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메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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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hwong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4월 23일 (수) 00:31 판
주세페 메아차
개인 정보
본명 Giuseppe Meazza
출생일 1910년 8월 23일
출생지 이탈리아의 기 이탈리아 밀라노
사망일 1979년 8월 21일(1979-08-21) (향년 68세)
169cm
포지션 은퇴 (과거 스트라이커)
구단 기록*
연도 구단 출전 (득점)
1927-1940
1940-1942
1942-1943
1944
1945-1946
1946-1947
이탈리아 인테르나치오날레
이탈리아 AC 밀란
이탈리아 유벤투스
이탈리아 바레세
이탈리아 아탈란타
이탈리아 인테르나치오날레
3480(241)
0370(9)
0270(10)
0200(7)
0140(2)
0170(2)
국가대표팀 기록
1930-1939 이탈리아 0530(33)
지도자 기록
1946
1946-1948
1948-1949
1941-1951
1952-1953
1955-1956
1957
이탈리아 아탈란타
이탈리아 인테르나치오날레
튀르키예 베식타시 JK
이탈리아 오로라 프로 파트리아
이탈리아
이탈리아 인테르나치오날레
이탈리아 인테르나치오날레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주세페 메아차 (이탈리아어: Giuseppe Meazza[1], 1910년 8월 23일 ~ 1979년 8월 21일)는 30년대 인테르나치오날레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다.

유년 시절과 기술적 재능

그는 모든 그의 선수 경력을 중앙 공격수로 보냈지만, 그의 기술과 재능은 뛰어난 미드필더로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 경력의 반 이상을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약하였다. 그는 탁월한 슈팅 능력과 숨막히는 드리블 기술과 패스를 보는 눈, 키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였으나 뛰어난 헤딩 능력을 가진 위대한 리더였다.

그의 별명인 'il Balilla'는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활약했을 때의 고참 선수였던 레오나르도 콘티가 붙였다. 'Pepp'이란 별명은 콘티의 자리를 대신하여 메아차가 17살이란 매우 어린 나이에 성인 무대에서 데뷔를 하도록 결정한 아르파드 웨이즈가 붙여줬다. 당시 콘티는 "우리는 이제 유치원에서 선수를 데려올 거야!"라고 풍자적으로 외쳤다. 8살에서 14살까지의 어린이들을 모은 오페라 나치오날레 바빌라파시스트 유소년 조직이 1926년에 설립하였기 때문에 콘티는 이를 신인 선수를 묘사하기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었다. 메아차는 코모에서 펼처진 코파 볼타 밀라네스 우니오네 스포르티바전에서 2골을 넣으면서 팀이 6-2로 승리하는데 기여하면서 강렬한 데뷔전을 치루면서 전임자였던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의 콘티를 말을 잃게 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메아차의 공식 데뷔전인 1927년 9월 12일의 이탈리안 챔피언쉽에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진 않았지만 콘티는 그의 경기를 '지능적이고, 신선하고, 빠르다'라고 칭찬하였다.

메아차는 밀라노의 포르타 비토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였으며, 그는 어머니의 손에서 길러졌다. 메드글리아에서 온 에르실리아가 그의 어머니가 과일을 파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가 축구를 시작한 이유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신발은 숨겼으며, 그로 인하여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맨발로 축구를 시작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6살 때 거리에서 '마에스트리 캄피오네시'라는 팀에서 넝마 조각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마침내 12살 때 그는 그가 추구하는 축구선수의 꿈을 어머니께 허락받았으며, 그리고 글로리아 FC에서 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팬이 그에게 처음으로 그에게 맞는 축구화를 사준 곳이기도 하다.

