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ternal and life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2월 10일 (월) 16:47 판
영조
英祖
조선 국왕
재위 1724년-1776년
전임 경종
후임 정조
섭정 왕세자 이선 (1749년 9월 ~ 1762년 5월)
영의정 신만 (1762년 5월 ~ 1762년 6월)
왕세손 이산 (1775년 2월 ~ 1776년 3월)
재상
이름
이금 (李昑)
묘호 영종 (英宗) → 영조 (英祖)
시호 장순 정문선무희경현효 대왕 (莊順 正文宣武熙敬顯孝 大王)
존호 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순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純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
능호 원릉 (元陵)
신상정보
출생일 1694년 10월 31일(1694-10-31) (음력 9월 13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사망일 1776년 4월 22일(1776-04-22)(81세) (음력 3월 5일)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集慶堂)
왕조 조선 왕조
가문 전주 이씨
부친 숙종
모친 숙빈 최씨
배우자 정성왕후
정순왕후
종교 유교 성리학
묘소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음력 3월 5일))는 조선의 제21대 (재위, 1724년 10월 16일(음력 8월 30일)[1] ~ 1776년 4월 22일(음력 3월 5일)[2])이다.

이(李), 는 금(昑), 본관전주(全州), 는 광숙(光叔), 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며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3]

이후 고종 때 묘호를 높여 영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하여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정비는 서종제의 딸 정성왕후,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이다.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왕위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신임사화 등으로 숱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이후 노론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갈등을 빗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24년부터 1749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49년부터 1762년까지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고 1762년부터 1775년까지 다시 친정 체제를 펼쳤으며 1775년부터 1776년 승하할 때까지 손자 정조왕세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생애

즉위 전

출생과 생애 초반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
영조가 즉위하기 전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로, 21세때의 모습이다.

영조 이금은 1694년 10월 31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숙종과 화경숙빈 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礽君)에 책봉되었다.

유년시절 사저에서 지내다 입궁하였으며, 1704년(숙종 30년), 사릉참봉 서종제의 딸 달성군부인 서씨와 가례를 올린 뒤 다시 출궁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소실을 맞이하였는데, 1718년 4월 숙빈 최씨가 죽고 상중이었던 1719년 4월 서자 경의군 행을 보았다. 영조의 첫 아들이자 숙종 생전에 태어난 첫 손자이기도 했다.

잠재적 왕위계승권자

훗날 경종이 되는 숙종의 왕세자 윤(昀)은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쟁의 대격분(大激憤)으로 사약(死藥)을 마신 것으로 인해서 심각한 결격사유가 생긴다. 거기에 왕세자 윤은 세자시절은 물론 젊은 나이에 죽을 때까지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 숙종은 왕세자 윤의 후사(後嗣)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 이를 정유독대라 불렸다. 당시 숙종이 이이명을 불러 독대한 상황을 두고 소론이 왕세자의 대를 연잉군에게 결코 넘길 수 없다며 반발하여 상소를 올려 이이명은 물론 숙종까지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은 연잉군에 동조적이라 연잉군을 어떻게 든 비호하려 해 살얼음 같던 소론노론의 당쟁이 이 독대로 격화되어 전장을 방불케 했다.

경종 원년(1720년)에 왕세자가 즉위 하자 훗날 영조가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이때를 말할만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홍수 터지듯 밀려왔으며 경종은 큰 방향 만을 보일 뿐 당쟁은 지켜 만 보았다. 왕세제의 제 자만 튀어나와도 소론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국에서 노론 김창집(金昌集) 등이 결사적으로 왕세제 책봉을 상소했으나 소론 유봉휘(柳鳳輝) 등이 격렬히 논박 하였다.

그는 노론에게 마음이 기울기는 하였지만, 매사를 균형 있게 처리하려 하였다. 소론 중에도 강경파인 준론은 연잉군을 반대하였지만 완소는 그래도 경종이 인정한 정통 계승자로 인정했다. 즉위 한 뒤에도 소론 내 온건파 상당수가 자신을 지지했음을 잊지 않고 소론 숙청을 주장하는 노론내 강경파에 대해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의심이 많았고, 한번 미워한 사람은 끝까지 용서, 용납하지 않거나 멀리하였다.

