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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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3월 7일 (금) 15:39 판 (→‎문화적 특징)

진한(辰韓)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三韓)의 하나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동해에 접하고, 서쪽은 마한(馬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모두 12개의 국가로 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발전하여 신라(新羅)가 되었다.

역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진한(辰韓)은 중국 (秦)에서 옮겨온 유민으로 마한에서 동쪽의 땅을 분할하여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사로국의 원 거주민들이 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1]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2]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3]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로국(후일의 신라)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세력을 성장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문화적 특징

진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 토지가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였다.[4]
  • 풍속이 유순하다.
  • 남녀에 구별이 있다.
  • 철전(鐵殿)을 사용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다.
  • 가무를 즐겼다.[5]
  • 삼국지 위서 동이전[6](三國志魏書東夷伝)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兒生, 便以石厭 其頭, 欲其褊. 今辰韓人皆褊頭")

진한 12개국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12개의 소국 중 큰 나라는 5 ~ 6천 가구 작은 나라는 6 ~ 7백 가구라 하였다.

그 외의 국가

삼국사기에는 이 외에도 후에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참고문헌 및 링크

  • 김광, 《대동사강(大東史綱)》, 대동사강사, 1926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진한 항목
  2. 천관우, 〈진·변한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20, 1976
  3. 신채호 (1931). 〈제4편 제4장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조선상고사》. ...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封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a) '신수두'의 건설과 b)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1) 해마다의 조알(朝謁)과 2)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4. 신채호 (1931). 〈제4편 제4장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조선상고사》. 진한·변한의 자치령 수십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보리·기장·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5. 신채호 (1931). 〈제4편 제4장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조선상고사》.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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