메아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첫 번째 이탈리아 축구선수이며, 또한 처음으로 개인 후원사까지 생긴 사람이다. 그는 그의 쿠페 자동차, 샴페인, 여자들을 좋아했으며 또한 유일하게 흡연이 허용된 대표팀 선수였다. 메아차는 당시의 뛰어난 수비수들에게 굴욕을 준 것과 경기 시작전에 매춘굴에서 잠을 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축구화가 공에 닿는 순간, 그는 뒤에서 나오면서 양발태클을 하는 시대의 건장한 수비수들에게 공포의 원인이 되었다. 때때로 그는 그의 팀 동료들이 연습을 다 끝낼 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는 탱고를 좋아했는데 이를 이용하여 폭스-트렛 템포를 타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골을 넣을 수가 있었다. 그는 훌륭한 드리블을 가졌는데, 그의 속력에도 불구하고 머리의 젤이 잘못 놓이는 일이 없었다. 또한 그는 키가 크지 않았지만 현저하게 공중전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메아차는 그의 팀 동료들에게 많은 기회를 만들어줬으며 또한 골도 그만큼 많이 기록하였다. 그의 골인 'a foglia morta', '낙엽 기술'은 골키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양발과 주목할만한 시야, 유명한 터닝 기술로 뛰어난 패스 실력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골은 하프라인에서 공을 잡아 춤추듯이 잰 걸음으로 상대팀 선수들을 드리블로 뚫고 나가 공이 앞에 오기 전까지 몸을 돌린 후에 잠깐 멈춰 투우에서 창을 찔러 소를 죽이려는 투우사처럼 골키퍼를 불러내어 슈팅 동작으로 속인 후 드리블로 속아 넘어간 골키퍼를 앞서나가 쉽게 골문에 넣었다. 원정 경기에서는 수비수들은 자주 반칙을 했으며 굴욕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정강이를 차기도 했다. 'Gol alla Meazza'와 'finte alla Meazza'란 말은 남을 속이기 위한 방법들이나 드리블로 벗어나 매우 고무적인 골을 넣는 모습으로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의 골들은 'ad invito'라고 그가 골키퍼들을 불러내어 드리블로 그 주위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아직도 유명한 말이다. 메아차는 '속임수를 알지 못 하고 얻어낸 페널티 킥을 막아내는 골키퍼들보다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이탈리아가 월드컵 2연패를 했을 때의 지도자인 비토리오 포초는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공격수로 태어났다. 그는 경기를 보고, 상황을 이해하며 조심스럽게 공을 배급하며 공격 작업을 만들어낸다. 그가 팀에 있는 것은 1:0인 상태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지아니 브레라는 메아차를 'il Folber'라고 불렀으며 메아차의 경기 스타일은 'fasso-tuto-mi'라고 했다. 그는 메아차를 완성된 중앙 미드필더와 재치가 풍부한 곡예사로 생각했다. 브레라는 메아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브라질인과 아르헨티나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두드러지는 이탈리아인이다."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가능한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클럽의 좋은 시기인 1963년의 인테르나치오날레의 부회장인 페피노 프리시코는 "때때로 아주 불쾌한 위기들이 그의 미칠듯한 성적 행위들과 경기에 대한 열정들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메아차는 위대했으며, 무적이었다. 그가 경기장을 접수하면 그는 입이 벌어질만한 것을 남겨준다."

AC 밀란에서 그와 같이 뛰었고 나중에 감독이 되는 브루노 아카리 4세는 "메아차는 전술에 대해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한 사람으로 그가 페널티 박스 안에 있을 때 그는 왕이 되었다. 그의 기술적 능력은 펠레와 비교되었다."

그의 고향 밀라노의 으뜸가는 경기장이며 도시 라이벌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AC 밀란이 같이 쓰고 있는 경기장인 산 시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공식적으로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로 불리고 있다.

클럽 경력

13살에 그는 AC 밀란을 동경하여 팀에 들기를 원했지만 너무 말랐다는 이유로 거부 당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받아들여졌다. 그가 무작위로 거리에서 넝마 공을 트래핑하는 것을 인테르의 스카우터 눈에 뛰였고 재빨리 계약하였다. 그들은 메아차에게 스테이크를 먹이면서 메아차는 더 커졌고 더 튼튼해졌다. 처음에 그는 그의 공격 본능을 따라 공격수가 되는 대신에 수비수의 공간을 채워놓기 위해 기용되었다. 그렇지만 운좋겠도 그의 유소년 코치가 그런 실수를 바로 잡았다. 그는 데뷔전인 코모에서 열린 코파 볼타 경기에서 밀라네스 우니오네 스포르티바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면서 팀이 6-2로 승리하도록 했다.

