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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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동부유럽전선으로 추정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복무기간 1916년 ~ 1917년
최종계급 러시아 제국 육군 소위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동부유럽전선
기타 이력 대한제국의 외교관
서훈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 추서

이위종(李瑋鍾, 1887년 ~ 1917년?)은 대한제국외교관으로, 러시아로 귀화한 후에는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Сергеевич Л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후손이며 러시아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李範晉) 열사의 아들이고 무위대장을 지낸 조선 말기 무관(武官) 이경하(李景夏)의 손자이며 간도관리사를 지낸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이범윤(李範允)의 조카이다. 한일 합방 이후 아버지 이범진이 자살하자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으며, 1917년 전사했다.

생애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동행하였다. 당시 이위종은 주러시아공사 참서관이었으며, 7개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1]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으나, 기자협회의 도움으로 한국의 억울한 입장과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일본은 이들 3의사에 대한 궐석 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하여 체포령을 내렸다. 이위종은 이미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에 묻고,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그 후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계속 항일 투쟁을 하였다.

1911년 1월 13일, 부친인 이범진이 망국의 슬픔을 못이겨 자살하자 이위종은 그 해 러시아 제국 소속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이후 장교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1916년동부유럽전선에 발령받은 후, 1917년에 가족에게 전사통지서가 배달되었다고 한다. 사망지점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2]

1962년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가족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범진이었다. 이위종은 1906년에 러시아 귀족 옐리자베타 놀켄과 결혼했다. 이위종의 후손들은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알려진 바로는 이위종의 둘째 딸 니나가 있으며, 니나의 슬하로 아들 바실리비치와 딸 예피모바가 있다. 또한 셋째 딸 제냐와 그녀의 아들로 율리안 등이 있다고 한다.[2]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10815031743736h2&linkid=4&newssetid=1352&from=rank

주석

  1. 유석재, 103년 전 만국평화회의 닫힌 문 앞 울분 토하던 한국… 그 현장 잊어도 되나, 조선일보
  2. 홍성균. “헤이그密使 李瑋鐘의 『마지막 삶』 확인 - 蘇 장교로 1차 大戰서 戰死”. 경향신문. 2010년 3월 24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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