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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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a1422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8월 19일 (수) 10:09 판
주조
周朝

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
서주의 영역
서주의 영역
수도호경
낙읍
정치
정치체제봉건 군주제
왕,천자,천왕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1043년
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20년
기원전 314년 ~ 기원전 256년

무왕
유왕
평왕
난왕
역사
 • 성립기원전 1046년(?)
 • 낙읍으로 천도기원전 771년
 • 멸망기원전 256년
인문
공용어고대 중국어
인구
기원전 273년 어림
기원전 230년 어림
30,000,000명
38,000,000명
종교
종교무속 신앙, 제자백가

(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나라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주나라의 청동기문화권이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의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의 양쯔강 유역에까지 미친 것이 확실해졌다. 봉건제도는 이러한 광대한 영역을 유효하게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발현되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의 개척을 진척하였으나,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어졌다. [1]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에 침략하여 유왕이 살해되었다. 때문에 평왕이 제후들에 의하여 옹립되었고, 곧 이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 시 부근)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으로 구분한다.[1]

봉건제도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2]무왕은 개국 초부터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등의 개국공신들을 이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봉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고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시간이 지나 이것이 제후의 영토가 제후국으로서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다시말하자면, 봉건제 하에서 제후국의 왕은 황제로부터 분봉받은 직할지를 다스리고, 분봉지를 동맹 세력이나 일족에게 세습하였다. 황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제후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씨족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1]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곧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자식들은 대종이고 왕의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후·대부·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황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그러한 틀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권위가 유명무실화 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역사

주나라 봉건제도 도식화. 주나라는 혈연관계에 기반을 둔 종법 원리로 통치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서쪽 (지금의 산시 성)에서 은나라와 상당 기간동안 공존했다. 주나라는 은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때때로 은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주나라의 왕실에서 은나라를 정복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전통적으로 두 국가들 사시의 대대적인 전쟁은 BC 1122년에 주나라가 시작하였다고 사가들은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전쟁은 BC 1111년경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은나라의 전영역에 대한 주의 통치권이 확립되기 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데 3년이나 걸리긴 했지만, 결국에 주나라가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주는 영역 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전지역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지에 봉건 제후국을 설치했다.

주의 수도는 본래 지금의 시안 부근의 웨이허 강(渭河)이 황허 강(黃河)과 합류하기 전의 지점에 있었다. 나아가 주나라는 동부지역으로 팽창한 제국과 제후국들을 지원하기 위해 황허 강 중류지역에 있는 뤄양에 동도(東都)를 세웠다. 그러나 약 200년 후 20여 명의 제후들이 지방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감에 따라 이러한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BC 8세기에 기본적으로 거대한 가족체제였던 주의 정치체제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여러 제후들이 주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유력한 제후들이 번갈아 패자(覇者)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BC 771년 이전의 주를 보통 서주(西周)라고 하며 BC 770년부터는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는 춘추시대(BC 770~476)와 전국시대(BC 475~221)로 나뉜다. 춘추시대때는 많은 작은 제후국들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작은 제후국들이 서로에게 병합되어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몇몇의 강대한 제후국들이 나머지 작은 제후국들을 병합하며 패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들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이 나머지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통일된 제국(BC 221~206)을 세웠다.

정치

주의 여러 제도에 대해 주공 단이 엮었다고 여겨지는 『주례』에 주나라의 관제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술이 있지만, 이 서적이 집필된 시대는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므로 이것만으로 주의 관제에 대해 논하려면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더불어 금문에 의하면 주에는 경사료(卿事寮)·대사료(大史寮)로 불리는 2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太保)·태사(太師)의 2개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 그 밑으로 사마(군사 담당)·사토(토지 관리 담당)·사공의 관직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관직이 있었다. 대사료의 장관을 태사(太史)라 부르고 역사의 편찬및 각종 의례와 제사 등을 관장하였다.

주나라의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왕 아래에 제후가 있고 그 아래에 대부(大夫)로 불리는 일종의 귀족층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 사(士)로 불리는 지식인 층이 있고 그 아래가 서민이었다. 그러나 대부와 사라는 계급은 금문에는 없다. 더불어 재산의 일종이었던 노예 계층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이들은 주로 주인을 대신해하여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다. 더 나아가 노예 계층 안에는 직공이라고 생각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청동기의 주조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토지 제도에 대해서 주나라는 정전제를 실행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와 사회

중화문명은 주나라 시대때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가 끄는 쟁기와 철기 그리고 석궁(石弓)과 기마술이 모두 주나라 시대때 도입되었다. 또한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와 수리시설의 설치도 이루어져서 화북 평야의 농업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었다. 나아가 도량형을 새로 건설되었고 교통체계도 크게 개선되었다. 때문에 상업이 발전되었고 인구와 도시가 늘어났으며, 화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덧붙여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명 또한 이때 출현하였으며, 은나라 시대때 원시적인 형태로 시작된 문자는 주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체계적인 문법을 갖추게 되었다. 덕분에 철학도 크게 번성하여 제자 오가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후대의 중국인들은 중국 문명의 기원과 발전을 알기 위해서 주나라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문화