메아차는 아직까지도 세리에 A 데뷔 시즌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이다. 그가 세리에 A 1929-30에서 넣은 31골은 이후로는 다시는 그와 같은 기록을 가진 선수는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18살 때 세리에 A가 북쪽 지방과 중부 지방, 그리고 남부 지방으로 나누어졌을 때 플레이오프를 포함하여 29경기를 뛰면서 38골을 넣었다. 그는 한 경기에 5골을 넣었으며 이는 이 시즌에서 2번 있었다.인테르나치오날레가 1929년 1월 6일 피스토이에세전에서 9-1로 이긴 것과 같은 해 3월 17일에서 베로나전에서 9-0으로 이긴 것이 바로 그 경기들이다. 또한 그는 한 경기에서 6골을 넣었는데 이는 인테르나치오날레가 같은 시즌 같은 해 5월 12일에 베네치아전에서 10-2로 이겼을 때이다. 1930년 4월 27일에는 인테르나치오날레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AS 로마와 경기했지만 메아차가 처음 3골을 3분만에 넣고 총 4골을 넣으면서 이길 수 있었다.

메아차가 선수 명단에 있으면, 인테르나치오날레는(파시스트 법으로 암브로시아나로 이름이 바뀐 상태) 3번의 세리에 A 우승을 하였다.(1930, 1938, 1940) 또한 1939년에는그의 팀이 처음으로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하도록 하였다. 특히 1930년의 스쿠데토는 1920년 이후로 볼로냐 FC 1909, 토리노 FC, 유벤투스 FC, 제노아 CFC에게 밀린 이후로 맞이한 우승이기에 더 각별하였다. 이는 메아차가 눈부신 활약으로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다는 말이다. 이를 결정짓는 제노아와의 경기에서 후반전에 해트트릭을 하면서 인테르나치오날레가 3-0으로 이기게 하였다. 그는 3번의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 했으며(1930, 1936, 1938), 세리에 A가 시작되기 전인 1929년의 득점왕이며 미트로파 컵의 득점왕을 세 번 차지하였다.(1930년 7골, 1933년 5골, 1936년 10골)

세리에 A 1933-34 시즌에는 유벤투스의 골키퍼이자 1934년 월드컵 우승팀인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잔피에로 콤비와 내기를 하였다. 콤비가 메아차에게 도전했는데 그 누구도, 심지어 메아차라도 자신을 돌파하여 골을 넣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메아차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콤비는 그리고 메아차와 또 다른 내기를 하였다. 몇 주 뒤에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메아차는 화려한 바이시클 킥으로 유벤투스 골키퍼를 상대로 득점을 하였다. 콤비는 그것은 공식 경기가 아니라면서 다시 내기를 하였다. 1933년 5월 25일 밀라노의 아레나 시비카에서 열린 암브로시아나 인테르와 유벤투스의 경기가 있었다. 여기서 메아차는 깜짝 놀랄 만한 두 골에 관여하였다. 첫 골은 연습 때와 똑같이 콤비를 상대로 오버헤드킥 득점을 올렸다. 두 번째 골은 콤비를 속이기 전에 수비수들을 드리블로 돌파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면서 골문으로 살짝 차 넣었다. 콤비는 바로 일어나서 메아차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때때로 그는 샴페인과 여자를 좋아한 것이 구단 운영진과 마찰을 빚어내다.

