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말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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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 말소사건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 선수의 사진
장소일제강점기 한국
날짜1936년 8월
원인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
결과한국의 민족 정신을 고취

일장기 말소 사건(日章旗抹消事件)은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조간 2면 및 조선중앙일보의 4면, 다시 동아일보의 8월 25일자 2면에 1936년 베를린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우승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이다.

개요[편집]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좌) 4면 기사와 동아일보(우)의 지방판 조간 2면 기사

동아일보8월 25일 손기정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실었다. 이후 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8월 29일자부터 무기 정간 처분을 당하면서 1920년 4월 창간된 이래로 네 번째로 무기 정간이었다. 8월 13일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던 조선중앙일보[1]에서는 9월 4일에 자진하여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에 들어갔지만 신문사의 내부 분열로 결국 신문을 폐간하였다.

한편,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 성향 단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은 조선중앙일보가 원조이며, 동아일보는 이와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2][3] 그러나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원조설은 논파되었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 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4]

조선중앙일보조선총독부의 친일파 사장 제안을 거절하여 폐간을 선택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선총독부 극비 문서,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에서는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화 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 1936년 119~120쪽

소화 11년(1936년) 9월 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이길용 기자가 작성한 회고가 발굴이 되기도 했는데, 회고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伯林,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이길용 기자[5]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 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등이 사임하였다. 그리고 사회부의 현진건 부장과 이길용, 장용서,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 사진부의 신낙균, 백운선, 서영호 그리고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월간 신동아에 전재한 책임으로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의 사원이 구속되어 40여 일의 고초를 겪은 끝에 ①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하지 않을 것 ② 시말서를 쓸 것 ③ 다른 사건이 있을 때에는 가중 처벌을 각오할 것 등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1932년 일장기 말소사건[편집]

4년 전 동아일보1932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6위 입상한 김은배 선수의 일장기를 지우기도 했다.[6][7]

각주[편집]

  1. 원산 정구대회 흥남군이 우승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
  2.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출판부 출간)
  3. <<여운형 평전>>, 이기형 지음.
  4.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2009-01-12 연합뉴스
  5.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 주역 이길용 기자 회고록 동아일보 2005-12-26
  6. 일장기 삭제사건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서울 근대공간),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7. 32년 LA올림픽 마라톤 보도도 일장기 지워 동아일보 2007-04-02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