서주의 청동기 (기원전 1000년 경

상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그 예술성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주나라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예술성에서는 간소화되어 은대에 비하면 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거의 모두가 제사를 위한 제기였으며, 따라서 실용적인 청동기는 그 수가 적다. 이러한 청동기는 거푸집을 이용하여 주조되었는데, 거푸집을 제작할때 당대의 여러 정보를 거푸집에 새겼다. 따라서 등대의 청동기에는에는 당대의 역사와 점의 결과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금문이라 불리는 것으로 후대 주나라를 연구하였던 사가들에게 있어서 이는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상대와 비교해서 주대는 문장의 길이가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상나라와 주나라는 여러 차이를 보였는데, 그 차이들 중 하나는 바로 조상에 대한 믿음의 차이였다. 상나라에서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외경심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하거나 조상의 명망에 흠집을 내면은 당장이라도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 상나라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반대로 주의 사람들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조상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종교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하는 대상이었다. 더불어 상대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지만 주대에는 그러한 일이 적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상이 남긴 금문의 수에 비하여 주가 남긴 금문의 수는 적어 현애에 이르러 주대 전기보다 오히려 상대의 자료가 많다.

거푸집을 제작할때 거푸집에 문장을 새겨 넣고 청동을 붓고 거푸집을 깨어 완성된 청동기에 문장이 돋아 보이게 하는 기술과 방식은 왕실이 독점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청동기는 때때로 제후에게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설 무렵의 혼란으로 인하여 이러한 기술이 제후에게도 전파되어 제후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건축 분야에 관련하여 주대에 들어서 모즙 기와가 일반화 되었다.

역대 군주

서주

서주 군주 열표
대수 시호 이름 재위기간
- 태공
(太公)
(주 무왕 추숭)
공조
(公祖)
-
- 태왕
(太王)
(주 무왕 추숭)
단보
(亶父)
-
- 왕계
(王季)
(주 무왕 추숭)
계력
(季歷)
-
- 문왕
(文王)
(주 무왕 추숭)

(昌)
-
제1대 무왕
(武王)

(發)
-
제2대 성왕
(成王)

(誦)
-
제3대 강왕
(康王)

(釗)
-
제4대 소왕
(昭王)

(瑕)
-
제5대 목왕
(穆王)

(滿)
-
제6대 공왕
(共王)
예호
(繄扈)
-
제7대 의왕
(懿王)

(囏)
-
제8대 효왕
(孝王)
벽방
(辟方)
-
제9대 이왕
(夷王)

(燮)
-
제10대 여왕
(厲王)

(胡)
-
공화
(共和)
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
제11대 선왕
(宣王)

(靜)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
제12대 유왕
(幽王)
궁생
(宮涅)
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비고:

주나라의 역대 군주들의 성은 희(姬), 씨는 주(周)이나 당시에는 성씨이름을 같이 표기하는 성명의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동주

동주 군주 열표
대수 시호 성명 재위기간
제13대 평왕
(平王)
의구
(宜臼)
기원전 771년 ~ 기원전 720년
비정통 휴왕
(攜王)
여신
(余臣)
기원전 771년 ~ 기원전 750년
제14대 환왕
(桓王)

(林)
기원전 720년 ~ 기원전 697년
제15대 장왕
(莊王)

(佗)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2년
제16대 희왕
(僖王)
호제
(胡齊)
기원전 682년 ~ 기원전 677년
제17대 혜왕
(惠王)

(閬)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52년
비정통 -
(穨)
기원전 675년 ~ 기원전 673년
제18대 양왕
(襄王)

(鄭)
기원전 652년 ~ 기원전 619년
비정통 -
(감소공(甘昭公))

(帶)
기원전 636년 ~ 기원전 635년
제19대 경왕
(頃王)
임신
(壬臣)
기원전 619년 ~ 기원전 613년
제20대 광왕
(匡王)

(班)
기원전 613년 ~ 기원전 607년
제21대 정왕
(定王)

(瑜)
기원전 607년 ~ 기원전 586년
제22대 간왕
(簡王)

(夷)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72년
제23대 영왕
(靈王)
설심
(泄心)
기원전 572년 ~ 기원전 545년
제24대 경왕
(景王)

(貴)
기원전 545년 ~ 기원전 520년
제25대 도왕
(悼王)

(猛)
기원전 520년
비정통 -
(서왕(西王))

(朝)
기원전 520년 ~ 기원전 516년
제26대 경왕
(敬王)

(丐)
기원전 520년 ~ 기원전 477년
제27대 원왕
(元王)

(仁)
기원전 477년 ~ 기원전 469년
제28대 정정왕
(貞定王)

(介)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41년
제29대 애왕
(哀王)
거질
(去疾)
기원전 441년
제30대 사왕
(思王)
숙습
(叔襲)
기원전 441년
제31대 고왕
(考王)

(嵬)
기원전 441년 ~ 기원전 426년
제32대 위열왕
(威烈王)

(午)
기원전 426년 ~ 기원전 402년
제33대 안왕
(安王)

(驕)
기원전 402년 ~ 기원전 376년
제34대 열왕
(烈王)

(喜)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69년
제35대 현왕
(顯王)

(扁)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21년
제36대 신정왕
(愼靚王)

(定)
기원전 321년 ~ 기원전 315년
제37대 난왕
(赧王)

(延)
기원전 315년 ~ 기원전 256년
비고:

주나라의 역대 군주들의 성은 희(姬), 씨는 주(周)이나 당시에는 성씨이름을 같이 표기하는 성명의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각주

  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주의 봉건제도〔槪說〕
  2. 왕과 제후사이의 봉건적 관계는 이미 상나라때부터 왕과 백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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