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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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paraorthodox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8월 24일 (토) 16:24 판
이름 조진(曹眞)
시대 후한 ~ 삼국 시대
생몰 ? ~ 태화 5년(231년)
자단(子丹)
본관 · 출신 예주 패국 초현
관직 대사마
작위 영수정후(靈壽亭侯)〔조조〕
→ 동향후(東鄕侯) 〔조비〕
→ 소릉후(邵陵侯) 〔조예〕
소속 조조조비조예

조진(曹眞, ? ~ 231년)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장수로, 자단(子丹)이다. 진군(陳羣), 사마의(司馬懿), 조휴(曹休)와 함께 조예 대의 고명대신으로, 대장군이 되어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군공이 모두 사마의에게 돌려진다.

생애

초기 경력

어려서 아버지가 조조(曹操)를 위해 죽어 고아가 되었으므로, 조조에게서 자신의 자식들과 같이 양육을 받고 아들 중 조비(曹丕)와 함께 했다. 자주 사냥을 다녔는데,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자 활을 쏘아 호랑이를 쓰러트린 일이 있었다. 사납고 용맹하여, 조조가 이를 장하게 여겨 호표기를 거느리게 했다.[1]

위나라의 중진

영구 땅의 반란을 진압하여 영수정후에 봉해졌다. 하변에서 유비(劉備)의 별장을 격파하여 중견장군에 임명되었다. 219년, 유비한중으로 쳐들어오고 조조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오자 이를 수행하여 중령군이 되었다. 마침 한중을 지키던 하후연(夏侯淵)이 유비의 장수 황충(黃忠)에게 죽었으므로, 정촉호군이 되어 서황(徐晃) 등을 지휘하여 고상(高翔)을 격파했다. 결국 조조가 한중을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무도로 가 무도에 있던 조홍 등을 물려 진창에 주둔하게 했다.[2][1]

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진서장군, 가절, 옹·양주도독제군사로 임명되었으며, 동향후로 봉해졌다. 주천에서 장진 등이 모반하자 비요(費曜)를 보내 격파하고 장진 등을 참수했다. 황초 3년(222년), 서울로 귀환해 상군대장군 · 도독중외제군사, 가절월에 임명되었다. 하후상(夏侯尙), 장합(張郃) 등과 함께 오나라의 강릉을 공격해 우저에서 승리했고, 주연(朱然)이 지키는 강릉성을 포위하여 성을 맹공격했다. 그러나 6달 동안 공격하고도 주연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제갈근(諸葛瑾)이 대군을 끌고 와 반장(潘璋) 등과 호응하여 진공하자, 이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퇴각했다. 중군대장군에 임명되었고, 급사중이 더해졌다.[1][3]

황초 7년(226년) 문제가 병이 들자 진군, 사마의 등과 함께 유조를 받아 문제의 뒤를 이은 명제(明帝)를 보정했다. 227년 명제가 즉위하자 소릉후로 올려 봉해지고, 12월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1]

제갈량의 북벌에 대항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명제는 조진에게는 제군을 지휘해 미에 주둔케 하고, 장합에게는 마속(馬謖)을 격파하게 했다. 조진은 기곡에서 조운(趙雲), 등지(鄧芝)를 격퇴했으나, 이는 기산으로 진출한 제갈량(諸葛亮)이 놓은 미끼였다.[4] 마속이 장합에게 격파당해 제갈량이 후퇴하자, 조진은 안정에서 모반하여 월지성을 점거한 양조를 쳐 항복을 받고, 촉에 붙은 안정, 남안, 천수 3군을 평정했다.[1]

1차 북벌을 막아낸 후 제갈량이 진창 쪽으로 나아올 것이라 여기고, 학소(郝昭)와 왕생(王生)을 파견하여 대비하게 했다. 과연 제갈량은 진창 쪽으로 나아왔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고 학소는 완강하게 버텨내었으며, 조진이 또 비요 등을 원군으로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후퇴했다.[1]

태화 4년(230년), 대사마로 승진했다. 이 해 황제에게 촉한을 칠 것을 권하여, 8월에 장안을 출발하여 자오도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큰 비가 30여일 내렸으므로 회군했다.[1]

조진은 일족인 조준(曹遵), 동향 사람 주찬(朱讚)과 함께 조조를 섬겼는데, 둘 다 일찍 죽었다. 조진은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식읍을 나누어 둘의 아들들에게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정벌할 때에는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하고 상이 부족하면 가산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졸들의 인망을 얻었다. 병이 들어 낙양으로 돌아오자 명제가 친히 찾아가 조진의 병세를 살폈다.[1]

