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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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최용건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2대 국가수반
임기 1958년 3월 4일~1972년 12월 14일
국가 부수반 홍명희(1958~1968)
박금철(1961~1967[1])
총리 김일성(1948~1972)
전임: 김두봉(제1대)
후임: 김일성(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4대 국가 부주석
임기 1972년 12월 14일~1976년 9월 19일
전임: 홍명희(3대)
후임: [[강량욱, 박성철]](5대)

조선인민군의 제1대 총사령
임기 1948년 2월 8일~1950년 7월 4일
후임: 김일성(2대)

신상정보
출생일 1900년 3월 26일(1900-03-26)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망일 1976년 9월 19일(1976-09-19)(76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대한제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학력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
정당 조선공산당->조선민주당->조선사회민주당
배우자 왕옥환
종교 무종교[2]
별명 호는 석천, 다른 이름으로는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 등
최용건
별명 다른 이름: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묘향산
복무 소비에트연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기간 1948년 ~ 1976년 9월 19일
근무 동북항일연군
소련군
조선인민군
최종계급 동북항일연군 군단장
소련군 대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
지휘 한국전쟁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민족보위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 수반(1948~72)
국가 부주석(1972~76)

최용건(崔庸健, 1900년 ~ 1976년 9월 19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조선인민군총사령을, 1955년 7월부터 1958년 3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부총리를, 1958년 3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가수반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일성, 김책과 더불어 만주 게릴라파의 핵심 트로이카를 이루었고,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훈련 교관을 지내는 등 군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 뒤 동북항일연군교도여단(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후 38선 이북 조선으로 귀국하여 1948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창설과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48년 민족보위성상, 북한조선 인민군의 총사령관,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등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서 연합군에 패배한 장군이다. 1958년 3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에 올랐다. 호는 석천(石泉)[3] 이며, 다른 이름으로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김지강(金志剛) 등이 있다. 평안북도 태천군 출신이다.

생애

최용건은 1900년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태어났다. 평안북도 정주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21년 3월 정주 오산중학교를 중퇴하였다.[4]

청년기

군관학교 활동

중국으로 건너가 쿤밍운남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좌익계 한국인 사회주의자 중 연장자에 속하였다.[5] 또한 나중에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의 총사령이 될 저우 바오중과 운남군관학교 동창이 되었다.

1925년 4월 중국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졸업하고 황푸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훈련 교관을 지내는 등 군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개석이 주도하는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주은래 등이 있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5] 1926년경부터 항일 빨치산 활동에 참여한다.

1927년 발생한 광저우 코뮌광저우 폭동에도 가담했다. 폭동 당시 그는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지도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비롯한 중국인 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가담하였으나 실패하고 사태는 진압되었다.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200명 정도 참가했던 이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혁명가가 희생되었다.[5]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최용건 등은 살아남은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만주로 파견된다. 조선공산당 화요파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흑룡강성 등을 다니며 모범소학교를 비롯, 각종 소학교, 농민학교 등을 여러 개 세우면서 교육사업과 농촌 계몽 활동을 하며 중국 공산당 입당을 위해서 노력하고, 이곳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조직적으로 항일세력을 키운다.[5]

1940년대의 만주 군벌로 활동할 무렵의 최용건

이민 여사는 어려서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이야기했다. '제법 학교 규모가 커서 중급반 고급반까지 있었고 건물도 2층이었으며,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저녁에는 농민들을 모아 야학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최용건이 교장이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힘들었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최용건을 따라온 젊은 선생들이 가르쳤다고 한다. 최용건은 이러한 항일 근거지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했다.[5]'는 것이다.

당시 항일투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여러개 썼는데, 각종 기록에 최석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최용건이다.[5] 최석천이라는 가명 외에 그는 김지강이라는 가명도 썼다.[5]

항일무장투쟁

중국공산당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 북만주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발족한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7군단장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전하였다. 이후 동북항일연군 군단장, 제2로군참모장, 정치위원등 을 지냈고, 소련 극동지방으로 이동하여 1940년대 들어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참가했다. 당시 직급은 김책, 김일성보다 한 단계 높았다.

