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고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Lee Soon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7월 23일 (월) 19:18 판
조비
이름
시호 미상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고려
사망일 미상
국적 고려
왕조 고려 왕조
부친 조인규
배우자 충선왕
자녀 없음
능묘 미상

조비(趙妃,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제26대 충선왕의 제5비이다. 충선왕비 조씨(忠宣王妃 趙氏)라고도 한다[1].

생애

가계

본관평양이다. 상원군(현재의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첨의중찬을 지낸 평양군 조인규(趙仁規)이다. 조인규는 금오위별장을 지낸 조영(趙瑩)의 아들로, 원래는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2]. 그러나 조인규가 몽고어 역관을 지내면서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나 다름 없던 고려에서 크게 성장한 집안이다[3].

왕비 책봉

1292년(충렬왕 18년) 음력 6월 당시 세자로 있던 충선왕에게 시집을 와 세자비에 책봉되었다[4]. 즉 충선왕의 정비이자 훗날 대립 관계로 발전하는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또는 한국공주[5])보다는 4년 먼저 충선왕과 혼인한 것이다. 따라서 조비는 정비 왕씨(靜妃 王氏)에 이어 충선왕의 제2비였으나, 몽골 출신인 계국대장공주와 의비(懿妃)에 밀려 제4비로 기록되었다.

계국대장공주와의 대립

조비는 평소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는 조비보다 4년 후에 고려로 시집 온 계국대장공주(이하 공주)의 엄청난 질투를 샀다. 이에 공주는 1298년(충선왕 즉위년) 당시 원나라에서 사용하던 문자외오아 문자(畏吾兒文字)[6]를 사용하여 원나라 태후에게 편지를 썼는데, 당시 편지에 "조비가 저를 저주하여, 왕이 저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라고 썼다. 이를 자신의 시종인 활활대(闊闊歹)와 활활불화(闊闊不花)를 시켜 원나라로 전하게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충선왕이 박선(朴瑄, 조인규의 사위)[7]을 시켜 두 사람에게 편지의 내용을 물었으나, 두 사람은 편지의 내용을 말하기는 커녕 도리어 박선을 구타하기만 하였다. 이에 겁에 질린 충선왕은 부왕 충렬왕에게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충렬왕은 공주의 처소로 가서 공주와 활활불화, 활활대, 장길철리(章吉徹里) 등을 위로하고 노비, 여자 등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8]. 하지만 공주는 끝끝내 두 사람을 원나라로 보내어 기어이 원나라 태후에게 이 일이 들어가게 하였다.

얼마 후 궁궐 문에 익명서 한장이 붙었는데, 익명서에는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서 저주를 하여, 왕이 공주는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익명서는 당시 사재주부로 있던 윤언주가 붙인 것이었다. 어쨌든 이 익명서로 인해 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 조인규의 아들, 조인규의 사위인 와 딸들까지 모조리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시켜 원나라에 이 사실을 고하게 하였다. 당시 충선왕, 김방경(金方慶) 등은 이를 못 가게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9].

이후 활활불화 등이 원나라 태후의 사신과 함께 고려로 들어왔는데, 황제의 명이라며 조비와 최충소(崔冲紹)[10], 장군 유온(柳溫) 등을 모두 가두어버렸다. 이후 따로 들어온 원나라의 사신은 조인규와 그 처를 국문하였는데, 조인규의 처는 매우 참혹한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허위 자백을 하고 말았다[11]. 결국 조비와 환관 이온(李溫)을 비롯하여 조인규와 그 처, 아들들도 모두 원나라에 압송되었다[12]. 또 원나라 태후는 홍군상(洪君祥)을 시켜 충선왕과 공주를 동침하게 하였다. [11]. 그녀의 아버지 조인규1305년(충렬왕 31년) 방면되었다[2].

이 일이 있은 후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폐위되고, 태상왕으로 있던 충렬왕이 복위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을 기점으로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 및 두 왕 주변의 세력들은 정적이 되어 약 10여 년간의 정쟁으로 비화된다. 훗날 조비 일가는 복권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 후기의 대표적 재상 가문으로 발전하였다[3].

사망과 후손

조비가 원나라로 끌려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또 생몰년이나 사망지, 능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시호도 전하는 것이 없고, 단지 그녀의 성인 조(趙)에 비(妃)를 붙여 조비(趙妃), 또는 충선왕비 조씨(忠宣王妃 趙氏)라고만 한다. 남편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조서(趙瑞), 조련(趙璉), 조후(趙珝), 조위(趙瑋) 등은 그녀와 남매이다. 이중 조련은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는 조준(趙浚)의 할아버지이다[13].

가족 관계

같이 보기

외부 연결

출처 및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충선왕비조씨〉항목
  2.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인규〉항목
  3.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조비〉항목
  4. 《고려사》권30〈세가〉권30
  5. 韓國公主, 《고려사》권89〈열전〉권2 참고
  6. 외오아는 옛 회골을 말한다. 당시 원나라에는 따로 문자가 없어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으나, 편지 등에서는 외오아 문자를 많이 이용하였다. 《동사강목》제12-하 참고
  7. 후에 박경량(朴景亮)으로 개명하였다. 《동사강목》제13-상 참고
  8. 《고려사절요》권22
  9. 《동사강목》제12-하
  10. 최충소도 조인규의 사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최충소〉항목 참고
  11. 《고려사》권89〈열전〉권2
  12.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조서〉항목
  13.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조련〉항목
  14.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조위〉항목
  15.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박의〉항목
  16. 《동사강목》제13-상
  17.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박경량〉항목
  1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최충소〉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