이듬해(231년) 봄 3월, 중병에 빠져 죽었다. 시호를 내려 원후(元侯)라 했으며, 아들 조상(曺爽)이 후사를 이었다. 또 명제는 조서를 내려 조진의 다섯 아들 조희(曹羲), 조훈, 조칙, 조언, 조애를 모두 열후에 봉했다. 이전에 문제는 조서를 내려 조진의 아우 조빈을 열후에 봉했었다.[1]

외모에 얽힌 일화

어환의 《위략》에 따르면, 황초 5년(224년), 오질이 연회를 열어 즐기고 있었는데, 조진이 뚱뚱하고 중령군 주삭은 말랐으므로 오질이 광대로 뚱뚱하고 마른 것을 말하게 했다. 조진은 이를 보고 분노하였고, 조홍(曹洪)과 왕충(王忠)은 오히려 조진에게 살을 뺄 것을 권했다. 결국 조진과 오질은 서로 칼을 뽑아들고 막말을 하였고, 주삭은 둘을 말려보려 했으나 오질이 듣지 않자 화를 내어 땅을 베어버렸다. 이러니 연회는 결딴나고 말았다.

관력

  • 중견장군(中堅將軍) 〔조조〕
  • 중령군(中領軍) 〔조조〕
  • 정촉호군(征蜀護軍)〔조조〕
  • 진서장군(鎭西將軍) · 가절(假節) · 옹양주도독제군사(雍凉州都督諸軍事) 〔조비〕
  •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 가절월(加節鉞) ·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조비〕
  •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 급사중(給事中) 〔조비〕
  • 대장군(大將軍) 〔조예〕
  • 대사마(大司馬) 〔조예〕

삼국지연의의 묘사

사서에서와 비슷하게 제갈량의 북벌을 막는 데 힘썼다. 그러나 패장으로 많이 등장한다. 제1차 북벌에서는 패전하여 증발한 하후무를 대신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갔다가 크게 패하고 서강병도 끌어들려으나 서강병마저도 제갈량에게 크게 패하여 사마의가 조진을 대신하여 제갈량을 막아내게 된다. 그 뒤 진창성을 쌓고 학소를 시켜 지키게 하였으며, 228년 제갈량의 2차 북벌에 맞서 왕쌍(王雙)과 함께 참전했으나, 왕쌍은 촉의 장수 위연(魏延)에게 죽었다. 3차 북벌에서는 사마의, 유엽(劉曄)과 함께 촉을 쳤으나 장마로 인해 회군하였다. 사마의와의 기량 차이로 인해 번뇌하다 병이 든 상태에서, 제갈량의 도발성 편지를 받고 격분하였다가 가슴이 막혀 그대로 죽었다.

친척 관계

  • 조소 (아버지)
    • 조진
    • 조빈 (아우)

조진의 아버지

《삼국지》 위서의 조진 본전에서는 조진을 '조조의 족자(族子)'라고 하며, 그 아버지 '소(邵)'는 태조가 기병하였을 때 무리를 모았다가 주(州)·군(郡)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1]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략》, 《위서》에도 조진의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서로 약간 다르며 《위서》의 기술이 본전과 더 비슷하다. 《위략》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조진은 본성이 진(秦)이며, 조씨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혹은 이르되, 조진의 아버지 백남은 일찍이 태조(조조)와 친했는데, 흥평 말, 원술(袁術)의 무리와 태조가 서로 싸워, 태조가 출병했다가 적에게 쫓겨 진씨에게 들어가니, 백남이 문을 열고 받아들였다. 적이 태조가 있는 곳을 물으니, 백남은 자신이 조조라 대답하여 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태조는 그 공을 생각하여 그 성을 고쳤다.

[5]

《위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邵)는 충성하고 도타우며 재지가 있음으로써, 태조의 사랑과 믿음을 받았다. 초평 중, 태조가 의병을 일으키자, 소는 무리를 모아 태조를 좇아 떠돌았다. 당시 예주자사 황완이 태조를 죽이려 하였고, 태조는 이를 피하고 소만 해를 받았다.

[6]

주석

  1.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중 조진전
  2. 위와 같음, 권1 무제기
  3. 위와 같음, 권9 제하후조전 중 하후상전
  4. 위와 같음, 권36 관장마황조전 중 조운전
  5. 어환: 《위략》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중 조진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6. 왕침 등: 《위서》(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중 조진전의 배송지 주석에서 재인용)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