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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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열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9월 9일 (수) 21:37 판 (→‎바깥 고리)

최준(崔浚, 1884년 ~ 1970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사회운동가, 교육인이다. 호는 문파(汶坡). 본관은 경주, 경상북도 경주 출신이다. '경주 최부잣집' 12대로 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져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자하였고, 일제강점기때 백산상회 대표로 활동. 일제의 치열한 감시 속에서 임정 등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의 설립자이다.

생애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피체되기도 했던 그는 3·1 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1918년인촌 김성수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1]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1]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김성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1] 최준은 김성수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사후

1983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전재산을 처분하여 최부잣집이 사라졌다고 알려졌으나 그의 후손들은 현존해 있다.

종손은 최염으로 고등학교 졸업후 출향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2] 성균관 고문으로 있다.

같이보기

주석

  1.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전진문 지음 | 황금가지 | 2007) 182쪽
  2. 최보식, '경주 최부잣집' 종손 최염씨,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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