왕세제 시절

소론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경종에게 자식이 없고 경종에게 가장 가까운 혈족이라고는 연잉군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론은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미루고 그 책봉의 문제점을 부각 시킬 수 있을 뿐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4]

이후 노론측에서 세제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소론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했고, 경종은 입장 표명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면서 사태가 달라진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 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자신을 지지하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 대신과 50 여명의 고관들이 사형 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등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경종은 병약했고, 선의왕후는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다른 종친의 아들 중에 양자를 입양하여 후사를 삼으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종의 두둔으로 그는 세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경종은 그를 각별히 챙겨 그가 글을 읽을 때 비밀리에 와서 보고 가곤 했다 한다. 살아남은 노론세력은 세를 키워나갔고, 그는 다시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일부 소론 완소 역시 연잉군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1724년 음력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갑작스럽게 승하 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붕어 하기 얼마 전 게장, , 등을 수라로 든 일이 있어, 영조 즉위 초 경종 독살 설이 유포된다.

즉위 후

탕평책

즉위 직후부터 그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경종 독살설,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루머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유포되었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노론의 독주를 염려한데다가, 소론 일부가 자신을 끝까지 지지한 것을 잊지 않은 그는 소론의 일부를 중용한다. 1724년 김일경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된다.[5] 만인의 임금이 되고 싶었던 그는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처형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다가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이후 양 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그러나 임금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인 1728년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 내려 하였다. 이인좌, 이유익 등은 소론 내 강경파인 준소파 및 1701년(숙종 37년) 이후 실각한 남인 내의 강경파를 포섭했다. 1701년 이후로 등용되지 못했던 남인 내의 불만은 강했고, 근기 남인이 주로 호응하였다.

이인좌의 난 전후

1728년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북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거병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다. 이는 무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신란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으며,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군을 투입해 난을 진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안동예천, 영천지역 유생들과 대구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난군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반란 진압 후 남인들의 협조설까지 확산되면서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과거를 정거하고 금고령을 내린 뒤,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웠다. 이후 과거와 출사를 금지당한 영남의 남인계 유생들은 정조 때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영남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적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된다. 난이 진압된 뒤에도 그는 탕평책을 유지하게 되지만 노론 편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사도세자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남 남인 중에는 이인좌의 난에 일부 호응하였지만 안동, 예천지역, 대구지역의 유생들은 이인좌 측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충청도 출신인 이인좌를 영남 도적이라 한 것이 원통하다며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남인도 상당수 가담했음을 이유로 이를 묵살하여 정조 때부터 영남의 남인들은 만인소를 올리게 된다.

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외모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6] 18세기 조선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남인 강경파 중에는 영조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그 근거라는 설이 돌기도 했다.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7]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 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7]

인권과 경제정책

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그는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기민(飢民)의즉,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다. 또 일본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 자신도 소식(小食), 물자절약등으로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8]

또한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여 이듬해 수어청의 제작을 명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썼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耆老科 : 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다.

학문진흥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어제여사서(御製女四書)》·《육전(六典)》·《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동국문헌비고》·《숙묘보감(肅廟寶鑑)》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 및 《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탕평책과 외척 견제

영조는 노론이 자신을 추대한 것을 잊지 않고, 목호룡 사건 관련자들, 노론 4대신의 사면 복권과 그 후손, 관련자들을 등용한다. 1748년 이인좌의 난에 연좌되었던 소론 강경파, 남인 강경파는 다시 영조를 자극하는 괘서를 붙였다. 그리고 과거 시험장에서 영조를 가짜 군주라고 조롱하는 답안지가 발견되어 1748년, 1755년 소론 강경파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과 유배형을 내린다.

아들 사도세자
(작자 미상의 무속화, 19세기 작)

선의왕후가 죽고 그의 거처에서 성장한 차남 사도세자소론에게 호의를 보이자, 노론은 이를 경계했고 노론 강경파는 이를 영조에게 고해바쳤다. 또한 외척세력 역시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 일거수일투족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노론 외척 중에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 일가들도 있었고, 혜경궁은 남편 사도세자의 실수와 비행을 자신의 친정에 알렸다.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는 성품이었고, 좋고 싫은 것이 명확해서 싫어하는 것은 끝까지 싫어하거나 배척했다. 세자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과, 세자에게 정신질환과 의대증 등이 있다는 점, 노론 및 외척에 의해 보고되는 사안 등 다양한 이유로 세자를 경계하게 되었다. 세자 대리청정 시 소론을 전부 축출하라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에 사도세자는 소론이 전부 역적이 아니라며 거절 의사를 표시했는데, 이때 소론을 보호하려 한 것에 대해 소론 일각에서는 세자에게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

노론을 중용했지만 탕평책을 써서 소론 대신, 관료들을 적극 등용했다. 한편으로 노론 강경파와 외척을 견제하려 했고, 노론 내에서도 벽파시파에 속하지 않고, 성리학의 원칙과 현실 적용, 외척이나 즉위 공로자들과 거리를 둔 청명당파를 중용했다. 노론청명당파노론 강경파나 노론 탕평파, 외척 세력과는 다른 이유, 다른 목적으로 노론이 진정한 군자의 정당이라는 확신 아래 소론남인을 추방, 배척할 것을 적극 상소했다. 동시에 외척 세력을 공격하고, 노론 강경파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는 노론 탕평파 역시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공격을 가했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거부하는 청명당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원칙론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을 중용한다.

