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정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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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주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5월 25일 (토) 13:41 판

이효정(李孝貞, 1913년 7월 28일 ~ 2010년 8월 14일)은 일본 제국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계 노동운동가이자 항일운동가이다.

생애

일본 제국 강점기 활동

1913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났다.[1] 이후 경성부로 올라와 1930년대 초 경성에서 노동운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아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고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당했다. 졸업 후에는 이재유가 지도하는 경성트로이카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 제사공장(鍾淵紡織 製絲工塲)에서 파업 투쟁이 일어나자 이효정은 이재유에게 지도받아 여성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토대로 산업별 적색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하에 파업 투쟁을 지도하였다. 종연방직 파업 투쟁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경성에서 이재유권우성이 주도하여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 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이효정은 고문 후유증으로 치료받다가 '교원 노조 사건'으로 2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계 항일운동가 박두복과 혼인하여 시댁인 울산으로 내려가 주부로서 살았고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

해방 이후 이효정은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후일 '남로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기도 했던 남편 박두복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는 일이 벌어지고 자녀 2남 1녀와 함께 대한민국에 남겨진 이효정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생계를 어렵게 꾸려 가다가 1950년대 말 남편이 남파 간첩으로 활동하다가 거듭 월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요시찰인물이 다시 된 이효정은 수시로 사찰 기관에 연행되어 고문당하고 취조당한다. 영장 없이 끌려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고 고문으로 팔목이 부러지는 장애를 입으면서 억울한 옥살이도 감수하여야 하였다. 1980년대 '6.10 민주항쟁'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지자 이효정을 대상으로 한 사찰도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노년에 이효정은 시집 『回想』(도서출판 경남, 1989)과 『여든을 살면서』(도서출판 경남,1995)를 출간하면서 문학인으로 지냈다.

2006년대한민국 행정부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면서 선생은 93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았다. 2010년 8월 14일 타계하였다.

작품

  • 『回想』(도서출판 경남, 1989)
  • 『여든을 살면서』(도서출판 경남,1995)

주석

  1. 친정 측 가문은 친가와 외가 모두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유명하다. 증조부 때부터 의병장이 여러분 나왔고 시인 이육사도 이효정하고는 친척 아저씨뻘 관계다. 이후 이효정을 포함해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도 여러분 나왔다. (이종희, 이종국, 이병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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