그는 회고하길, "운 좋게도 내가 경기장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갈 수 있었다. 나의 팀동료들과 감독은 나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경기 시작전까지 5분 남았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피치 위의 팀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구단주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경기 후에 그를 처리할 것 입니다. 우리는 그의 진상을 아는데까지 왔습니다.' 운 좋게도 나는 해트트릭을 하였고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건들의 종류는 곧 평범한 것이 되었다. 1937년, 밀라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하는 경기이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 메아차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구단주는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여자 마사지사와 다른 트레이널르 차를 태워 그를 찾도록 하였다. 그들은 메아차를 침대에서 찾았는데 깊이 잠들었으며 코까지 골고 있었다. 세수를 할 시간도 없이, 그들은 메아차를 끌고 경기장 안으로 서둘러 가도록 하였다. 뒤쪽 좌석에 누워있는 메아차가 그들에게 말했길 그는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었으며 또한 말하길 자신이 사자와 같았다고 하였다. 사자 메아차는 어떤 다툼도 없이 드레싱 룸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메아차에게 재빨리 9번 마킹이 된 유니폼을 주었다. 메아차는 2골을 넣었으며 그는 경기장에서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유벤투스를 2-1로 이겼으며 승점 2점 차로 스쿠데토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암브로시아나가 AS 바리를 꺾은 세리에 A 1937-38에는 그는 5골을 넣어 9-2로 승리하게 하였다. 다음 주에는 루체세를 상대로 해트르릭을 기록하였다. 그는 팀동료의 페라리스 2세, 페라리, 로카텔리와 함께 1938년 파리에서 열린 월드컵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같은 해에 인테르나치오날레는 4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첫 번째 코파 이탈리아컵도 1939년에 차지한다.

세리에 1938-39 시즌에는 부상으로 대부분의 경기에서 제외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그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경력 역사상 가장 저주스러운 수간으로 꼽는 1940년 11월 28일 AC 밀란으로 이적한 것이다. 한 세기 동안 라이벌에서 메아차는 유일하게 두 팀의 틈을 가깝게 연결해주는 사람이다. 다음해 2월 9일,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데르비 델라 마도니아 경기 전에 메아차는 드레싱 룸에서 울었지만, 그는 동점골을 넣으며 밀란이 2-2로 비기도록 하였다. 그는 2년간 밀란의 로쏘네리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그는 유벤투스, AS 바레세 1910, 아탈란타 BC에서 뛰었다.

그는 1942년 10월 18일유벤투스 FC에서 토리노 FC와의 더비 전에서 데뷔하였다. 데뷔가 그렇게 기쁘지 않았던 것이, 메아차는 훈련되지 않았으며 체중이 더 나가고 움직임도 둔해진 것으로 보였다. 그가 8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들어가서 골키퍼와 직면했을 때, 관중들은 유명한 '초대하여 골을 넣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움직임을 보이기 위한 필요한 속력을 가지지 못 했고 결국 그는 면목없게도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토리노가 5-2로 이긴 것으로 끝이 났다. 그가 중앙 공격수로 나오면서는 상황이 나아졌으며 그는 이 한 시즌 동안 암브로시아나 인테르를 상대로 한 2골을 포함한 10골을 기록하였다.

1946년에 그는 다시 인테르나치오날레로 돌아와 플레잉코치가 되었다. 17경기를 뛰었으며 좌천의 위험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위해 2골을 기록하면서 그의 마지막 선수 생활을 마쳤다.

국가대표팀 경력

메아차는 이탈리아으로 그들이 모두 우승한 1934년 FIFA 월드컵1938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개최국을 제외한 팀들 중에서 우승팀이 나온 최초의 대회인 1938년 월드컵에서 메아차는 지오반니 페라리, 구이도 마세티, 에랄도 몬체글리오 등과 함께 월드컵 2연패를 한 선수들로 기록되었다. 현재까지 세계에서 1958년 FIFA 월드컵, 1962년 FIFA 월드컵을 연속해서 차지한 브라질과 함께 두 팀만이 대회 2연패를 하였다.

그는 1930년 2월 9일 로마에서 열린 스위스를 상대로 처음으로 아주리 셔츠를 입었다. 여전히 19살 밖에 안 되었지만 메아차는 37분과 39분에 각각 골을 기록하면서 데뷔전에서 2골을 넣으면서 4-2로 이기도록 하였다. 다음 경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서 2-0으로 이기게 하였다. 몇 달 뒤, 1930년 5월 11일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라르코스, 히르체르, 팔 티트코스가 있는 헝가리전에서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0 대승을 거두도록 하면서,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강팀들이 참가하는 중부 유럽 국제 컵 정상을 차지하도록 하였다.