세자 대리청정과 갈등

대리청정 시절 내린 영서(교지)

1750년(영조 26년) 혜경궁 홍씨경복궁에서 의소세손 이정을 출산하자 영조는 의소세손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얼마 뒤 원손에 임명하고, 바로 세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세손은 1752년 4월 갑작스러운 병으로 통명전에서 사망했다. 1751년 11월에는 장자 효장세자 사후 홀로 있던 효순현빈도 사망하였다. 싹싹했던 맏며느리가 일찍 과부가 된 것을 영조는 안타까워했는데 이 둘의 연이은 죽음으로 영조는 한동안 상심하였다.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손자 이산이 태어났다. 같은 해 영조는 일 수 없는 이유로 병석에 눕게 되고, 사도세자에게 시험삼아 명을 내려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거절하였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다.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세자가 소론에 우호적이라는 점, 선의왕후전 궁인들에게 경종 독살설 등을 접하고 노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노론은 주목했다.

노론의 모함과 외척의 수시 보고 외에도 세자는 의대병과 정신질환 등을 앓고 있었고, 옷입는 문제로 궁녀들을 죽였으며 귀인 박씨 빙애를 살해하기도 했다. 정성왕후 사후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와 그의 친정 역시 사도세자와 갈등하였다.

임오화변

1762년 음력 4월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보고하지 않고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로 평안도를 다녀온다. 의문의 관서행 당시 만나고 온 인물은 소론 재상이며 조문명의 아들, 조현명의 조카인 조재호였다. 그리고 동궁 지하에 알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 것이 어느 궁인이 발견하기도 했다. 그해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이런 사실들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한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세자가 평안도를 다녀왔을 무렵, 동궁에 세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영조는 동궁을 행차하려 했다가 주저했다. 그사이 사도세자는 말을 달려 수일 만에 다시 한성에 등장한다.

1762년 음력 윤 5월 13일 영조 38년 생모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여 세손을 보호하라며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등 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당시 세자를 폐하며 영조가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는 생모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고변한 내용이 나온다.

1762년 7월 4일(윤 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불러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쌀 담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그 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인 7월 12일(윤5월 21일) 아사한 사도 세자의 부음(죽음)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류의 실패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도세자경종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와 후궁 숙의 문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된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숙의 문씨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후일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가 생존했을 당시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했다. 이는 보위를 이을 세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세손까지 점지한 것으로 세종이 병약한 문종이 세자였을 때 단종을 세손으로 삼은 것과 더불어 무척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주로 왕위세습구도가 불분명할 때 세손책봉을 하며 이미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오랫동안 마음을 굳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이유로 노론을 견제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역시 허무맹랑하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허락한 것은 승하하기 고작 석달 전으로 정치적인 학습과 대리청정은 무관해 보인다. 영조는 늙어서 분별력을 잃을지언정 권력을 놓지 않았다.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 및 살인행각을 담은 기록을 삭제할 것으로 요구했고 영조 승하 직전 승정원일기가 세초되었다.

왕세손 대리청정과 최후

그의 사후 노론에서 사도세자사건을 언급하며 죄인의 아들이라고 할 것을 예상하여 세손을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하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은 승통세자빈으로 봉한다. 또한 정조에게도 즉위 후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리청정을 결심한다. 1774년(영조 50년) 그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때 홍인한노론의 지도부가 승정원승지사관(史官)들을 가로막고 붓을 빼앗으면서까지 방해하였으나 그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다.

영조의 국상당시 상복을 입은 조선의 사대부

한편 은언군은신군 등이 시장에서 송사에 휘말린 뒤 홍봉한이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자 은언군은신군제주도로 유배보내게 된다. 은신군은 곧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고 은언군세손이 즉위한 뒤에 석방된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76년 3월 5일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후 3달 뒤 83세의 나이로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승하하여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 (51년 7개월) 밎 최장수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공식적인 승하 원인은 치매로 밝혀졌다.