1942년 7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근처 비야츠크에서 88국제려단(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부참모장에 선출되었다.[6] 8·15해방 직전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김일성·김책(金策)·안길 등과 함께 조선의 해방사업을 추진할 조선공작단 결성에 가담하였다.[7]

해방 이후

귀국과 광복 직후

1945년 8월 광복 후 평안남도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9월 귀국하여 그는 11월 3일 조선민주당의 조직에 참여하여[8] 오산중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조만식과 함께 조선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조선민주당 중앙당 부당수에 선출되었다.[8] 그의 부당수 선출 배경에는 김일성이 정치적인 복선을 가지고 잠입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8] 는 관측도 있다. 조선민주당을 와해·장악할 목적으로 김일성의 천거를 받아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겸임시켰다[4] 는 것이다.

1946년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55년까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고, 1월 당수 조만식평양의 고려호텔에 감금당하자 그는 조선민주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9] 에 선출되었다. 서울특별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을 파견해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1946년 3월 그의 집을 습격했다.[4]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최용건을 저격하는데 실패하고 도주하였다. 1947년 2월 최용건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선출되었다.[4]

북한 정부 수립 활동

1948년 2월 그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창립에 참석하였다.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이 38선 이북 조선의 평양에 모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자 그는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북조선측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별다른 내용 없이 결렬되었다.

1948년 그는 다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재임명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겸 예산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파일:Northkoreank1.jpg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최용건 (첫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흰 옷에 검은 바지 입은 사람)
1949년 3월,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박헌영의 우측, 홍명희의 좌측이 최용건(좌측부터 순서대로 박헌영, 최용건, 홍명희,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민족보위성상에 임명(9월 9일)되었다.[10]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9]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6월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휴전 직후의 정치 활동

한국전쟁 내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53년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이 되어 재판하였다. 1954년 내각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5년 7월 내각 부총리 겸 민족보위성 상이 되었다.[4] 55년 12월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의 재판관으로 박헌영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중국마오쩌둥, 저우 언라이로부터 박헌영을 살려둘 수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4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동시에 로동당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조선로동당 조직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국가 수반 취임

1958년 3월 초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이 반당종파행위로 실각하자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내각은 김일성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고 그는 형식적인 국가원수직으로 만족해야 했다.

법적 국가원수로 행정부와 의회(최고인민회의)를 장악한 그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조선로동당 정치위원·조선로동당비서 등을 겸하면서 외교적 노력에 치중하여 옛 소련·동유럽·중국·중동·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대외활동을 하였다. 그는 명목상 국가수반직과 의회 의장직을 차지하였으나 실권은 국무총리였던 김일성에게 있었다.

1958년 12월 중앙위생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됐다. 1961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1966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최용건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요청을 받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1965년 3월)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11]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상무위원·조직위원이 되어 그는 당(黨)과 정(政)·(軍)의 요인으로 부상했다.

국가부주석 취임

1972년 12월 국가수반이 주석직으로 변경되면서 그는 부수반인 국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에 선출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겸임했다. 박헌영의 몰락 이후 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사실상 김일성 정권의 2인자로 계속 자리하고 있었다. 최용건은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예외적인 인물이었고, 존칭을 쓸 경우에도 '일성 동지' 또는 '김 장군'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항일 투쟁 시기에 동료인 중국인 왕옥환과 결혼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최운주가 최용건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본인은 사실 확인을 꺼렸다.[12] 왕옥환은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던 최용건을 자기의 침소 밑에 숨겨 구원해주면서 부부가 됐다. 중국인 부잣집 딸이었던 왕옥환은 아버지뻘 되는 최용건을 사랑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13]

1976년 9월 19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상훈으로는 1955년 9월 자유독립훈장을 수상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을 2회 수상하였으며, 1960년 6월 로력영웅 칭호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사후