1931년 1월 25일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3골을 넣으면서 5-0 승리에 기여하였다.

중부 유럽 국제 컵이 진행되던 같은 해 2월 22일 산 시로에서 메아차는 당시 최강자였던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호르바트가 4분에 먼저 골을 넣은 경기를 뒤집었다. 메아차는 드리블을 하면서 두 명의 수비수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축구화 바닥으로 공을 멈춘 후 두 수비수가 땅에 떨어지게 만들고 골문을 향에 달리기 전에 요제프 스미스티크를 속임수로 따돌린 후에 로만 샴사이즈를 드리블로 돌파 후 골키퍼인 루돌프 히든과 대치하였다. 그리고 히든을 속임수로 따돌리면서 드리블을 하면서 키퍼가 샴사이즈와 충돌하면서 중심을 잃게 만들면서 골문으로 공을 살짝 차넣은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들 중 하나를 보여주면서 동점을 만들었고, 결국 2-1로 역전할 수 있었다.

그의 첫 15경기는 중앙 공격수로 나왔으나 1933년, 볼로냐에서 독일을 3-1로 이기면서 보여준 다재다능한 모습이 그를 비토리오 포초가 그를 오른쪽 처진 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했다. 팀동료인 안젤로 스키아비오를 적응시키기 위한 이 변화가 이탈리아가 다음 해 월드컵에서 득점하기 위해 공이 흘러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대회 동안에 메아차는 또 다시 그의 적응 능력을 증명해주었으며, 필요하면 그는 처진 왼쪽 공격수로 뛰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1934년 FIFA 월드컵에서 메아차는 아주리의 주전으로 매경기마다 나왔다. 1934년 3월 25일 밀라노에서 이탈리아는 메아차가 2골을 넣으면서 그리스를 4-0으로 이겼다. 그리고 그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89분 마지막 골을 넣으면서 7-1로 월드컵 개막전에 골을 넣었다. 스페인 전에서는 추측하건데 메아차의 반칙으로 지오반니 페라리리카르도 자모라를 상대로 골을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하신토 키코세스의 머리 충돌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경기는 1-1로 끝났으며 메아차는 다음날 회복할 수 있었다. 43000명의 이탈리아 팬들이 11분에 라이문도 오르시가 올려준 코너킥을 메아차가 득점으로 연결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메아차는 자포자기한 골키퍼와 충돌하면서 또다시 험한 꼴을 당해야 했다. 이 골은 경기에서 나온 유일한 골이다. 전 경기에서 스키아비오와 충돌하여 부상당한 자모라를 대신한 후안 호세 누게스는 메아차가 반칙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장면은 그 이탈리아인이 어떤 나쁜 짓을 하여도 무죄가 되게 하였다. 메아차는 친선 경기에서 유일하게 자모라를 상대로 골을 넣은 선수이다.

준결승전은 후고 메이슬 감독 하에 SK 라피드 빈요제프 비칸FK 아우스트리아 빈마티아스 진델라 두 명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있는 원더팀 오스트리아와 만났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팀으로 여겨져있고 또한 네 달전에 토리노에서 이탈리아를 4-2로 이기기도 하였다. 몇 시간 전에 대홍수가 나 산 시로가 진흙땅으로 변해있었지만, 팀에서 그 누구보다 이 경기장을 잘 알고 있던 메아차는 경기장 상태를 가볍게 여기며 팀이 결승전 문턱에 다가서게 만들었다. 한 주의 네 번째 경기에서 오스트리아 공격수 밖에서 경기하며 드리블로 그를 지나갔다. 그리고 공격을 막기 위해 빠르게 날아오는 공을 잡으러 온 오스트리아 골키퍼 피터 플라처와 부딪혔다. 공은 흘러갔으며 포스트를 맞고 나와 엔리케 과이타에게 떨어지면서 이 경기의 유일한 골이 기록되었다.

