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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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마스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1월 23일 (금) 02:59 판

최선(崔詵, 1138년 ~ 1209년)은 고려 중기 ~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최유청(崔惟淸)의 5남이며, 『고려사』 「최유청전」에 자신의 열전도 들어 있다.

생애

1160년(의종 14) 문과에 급제했으며, 1172년(명종 2) 보문각교감(寶門閣校勘)으로서 자신의 좌주(座主)[1]김영부(金永夫)[2]의 묘지명을 지었다.[3]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서 흥화도(興化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폈다.[4]

1180년(명종 10) 왕의 어머니인 공예태후(恭睿太后)가 유종(乳瘇)을 앓자 왕이 친동생인 승려 충희(冲曦)를 불러 간병하게 하였는데, 충희가 궁녀들과 난잡한 짓을 자주 하고 또 공주와도 간음하여 추잡한 소문이 대궐 밖까지 퍼졌다.

이 때 최선은 우사간(右司諫)으로서 상소하여 충희의 추잡한 행실을 풍자하며 그를 절로 다시 내보낼 것을 청했으나, 도리어 형제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대간(臺諫)으로서 감히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으며,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충희에게 빌붙어서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후에 복직되어 1186년(명종 16) 판장작감(判將作監)으로서 대사성(大司成) 황보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의 시험관을 맡아 양공준(梁公俊) 등 37명을 선발했고[5], 1192년(명종 22)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국검(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 增續資治通鑑』과 『태평어람 太平御覽』을 교정했다.[6]

1194년(명종 24)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김군수(金君綏)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으며, 1196년(명종 26) 역시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문과의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조정관(趙挺觀)[7] 등 37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했으며[8], 1199년(신종 2)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문과의 지공거를 맡아 최득검(崔得儉)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5]

1200년(신종 3) 왕이 최선이 나이가 많고 덕행이 있다 하여 수태부(守太傅)·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으며[6], 이듬해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졌다.[9]

1202년(신종 5)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과 함께 예빈성(禮賓省)에서 시험을 쳐 역관을 뽑았으며[8], 1206년(희종 2) 수태사(守太師)·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판이부사·상주국으로서 치사(致仕)[10]한 후, 형 최당(崔讜)이 만든 기로회에 들어갔는데, 이 당시 나이가 69세였다.[11]

1209년(희종 5) 졸하자 임금이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후에 희종(熙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6]

평가

『고려사』는 최선에 대해 「최유청전」에서 이렇게 평했다.

최선은 문학(文學, 학문)으로 세상에 소문이 났다.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자기의 문벌을 자부하지 않았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선비를 우대했으며, 두 차례 지공거를 맡으면서 명사(名士)를 많이 얻었다.

가족 관계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부분은 『고려사』가 출처이다.

  • 증조 - 최원립(崔爰立)[12] :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증(贈) 태자태부(太子太傅)
    • 조부 - 최석(崔奭, ? ~ 1099년) : 검교태부(檢校太傅)·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史)·판이예부사(判吏禮部事)·상주국(上柱國)·창원현개국자(昌原縣開國子)·식읍(食邑) 500호, 예숙공(譽肅公)
      • 아버지 - 최유청(崔惟淸, 1093년 ~ 1174년) : 검교태위(檢校太尉)·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판예부사(判禮部事), 문숙공(文淑公)
      • 어머니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 1080년 ~ 1136년)의 장녀[13]
        • 부인 - 미상
          • 장남 - 최종원(崔宗源) :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 차남 - 최종준(崔宗峻, ? ~ 1246년) : 문하시중(門下侍中), 선숙공(宣肅公)
          • 3남 - 최종재(崔宗梓) : 우복야(右僕射)·한림학사승지
          • 4남 - 최종번(崔宗蕃) : 승선(承宣), 최평(崔坪)의 아버지
          • 첫째 사위 - 조충(趙沖, 1171년 ~ 1220년)[14] : 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수국사(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증 문하시중, 문정공(文正公)
          • 둘째 사위 - 최홍윤(崔洪胤, 1153년 ~ 1229년)[15] : 수태보·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판병부사, 경문공(景文公)
          • 셋째 사위 - 정숙첨(鄭叔瞻)[15] : 평장사(平章事)
          • 넷째 사위 - 문후식(文侯軾)[15]

형제에 대해서는 아버지 최유청 문서를 참조하라.

각주

  1. 과거 급제자가 자신을 뽑아 준 시험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2. 김보당(金甫當)의 아버지이다.
  3. 『김영부 묘지명』
  4. 『고려사』 「명종세가」
  5. 『고려사』 「선거지」
  6. 『고려사』 「최유청전」
  7. 조정규(趙挺規)라고도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8. 『고려사』 「신종세가」
  9. 다만 문하시랑동평장사는 이 때 기홍수(奇洪壽)에게, 판이부사는 1205년(신종 8) 최충헌(崔忠獻)에게 넘어갔다.
  10.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일
  11. 『졸고천백』 「해동후기로회 海東後耆老會 서문」
  12. 『최당 묘지명』
  13. 『최유청 묘지명』
  14. 『조충 묘지명』
  15. 『씨족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