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징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777sms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8월 22일 (토) 00:27 판
장징궈
蔣經國

Jiǎng Jīngguó
장징궈
장징궈
중화민국제6·7(임기중 사망)대 총통
임기 1978년 5월 20일~1988년 1월 13일
전임: 옌자간(제5대)
후임: 리덩후이(제7(직무승계))·8·9대)

신상정보
출생일 1910년 3월 18일(1910-03-18)
출생지 청나라 저장 성 닝보 부 펑화 현
사망일 1988년 1월 13일(1988-01-13)(77세)
사망지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
학력 중화민국 국방참모학교 졸업
정당 중국 국민당
배우자 펑푸넝(馮彿能, 1번째 부인, 기간: 1927년~1927년)
장팡량(蔣方良, 2번째 부인, 기간: 1935년~1988년)
장야뤄(章亞若, 내연녀, 기간: 1940년~1942년)
종교 불교감리교
별명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엘리자로프(Nikolai Vladimirovich Elizarov)
장징궈
蔣經國
1935년, 장징궈(오른쪽)와 장팡량(왼쪽)
1935년, 장징궈(오른쪽)와 장팡량(왼쪽)
출생지 청나라 저장 성 닝보 부 펑화 현
사망지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
복무 소련 육군, 중화민국 육군
복무기간 1930년 ~ 1948년
최종계급 중화민국 육군 소장
주요 참전 중일 전쟁

장징궈(장경국, 중국어 간체자: 蒋经国, 정체자: 蔣經國, 병음: Jiǎng Jīngguó, 1910년 3월 18일 ~ 1988년 1월 13일)은 중국 국민당의 정치지도자이자, 중화민국군인, 정치인이다. 자(字)는 젠펑(建豊, 건풍)이며 소련 러시아식 이름은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엘리자로프(Nikolai Vladimirovich Elizarov)이다. 장제스(蔣介石)의 맏아들로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쳤고, 1972년부터 1978년까지는 중화민국 수상인 중화민국 행정원 원장을 지냈고 그 사이 1976년부터 1977년까지는 중화민국의 총통 권한대행을 1년간 지냈으며, 197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중화민국의 총통을 지냈다.

생애

장징궈는 장제스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마오푸메이(毛福梅)의 아들로 저장 성(浙江省) 펑화 현(奉化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제스는 그를 엄격하게 공부시켰으며 아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출처 필요] 192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자 했는데,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칼 라데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열정적으로 공부했으며 어느 정도 트로츠키주의로 기울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따로 그를 불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라고 요청하고 그가 수락하자 그때 소련 공산당에 가입이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장징궈는 이를 부인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사건으로 공산당을 학살하자 장징궈는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에 남을 것을 선언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톨마체프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우랄 산맥의 철강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5년 벨라루스러시아 여자인 장팡량(蔣方良)과 결혼했다.

장징궈는 1936년에도 아버지의 정책을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나 소련에 체류한 것 등이 모두 강요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출처 필요] 1937년, 중국에서 장제스가 공산당과 새로운 연합전선을 구축하자 스탈린은 장징궈가 소련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장징궈는 국민당 정권에 소속되어 일을 맡았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인기를 만회하고자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를 엄단했고 화폐 개혁을 하는 등 꺼져가는 국민당의 불꽃을 살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싶었으나, 나중에 그의 계모인 쑹메이링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장제스는 장징궈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 후로 그와 쑹과는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49년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 중화민국타이완으로 후퇴한 뒤, 장징궈는 타이완에 자리잡은 중화민국 정부의 군대와 안보기관의 책임자로 국민당을 지휘했고, 1965년에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1972년, 행정원장(총리)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 장제스가 병석에 누운 뒤부터 장징궈는 사실상 중화민국의 통치자로서 활동했다.

1978년, 중화민국 6대 총통으로 취임하여 1988년, 7대 총통 임기 중간에 서거하였다.

그는 정부의 부정 부패를 척결하고 정실(情實) 인사를 배격했으며 본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입법원과 행정원에 본성인(本省人: 말기 본토에서 건너간 한족) 출신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하여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1970년대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장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중화민국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그는 중화민국의 정치적 안정과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애썼다.

1987년 7월 15일에는 국부천대 이후 38년 간 선포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여 현실적인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88년 1월 13일, 그는 7대 총통 임기 중에 지병인 심장질환과 폐출혈로 인해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기타

장징궈는 장팡량(蔣方良)과 혼인 관계 중 내연녀 장야뤄(章亞若)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샤오옌(蔣孝嚴)과 장샤오쯔(章孝慈)를 얻었다. 이 중 장샤오옌은 자신이 장징궈의 아들임을 주장했으나 장징궈의 부인 장팡량의 반대로 호적에 오르지 못했다. 장샤오옌은 2007년 3월 31일에 장징궈의 아들로 본성을 회복하였다.

학력

가계

같이 보기

제6,7대 중화민국 총통
전임
옌자간
1978년 5월 20일 ~ 1988년 1월 13일 후 임
리덩후이
장제스 · 옌자간 · 장징궈 · 리덩후이 · 천수이볜 · 마잉주 · 차이잉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