55000명의 팬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결승전 경기를 보기 위해 스타디오 나치오날레 PNF에 모였다. 이탈리아는 메아차가 태클로 부상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는 꾀를 부렸다. 음모라는 외침이 54분, 준결승전에 부상으로 실려나갔던 메아차가 결승을 뛰면서 루돌프 카르칠의 거친 반칙 대한 앙갚음으로 간쪽을 때리면서 들리게 되었다. 그렇지만 준결승전의 주심이기도 했던 이반 이에클린드 주심은 이를 징계하지 않았다. 90분이 지난 후, 경기는 1-1로 끝이 났으며 비록 이탈리아는 연장전에 들어가면서 메아차가 다시 선수들을 고무시키기 전까지 문제를 멀리하였다. 그의 부상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더이상 그를 지겹게 막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혼합된 축복이었으며, 그는 그런 결정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96분에 에랄도 몬체글리오가 이탈리아 오른쪽 수비쪽에서 길게 날린 패스를 절룩거리는 메아차에게 보냈다. 윙에 홀로 남겨진 메아차는 무작정 나아가 경기에서 나왔다. 메이차 충분히 회복하여 과이타에게 깔끔한 패스를 날려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의 공격수를 압박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로마의 미드필더 과이타는 스키아피오에게 공을 밀어주었고 스키아피오는 당시 또 한 명의 위대한 골키퍼였던 프란티섹 플라니추카를 상대로 칩샷을 날리면서 연장 5분만에 이탈리아는 우승팀이 되었다. 메아차는 대회의 올스타 팀에 뽑혔고 FIFA에서 가장 우수한 경기력을 펼친 선수에게 주는 골든 볼을 수상하였다.

월드컵 이후에 메아차는 월드컵 우승 후 5달만에 '하이버리의 전쟁'으로 악명높은 잉글랜드와의 경기를 위해 소집되었다. 18개월 전에 두 팀은 로마에서 1-1로 비겼고, 이것이 그 전에 그들이 유일하게 만난 전적이다. 이 경기는 이탈리아 팀에게 몹시 안 좋게 시작하였다. 경기 시작 2분만에 몬티가 발 부상으로 실려나갔고 12분만에 잉글랜드는 에릭 브룩스가 2골, 테드 드레이크가 한 골을 넣었다. 이 때 당시에는 교체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이탈리아는 오직 10명만이 경기장에 있었다. 그들은 비록 졌지만 메아차는 폭우 속에서 58분과 62분 4분 간격으로 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영패에서 구제해주었다. 첫 결과는 과이타의 기술적인 움직임이 메아차를 자유롭게 흩어지게 하여 역습으로 멋진 로켓과 같은 슛팅으로 골키퍼를 상대로 득점을 올렸다. 두 번째는 아틸리오 페라리스의 프리킥을 헤딩하여 만들어냈다. 그는 단지 목재 골대와 마지막 국제 경기에 참가한 잉글랜드 골키퍼 프랭크 모스의 선방에 막혀 동점을 만들지 못 했을 뿐이다.

1934년 12월 9일, 헝가리를 상대로 메아차는 국제 경기 29경기 만에 25골을 기록하였다. 이는 그 전의 최고 기록이었던 아돌포 발론시에리의 것과 같은 기록이었다. 그리고 다음 경기였던 프랑스를 상대로 2골을 넣으면서 그는 이탈리아 국제 경기 최고 득점자가 되었다. 또한 1935년에 중부 유럽 국제 컵도 우승하게 된다.

프랑스에서 열린 1938년 FIFA 월드컵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주장으로 대회에 참가했으며, 전 대회와 마찬가지로 매 경기마다 출전했다.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은 큰 압력을 받고 있었다. 당시 지도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주사위가 던져졌음에도 메아차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이기던가 죽던가!"

후에 이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경기로 밝혀진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2-1로 이긴 후, 메아차는 감독인 비토리오 포초에게 팀원들이 하루를 쉴 수 있게 청원하였다. 그의 지혜로 포초는 대회 준비를 위한 매우 긴 의 훈련 후에 선수들이 긴장을 풀 필요성이 있음을 보게 되었으며 하룻밤은 쉬도록 허락하였다. 메아차는 그날 밤 두 명의 프랑스 여자와 놀았다고 말하였다.