시호

대리청정과 병권을 장악했고, 세손궁료들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세손은 보위를 계승하여 22대 왕 정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였으나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한편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감소하게 되면서, 영조의 국상 당시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다.

재궁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의 동구릉원릉에 안장되었다.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그의 증조부인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라서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된다.

원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으로 시호와 존호를 합쳐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었다. 그러나 고종 때 묘호가 영종에서 영조(英祖)로 바뀌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묘호 영조 의 의미는 제주와 공,덕이 많다는 의미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순(莊順)이다.

왕릉

영조의 원릉.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은 1776년 7월 27일 조성되었으며,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능묘의 위치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으며,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는 1757년, 66살의 나이로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숙종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다.




가계

 조선 제21대 국왕  출생

1694년 10월 31일(음력 9월 13일)
조선 조선 한성부 창덕궁 보경당


사망 1776년 4월 22일(음력 3월 5일) (81세)
조선 조선 한성부 경희궁 집경당
영조 英祖

부모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숙종대왕 肅宗大王 전주 1661년 - 1720년 현종대왕 顯宗大王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제19대 국왕
법모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여흥 1667년 - 1701년 여양부원군 민유중 驪陽府院君 閔維重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 恩城府夫人 恩津 宋氏
1689년(숙종 15년) 폐위
1694년(숙종 21년) 복위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혜순대왕대비 惠順大王大妃
혜순왕대비 惠順王大妃
경주 1687년 - 1757년 경은부원군 김주신 慶恩府院君 金柱臣
가림부부인 임천 조씨 嘉林府夫人 林川 趙氏
숙빈 최씨 淑嬪 崔氏
 화경숙빈 和敬淑嬪
해주 1670년 - 1718년 최효원 崔孝元
남양 홍씨 南陽 洪氏


왕비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정성왕후 서씨 貞聖王后 徐氏 달성 1692년 - 1757년 달성부원군 서종제 達城府院君 徐宗悌
잠성부부인 우봉 이씨 岑城府夫人 牛峰 李氏
계비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예순대왕대비 睿順大王大妃
예순왕대비 睿順王大妃
경주 1745년 - 1805년 오흥부원군 김한구 鰲興府院君 金漢耉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 原豊府夫人 原州 元氏

후궁

작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빈 이씨 靖嬪 李氏
온희정빈 溫僖靖嬪
함양 1694년 - 1721년 이후철 李後哲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영빈 이씨 暎嬪 李氏
소유영빈 昭裕暎嬪
전의 1696년 - 1764년 이유번 李楡蕃
한양 김씨 漢陽 金氏
제22대 국왕 정조의 할머니
귀인 귀인 조씨 貴人 趙氏 풍양 1707년 - 1780년 조태징 趙台徵
밀양 박씨 密陽 朴氏
숙의 숙의 문씨 廢淑儀 文氏 미상   ?   - 1776년 미상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 후 사사됨[9][10]
상궁 상궁 이씨 尙宮 李氏[11] 생몰년 미상

왕자

묘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효장세자 孝章世子
진종 소황제 眞宗 昭皇帝
경의군 敬義君
행 緈 1719년 - 1728년  정빈 이씨  효순현빈 조씨 孝純賢嬪 趙氏
   효순소황후 孝純昭皇后
조선의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2 사도세자 思悼世子
장조 의황제 莊祖 懿皇帝
선 煊 1735년 - 1762년  영빈 이씨   혜경궁 홍씨 惠慶宮 洪氏
   헌경의황후 獻敬懿皇后

왕녀

작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화억옹주 和憶翁主   향염 香艶[12] 1717년 - 1718년  정빈 이씨  영조 49년(1773년) 화억옹주로 추증[13]
2 화순옹주 和順翁主 향이 香怡 1720년 - 1758년 월성위 月城尉 김한신 金漢藎
3 화평옹주 和平翁主 1727년 - 1748년  영빈 이씨 금성위 錦城尉 박명원 朴明源
4 옹주[14]  1728년 - 1731년[15] 이옹주(二翁主)로 기록
5 옹주[16]  1729년 - 1731년[17] 삼옹주(三翁主)로 기록
6 옹주[18]  1732년 - 1736년[19] 사옹주(四翁主)로 기록
7 화협옹주 和協翁主 1733년 - 1752년 영성위 永城尉 신광수 申光綏
8 옹주[20] 1735년 - 1736년  귀인 조씨
9 화완옹주
廢和緩翁主
용완 蓉婉 1738년 - 1808년  영빈 이씨 일성위 日城尉 정치달 鄭致達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
10 화유옹주 和柔翁主 1740년 - 1777년  귀인 조씨 창성위 昌城尉 황인점 黃仁點
11 화령옹주 和寧翁主 1752년 - 1821년  숙의 문씨 청성위 靑城尉 심능건 沈能建
12 화길옹주 和吉翁主 1754년 - 1772년 능성위 綾城尉 구민화 具敏和