최용건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 한마디 때문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잊혀진 설도 있다. 김일성이 정권을 자신이 지목한 후계자에게 물려주려 하자 최용건은 죽기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다.[13]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성김정일은 대노하여 최용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묻어버리고 일체 공적을 평가하지 않았다.[13] 76년 9월 최용건이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장례는 소홀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최용건에 대해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김일성의 빨치산 선배인 최현이 사망한 후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최현의 공적을 선전해준 것과는 대비된다 [13]'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용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외교적 노력

그는 공직에 있는 동안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 자격으로 외교활동과 외국 순방을 하였다. 그는 직접 중국·일본·인도 등의 아시아 국가와 그 밖에 말리·기니·캄보디아·이라크·시리아·이집트·알제리·탄자니아·소련·쿠바 등지를 직접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4] 중국주덕, 주은래, 하룡 등과는 절친한 사이여서 최용건은 조-중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때 해결사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13]

평가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이나 88여단 시절에도 직접적인 군사활동 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5] 애국자로도 평가된다.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상훈

가족

기타

  • 그는 이범석운남강무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 광저우 폭동 당시 한국인 공산당원으로 배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국민당군의 잔혹한 진압을 강조하며 사람들을 설득하였으나, 사태가 격화되자 자신은 봉기 현장에서 교묘히 빠져나가 생명을 건졌다.
  •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는 얼굴과 외모였고, 멋쟁이이기도 했던 그는 만주 항일유격대 시절부터 머리 헤어 스타일 과 옷차림에 항상 신경을 썼다고 한다. 늘 그는 칼처럼 다려진 옷차림을 하고 공식, 비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최용건이 등장한 작품

함께 보기

참고자료

관련 서적

  •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 和田春樹,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和田春樹 著·이종석 譯, 창작과비평사, 1992)
  •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사비평사, 1995)
  • 와다 하루끼, 조선전쟁(와다 하루끼 저·서동만 역, 창작과비평사, 1999)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 김사량, 《노마만리》 (실천문학사, 2002)

주석

  1. 북한 민족주의와 김일성 체제-자유북한방송
  2. 공산주의
  3. 김사량, 《노마만리》 (실천문학사, 2002) 226페이지
  4. Daum 백과사전, 최용건(북한 군인)
  5. [비화발굴] 항일무장투쟁시기의 김일성 빨치산부대 신동아 2000.03.01 통권 486 호
  6.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3~234페이지
  7. daum 백과사전-김일성
  8. '조선민주당' - 네이트 백과사전
  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88족, 나남출판
  10.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면. 
  11.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한국일보사. 
  12. 《통일뉴스》 (2003.3.4) 北 前국가부주석 최용건 아들 최운주
  13. '김일성 선배' 최용건의 부인은 왜 중국에서 죽었나? Daily NK 2007년 1월 18일자 기사
  14. 로력영웅 수여 당시 국기훈장1급의 동시 수훈을 포함하여 총 2회 수상.
전임
-
제1대 조선인민군총사령
1948년 2월 8일 - 1950년 7월 4일
후임
김일성
전임
김두봉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1958년 3월 3일 - 1972년 4월
후임
황장엽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부주석
(강량욱과 공동)
1972년 12월 14일 - 1976년 9월 19일
후임
강량욱, 박성철
전임
(초대)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상
1948년 9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상
1955년 7월 - 1957년 9월 20일
후임
김광협
전임
박헌영, 박창옥, 홍명희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부총리
(박창옥, 최창익, 홍명희와 공동)
1955년 7월 - 1956년 9월
후임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전임
홍명희, 박창옥, 최용건, 최창익
제4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부총리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홍명희와 공동)
1956년 9월 - 1957년 9월 20일
후임
김일, 홍명희,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전임
김일, 홍명희,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최용건
제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부총리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홍명희와 공동)
1957년 9월 20일 - 1958년 3월
후임
김광협, 김창만, 정일룡, 남일, 리종옥, 리주연, 정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