지만, 전염병과 한파로 정벌은 실패하고 만다.

881년 여름 바이킹 족네덜란드에 침략해 오자 간신히 바이킹 족을 물리쳐 패퇴시켰다. 882년소루트비히가 사망할 때 아들인 루트비히는 그보다 앞서 사망했으므로 그는 작센바이에른을 수중에 넣어 동프랑크를 통일하였다. 프로방스를 다스리던 보소881년 스스로 자립하고 왕을 자처하자 루이 3세, 샤를로망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 형제와 손잡고 프로방스부르고뉴를 침략하여 보소를 공격하였다. 883년 귀도를 피해서 정치망명을 한 이탈리아군 사령관 베니스 공작 조반니 2세에게는 벌금 100데나리우스를 물린 뒤 이탈리아로 추방해버렸다.

882년 서프랑크루이 3세884년 11월 12일 샤를로망이 죽자 그들의 이복동생이자, 카를 자신의 미성년인 5촌 조카 샤를 3세를 대신하여 서프랑크의 왕위까지 차지했다. 초반에는 교황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덕망높은 군주로 알려졌지만 점차 그가 무능한데다가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프랑크에서부터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케른텐의 아르눌프는 이를 호기로 이용하여 정변을 기도한다.

제국 재통일과 내분

프랑크 왕국의 지도
교황 하드리아노 3세

885년 6월 그는 프로방스의 백작 보소가 자립, 자신의 왕국을 세운 프로방스부르군드를 제외한 나머지 샤를마뉴 시대의 프랑크 왕국의 영토를 모두 획득했다. 이로써 샤를마뉴 이후 다시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노르망디폴란드, 프로이센 일대에 나타난 바이킹이나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일대를 약탈하던 슬라브 족마자르 족을 돈으로 매수하여 되돌려보냈다. 재위기간 중 마자르 족과 슬라브 족이 프랑크 왕국을 침략했을 때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 보낸 사실이 발각되면서, 제후들과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황후인 슈바벤의 리첼다(Richardis)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885년 봄, 서자인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자신의 정식 계승자로 선포하려 했다. 그러나 각지의 주교, 대주교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카를은 곧 교황 하드리아노 3세으로 초대하였다. 885년 7월 하드리아노 3세 교황은 알프스 산맥을 넘다가 10월 포 강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주교들은 그가 교황을 죽였다고 의심하게 됐고, 그는 어쩔수 없이 스스로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정식 후계자로 선포하였다.

886년 초 카를은 그해 4월5월에 교황 영접을 계획하고 새 교황 스테파노 5세독일 바이브링엔으로 초대했다. 스테파노 5세 교황은 처음에 수락하였으나, 그가 아들 알레만니아의 베른하르트의 승인을 요구하려는 것을 간파하고 참석을 취소하였다. 결국 카를은 여러 번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 서자 베른하르트의 승인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만다.

퇴위 이후

반란과 몰락

카를 3세 시대의 프랑크 왕국 데나리온 동전
카를 3세

건강하지 못했던 그는 병으로 시달리게 되자 만년에는 업무를 소홀히 했다. 제국의 동부와 남부에 쳐들어온 사라센 이슬람의 침략을 막지 못했고, 황제 자리를 요구하는 귀도 3세에 맞선 교황청의 지원 요청에도 도와주지 못했다.

886년 파리에 침입한 바이킹족에 대항해 군대를 동원하기는 했지만 모두 침략자를 돈으로 매수해 돌려보냈다. 887년 1월, 프로방스부르고뉴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왕을 자처했던 보소가 사망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이르멘가르트의 요청으로, 자신의 손자뻘이기도 한[2] 보소의 어린아들 맹인왕 루이를 자신의 후견하에 두고 보호하였다.

그의 무능함과 동시에 야심을 품은 조카 아르눌프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영토인 바이에른을 요구하다가, 그가 외적을 돈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냈다며 그에게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아르눌프와 제후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서프랑크의 귀족들 또한 라울 등은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반란에 협력했다. 887년 11월 결국 동프랑크의 동부에서 왕을 자처한 아르눌프의 군사가 아헨에 입성, 11월 11일 카를은 폐위되고 말았다.

은퇴와 최후

그의 몰락은 샤를마뉴가 이룩한 제국의 몰락를 의미했다. 그가 죽자 알레만니아 공, 바이에른 공 작위와 동프랑크 왕국의 왕위, 이탈리아 왕위,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아르눌프에게,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외드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서프랑크아키텐 공국서프랑크 본국으로 분리된다.

888년 1월 이름뿐인 황제직에서도 물러나 알레만니아 노이딩겐(Neudingen)으로 가 병석에 누웠고, 곧 병마와 빈곤으로 고생하다가 1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노이딩겐에서 그를 수행하던 그의 종이 그를 목졸라 죽였다고도 한다.[3]

사후

시신은 라이체노이성 마리아와 마르코 수도원(Abteikirche St. Maria und Markus)에 안치되었으며 평지로 된 석관에는 KAROLVS III IMPERATOR라 새겨져 있다. 체구가 컸던 그는 사후 뚱보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퇴위와 죽음을 기점으로 프랑크 왕국은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

가계

카를 3세와 카슈아리아의 셀시우스

두 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후궁에게서 얻은 서자들이었다.

통일 과정

880년 맏형인 바이에른이탈리아카를만에게 후계자로 지목된 이후, 882년 둘째 형 소 루트비히는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서프랑크를 다스리던 조카 샤를로망 역시 후계자 없이 미성년자로 사망함으로서 그는 쉽게 프랑크 왕국의 전 영토를 무리없이 상속받을 수 있었다.

주석

  1. 카를만은 비정통 황제였다.
  2. 맹인왕 루트비히의 외조부인 황제 루트비히 2세나, 독일인 루트비히의 딸 외조모 이르멘가르트 모두 카롤링거 출신이었다.
  3. Docteur Augustin CabanèsLes morts mystérieuses de l'histoire, volume 1.

관련 항목

참고 자료

전임
로타르 1세
프랑크 왕국의 국왕
(총괄)

884년 - 888년 1월
후임
(왕국 붕괴)
전임
독일왕 루트비히
알레만니아 공
865년 - 888년
후임
베른하르트
동프랑크로 편입(사실상 아르눌프)
전임
독일왕 루트비히
알레만니아국왕
876년 - 888년
후임
동프랑크로 편입(사실상 아르눌프)
전임
소 루트비히
슈바벤국왕
880년 - 888년
후임
알레만니아,작센,바이에른과 통합,부르고뉴 왕국 분리(사실상 아르눌프임)(부르고뉴 왕국은 루돌프 1세)
전임
소 루트비히
작센의 군주(작센 공국은 아님)
882년 - 888년
후임
동프랑크로 편입(사실상 아르눌프)
전임
카를로만 3세
바이에른 공
880년 - 882년
후임
아르눌프
전임
소 루트비히
로타링기아의 국왕
882년 - 888년
후임
아르눌프
전임
대머리왕 카를
카를만(비정통)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881년 - 888년
후임
귀도 1세
전임
카를만
이탈리아국왕
880년 - 888년
후임
아르눌프
전임
샤를로망
서프랑크국왕
884년 - 888년 1월
후임
외드
(아키텐루돌프 2세)
전임
보소
부르군드국왕
887년 1월 - 888년 1월
후임
루돌프 1세
전임
보소
프로방스국왕
887년 1월 - 888년 1월
후임
루트비히 3세 맹인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