영조가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

뮤지컬

소설

  • 《대왕의 길》 강신재, 행림출판사, 1998, ISBN 89-7292-464-4
  • 《이산 정조대왕》 류은경, 디오네, 2007, ISBN 978-89-92449-18-2
  • 《이산과 음모》 여설하, 생각하는책, 2007, ISBN 978-89-956580-4-8
  • 《목숨》 김상렬, 나남, 2008, ISBN 978-89-300-0584-5
  • 《충신》 마르크 함싱크, 이수영 역, 문이당, 2009, ISBN 978-89-7456-427-8
  • 《사도세자》 김경민, 테라스북, 2012, ISBN 978-89-94300-12-2

영화

방송

  • EBS 이야기 한국사 13,14강 뚝심의 탕평 영조 이금(1),(2)

관련 문화재

각주

  1. 《英祖實錄》《영조실록》 1권
  2. 《英祖實錄》《영조실록》 127권
  3. 《英宗大王實錄》 [영조대왕실록]. 127권 영조 대왕 빈전 친제문. 1781년 7월. 
  4. 경종기록
  5. 그러나 소론 완소의 온건파인 이광좌, 이태좌는 영조를 정통으로 간주하였다.
  6. <동이>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 프레시안 2010.05.05
  7. 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 미디어스 2010.06.09
  8. 《엽기 조선왕조실록》(이성주 지음,추수밭)에 의하면 영조는 상당히 검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찬의 수를 적게 차리게 하고,식사의 수도 줄였다. 의복도 항상 이전 임금들은 한 번만 입었지만, 영조는 세탁을 하도록 하여 오래 입었다.
  9. 정조실록》1권, 정조 즉위년(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숙의 문씨의 작호를 삭탈하고, 문성국을 노적시키며, 어미는 제주의 비로 삼다
  10. 정조실록》 2권, 정조 즉위년(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8월 10일 기유 1번째기사
    대신과 삼사가 번갈아 차자를 올려 아뢰니 문녀에게 사약을 내리다
  11. 승정원일기》 1735책 (탈초본 92책) 정조 18년(1794년 청나라 건륭(乾隆) 59년) 9월 13일
  12. <유녀향염 광지(幼女香艶 壙誌)>
  13. 화억옹주 추증교서
  14. 태봉등록(胎峯謄錄)》
    戊申八月十五日 ····· 今戊申年八月初三日申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
    무신년(1728년) 8월 15일, 8월 초삼일 신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15. 승정원일기》 718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년 청 옹정(雍正) 9년) 2월 18일 신해 10/10 기사
    이옹주(二翁主)가 졸서하였으니 통화문을 나간 뒤 하약하고 서소문도 나간 뒤에 닫도록 병조에 분부하라는 전교
  16. 태봉등록(胎峯謄錄)》
    庚戌正月初八日 ······ 己酉年十二月十二日酉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경술년(1730년) 정월 초파일에, 기유년(1729년) 12월 12일 유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17. 승정원일기》 719책 (탈초본 39책) 영조 7년(1731년 청 옹정(雍正) 9년 3월 21일 갑신 2/15 기사
    삼옹주(三翁主) 졸서후 승정원 등에서 대전 등에게 안부를 물음
  18. 태봉등록(胎峯謄錄)》
    壬子二月十三日 ······ 今壬子正月初一日寅時生翁主阿只氏藏胎 ··· ···
    임자년(1732년) 2월 13일, 정월 초하루 인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19. 영조실록》 41권, 영조 12년(1736년 청 건륭(乾隆) 1년) 4월 12일 병자 1번째기사
    넷째 옹주가 홍역을 앓다가 죽다
  20. 태봉등록(胎峯謄錄)》
    乙卯十月二十一日 ······ 今乙卯年九月十九日丑時生翁主阿只氏藏胎事 ···
    을묘년(1735년) 10월 21일에 9월 9일 축시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를 묻다
  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407749

같이 보기

참고 자료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제도의 변화"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1998)

외부 링크

전임
경종
조선대리청정
1722년 ~ 1724년
후임
사도세자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제도의 변화"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