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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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인천역 앞에 있는 차이나타운이다. 중국 음식점이나 기념품 등을 파는 상점이 많은 편이다. 화교중산학교가 있다. 매년 9월과 10월엔 각각 인천-중국의날 문화축제와 짜장면 축제가 열린다. 1883년 인천항 개항 후 1884년에 만들어진 중국(청나라) 조계지에 화교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되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특이하게 산둥 출신이 중심을 이룬다.

역사

1930년대 인천항의 지도

조선청나라 사람들이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임오군란 때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청은 조선의 공식 요청이 없었는데도 산둥성에 주둔 중이던 오장경(吳長慶)의 수군을 파병하였다.[1] 오장경이 지휘하는 4,500여 명의 군사와 함께 40여 명의 상인이 따라 들어왔으며, 이들은 청군이 주둔하던 용산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2] 이전부터 사신 왕래나 공무역인 개시(開市)를 통해 중국인이 조선에 머무는 일이 잦았으나, 장기 체류를 한 것은 이 일이 시초이다.[1]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제물포는 개항 후보지로 선정되었지만 실제 개항지로 선정되는 데에는 6년이 걸렸다. 조선도 서울의 바로 옆에 개항장이 들어서는 것을 꺼렸고, 일본도 다른 후보지들을 물색하느라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3] 1882년 제물포 조약으로 제물포가 개항지로 선정되었고, 청과 일본,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제물포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제물포에 조계지가 형성되게 되었다. 일본은 제물포 조약 직후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영사관을 세웠고, 청나라 역시 청국이사부(靑國理事府)를 세웠다. 1885년 청나라는 본국과 연결되는 전신선을 세웠다.[4] 청나라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채결하고 제물포를 통한 무역을 시작하였다. 1884년 3월 7일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이 체결되어 청조차지가 결정되었고, 이후 이곳에 많은 중국인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당시의 조차지에서 유래한 것이다.[5] 한국의 화교 규모는 1910년 11,800 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2,800 여 명이 조계 내에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인천에 사는 화교는 약 2,000 여명으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는 약 120 가구 500명이다.[6]

1883년 개항이 된 이래, 인천 차이나타운 내에는 중국의 종교시설이 만들어졌다. 황합경(黃合卿)이라는 스님이 창건하여 1884년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의선당이라는 묘우(廟宇: 신위를 모셔놓은 곳, 일명 사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화교들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이 곳은 1970년 거의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가 2005년 화교들의 모금과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후 다시 문을 열었고, 현재 이곳은 인천광역시 화교협회 지정 문화유산 제 1호이다.[7]

조계지가 형성된 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 까지 청나라 정부의 보호 아래 상하이인천을 오가는 해운 사업이 지속되었다.1883년 취항한 남승호는 월 1~2회 나카사키와 부산을 경유하여 상하이와 인천을 오갔다. 1888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산둥성을 거쳐 인천으로 연 20회 운항하였다.[8] 이를 통한 무역도 활발하여 청일전쟁 당시인 1984년 조선의 무역 가운데 중국 무역은 절반에 해당하는 13,446,363 원 이었다.[9]

청조계지의 화상(華商)은 처음에는 광동, 홍콩 지역 출신의 남방상인이 많았으나 점차 산둥 출신의 북방상인이 늘었다. 또한 화교 노동자 역시 개항장 인천의 건축 붐에 따라 입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둥성 출신이었다.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요리업자가 들어왔고, 요리업자에게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농부들이 들어왔다. 1905년 무렵 산둥성의 가정 요리에 바탕을 둔 짜장면이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였다.[10]

중국인 거주지는 항구의 서부 끝 쪽에 위치해 있고 통(C.T. Tong) 중국 영사의 관할 구역 내에 있다. 이 항구에 거주하는 중국인 500명의 다수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근 경작지의 소규모 채소밭을 소유한 중국인 채소 재배자가 상당히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이 산둥지방의 농부로, 봄이면 이곳에 와 자신들의 토지에서 일하고, 겨울이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 Korean Review, 1901년 1월호, pp. 11-12.[11]

차이나타운 내에 인천화교중산중·소학교가 있다. 1901년 중산소학교로 개교한 이 학교는 한 때 학생수가 1,500명에 이르는 큰 학교였고, 평택이나 수원 등지에서도 화교들이 자녀를 입학시켰다. 지금의 학생 규모는 400여명이다. 1992년 8월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며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였지만 학교는 여전히 중화민국의 소유로 중화민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여명이 대만으로 유학간다. 유학생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1950년대 중반 졸업생 이수영을 들 수 있다. 당시 인천 당면 공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던 이수영은 13세에 대만으로 유학하여 1961년 18세의 나이로 미스차이나에 선발되었다. 이수영의 일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12]

인천 차이나타운 인천화교중산중·소학교 앞의 삼국지 거리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이 한 가구에 200평 이하의 주택 한 채와 50평 이하의 점포 한 채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은 큰 타격을 맞았다.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공화춘과 같은 대형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이후 중국음식점은 영세한 규모를 면하기 어려웠다. 1973년 정부는 분식 장려를 명목으로 중국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식당은 밀가루를 밥알처럼 때어 말린다음 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 했다. 화교 단체들의 진정으로 3개월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지만 화교들은 큰 심리적 위축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갖가지 규제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대만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화교 인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13]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차이나타운은 쓸쓸히 퇴락해가는 곳이었다. 인천항의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상권을 잃었다.[12]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14] 또한, 2001년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제들을 제정비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15]

사진

주석

  1. 양세욱, 《짜장면뎐》, 프로네시스, 2009년, ISBN 978-89-01-09300-0, 122쪽
  2. 재한화교의 비조(鼻祖) 오장경 제독을 아시나요, 한겨레21, 2012년 3월 5일
  3. 나채훈 박한섭, 《인천개항사》, 미래지식, 2006년, ISBN 8991359426, 76쪽
  4. 나채훈 박한섭, 《인천개항사》, 미래지식, 2006년, ISBN 8991359426, 85-86쪽
  5. 나채훈 박한섭, 《인천개항사》, 미래지식, 2006년, ISBN 8991359426, 94쪽
  6. 인천광역시, 《골목 살아(사라)지다》, 2013년, 105-123쪽
  7. 김혜영, 이재성, 2014. <인천: 인천여행가이드북 코스 A>. DETO. 20-21쪽. http://ridibooks.com/v2/Detail?id=1516000003&_s=ret&_q=인천
  8. 윤대영, 《마주보는 두 역사, 인천과 하이퐁》, 인천문화재단, 2010년, ISBN 978-89-92678-19-3 04600, 51-52쪽
  9.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역사문화총서 54 《역주 인천과 인천항》, 2009년, ISBN 978-89-93590-52-4, 13쪽
  10.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인문학시민강좌 03 《근대제국과 만난 인천:충돌과 변화》, 글로벌콘텐츠, 2013년, ISBN 978-89-93908-70-1 04300, 185-186쪽
  1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역사문화총서 34 《외국인의 기록으로 보는 인천근대》, 도서출판 아진, 2007년, 발간등록번호 54-6280000-003137-10, 6-7쪽
  12. 골목, 살아(사라)지다, 선창가 바람, 붉은 풍등風登 흔들다, 인천시 인터넷신문
  13. 양세욱, 《짜장면뎐》, 프로네시스, 2009년, ISBN 978-89-01-09300-0, 176-177쪽
  14. 양세욱, 《짜장면뎐》, 프로네시스, 2009년, ISBN 978-89-01-09300-0, 238쪽
  15. 한광대, 인천 차이나타운의 관광 활성화 방안에 대한 연구, 인하대학교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