또 그의 기억할만한 순간이 대회 준결승전 브라질을 상대로 펼쳐졌다. 대표팀의 새로운 공격수인 실비오 피올라도밍구스 다 구이아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냈다. 브라질의 골키퍼인 왈테르는 거만하게 슛팅을 막겠다고 말하여 그의 상대편에게 최면을 걸어 페널티 킥을 막아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메아차는 호들갑 떨지 않고 공을 차기 위해 천천히 앞으로 갔을 때 그의 바지는 허리 고무줄을 수비수가 당겨서 벗겨내어기 때문에 떨어졌다. 메아차는 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한 손으로 바지를 잡으면서 여전히 비웃고 있는 왈테르를 상대로 슛팅을 하였고 그것이 골이 되었다. 그를 축하하기 위한 팀동료들이 그의 새 바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 골이 이탈리아를 두 번 연속하여 결승전에 진출하게 하였다. 또한 이 골은 그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넣은 마지막 골이기도 하다.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는 깜짝 선물로 비슷한 스타일인 원더팀 오스트리아를 꺾고 올라온 헝가리와 붙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를 꺾었기 때문에 홈 팬들은 진심으로 마자르 헝가리 팀이 그들을 꺾고 봄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역동적인 처진 공격수들들, 메아차와 지오반니 페라리의 호흡이 경기를 잡게 했다. 메아차는 하프타임 전 실비오 피올라와 지노 콜라우시에게 골을 만들어줬다. 첫 어시스트는 다가오는 콜라우시와 재빠르게 교대하여 공을 주었고 그는 이를 성공시켜 1-0이 되었다. 다음 어시스트는 그가 슛팅 동작으로 속여 수비수를 그 앞에서 뛰게 한 후 드리블로 다른 수비수를 뚫은 후 피올라가 떨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패스를 해주었다. 하프 타임 10분 전에 메아차와 페라리는 또 다시 교대하여 클라우시의 공간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이를 비추는 패스를 하여 이 윙어가 그의 두 번째 골을 넣으면서 3-1로 끝을 냈다. 대회가 끝난 후, 프랑스를 상대로 5골을 넣었던 피올라는 그의 골에 대한 팀동료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렇게 말했다. "FIFA 월드컵 동안, 나는 주로 메아차와 페라리에 의지해서 살았다."

그는 9년간의 대표팀 생활의 마지막 경기로 헬싱키에서 열린 핀란드와 경기에서 주장으로 나왔고 여기서 이탈리아는 3-2로 이겼다.

그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53경기를 출전해 단지 6경기만을 졌고 33골을 넣었다.

수상

이탈리아 암브로시아나 인테르
이탈리아 AC 밀란
이탈리아
개인

일화

  • 메아차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감독을 한 사람이다. 그는 터키베식타슈 JK에서 1947-48 시즌을 감독했다.
  • 그는 유소년 코치로 있으면서 산드로 마촐라를 만났다. 아버지를 잃은 고통을 이해하면서 어렸을 때 그의 기술을 알아차렸고 메아차는 그를 그의 윙으로 기용했고 확신을 가지면서 계약을 하였다.
  • 메아차는 FIFA 홀 오브 챔피언스 인덕티와 이탈리안 홀 오브 페임 엔트란트에 들어가 있다. 그는 IFFHS/FIFA가 선정한 20세기의 2번째로 위대한 이탈리아 선수이자 25번째로 위대한 축구 선수로 뽑혔다.
  • 그가 대표팀에서 넣은 33골로 아직까지도 그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2번째로 많이 넣은 선수로 기록되어있다. 그는 루이지 리바1973년 6월 9일, 그 또한 브라질을 상대로 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어느 날, 메아차가 인용하며 말하길 "루이지 리바가 좋은 것은, 그는 키프로스터키를 상대로 많은 득점을 올렸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내가 넣은 득점들이 더 중요한 득점들이었다."

주석

  1. “Giuseppe Meazza 발음 - 이탈리아어”. Forvo. 2014년 3월 3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