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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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No.36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의 이승엽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생년월일 1976년 10월 11일(1976-10-11)(47세)
출신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신장 183cm
체중 93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1루수, 지명타자
프로 입단 연도 1995년
드래프트 순위 1995년 고졸우선지명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KBO / 1995년 4월 15일
LG전 (잠실야구장)
NPB / 2004년 3월 27일
세이부전 (세이부 돔)
마지막 경기 NPB / 2011년 10월 18일
세이부전 (오사카 돔)
획득 타이틀

한국 프로야구 타이틀

계약금 1억 3,200만 원(삼성 입단시)
연봉 9억 원 (2015년)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올림픽 2000년 시드니
2008년 베이징
WBC 2006년·2013년
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아선수권 2003년 삿포로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남자 야구
올림픽
2000 시드니 야구
2008 베이징 야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 샌디에이고 야구
아시안 게임
2002 부산 야구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3 삿포로 야구

이승엽(李承燁, 1976년 10월 11일(음력 8월 18일)[1] ~ )은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내야수이다. 현재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뛰고 있다.

‘국민타자’, ‘라이언 킹’ 등의 별칭을 가졌으며, 역대 대한민국 최고 타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일본어: スンちゃん,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スン様)이다. 2008년 하계 올림픽일본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여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2]

청소년 시절

청소년 시절 투수타자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3]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이승엽은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4][5]

삼성 라이온즈 시절

경북고등학교 졸업에 맞추어 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 원에 연봉 2천만 원의 조건으로 1995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6][7] 삼성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박승호 타격코치로부터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하였다.[8]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 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현 상원고 코치)은[9]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어져 2004년 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면서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1루수로 자리매김해 나갔지만 내야수 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5][10]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2004년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하였다. 연봉은 2억 엔이었는데, 당시 지바 롯데 멤버 중 이승엽을 제외하고 2억 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다른 롯데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롯데가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원정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 상대 투수는 세이부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이자 ‘괴물 투수’인 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종료 후 14홈런, 타율 0.240,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시범 경기에서 타율 0.15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하면서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경우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플래툰 시스템에 의해 기용되었다. 시즌 최종 타율은 0.260이었지만 홈런 수가 팀 내에서 최다인 30개(이 기록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現 홈 구장인 QVC 마린 필드 개장 이후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기록한 기록이었다.)로, 전년도에 비해 장타력 부분에서의 제 기량을 찾았고, 소속팀인 지바 롯데의 플레이오프 진입에도 공헌하였다.

재팬 시리즈에서 처음 맞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의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1차전에서 만난 한신의 좌완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좌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2점 홈런)을 쳐내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롯데가 1974년 이후 31년 만에 재팬 시리즈 챔피언 등극을 하는데에 있어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 해 재팬 시리즈 MVP도 유력하였으나 안타깝게 MVP 수상은 하지 못했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친정 팀인 대한민국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각각 5번과 3번 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6년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재계약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과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 하의 기용 등 본인의 의사와 롯데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아 자유 계약 선수(FA)가 되었다. 이후 감독으로 재부임한 하라 감독 아래 팀 전력의 보강을 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2006년 1월 19일에 전격으로 계약하였다.[12]

하라 감독은 이승엽을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하였는데, 이러한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듯 이승엽은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이승엽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 자체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으로 인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0.323), 타점 4위(108), 홈런 2위(41개[13])를 기록하여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12개를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건스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하면서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2006 시즌을 마감하였다. 타율은 주니치의 후쿠도메에게 밀리고 홈런과 타점은 타이론 우즈에게 밀렸지만 시즌 내내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며 최정상급의 기량을 뽐낸 해이다.

2007년

2006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려고 했던 이승엽은 그 계획을 소속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승 이후로 연기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맺은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소속 구단 요미우리가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엽의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천만 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요미우리 소속이던 1루수 페타지니의 7억 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 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이승엽은 모친상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 등 시즌 내내 고전하였다. 외다리 타법을[11] 고쳐 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7월 중에는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으며, 시즌 말미에는 승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요미우리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하였다.[14]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30홈런, 74타점을 기록하였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15] 그러던 중 8월에 있었던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뽑아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16][17] 그러나 그 해 요미우리에서 45경기에 출장하여 2할 5푼의 타율에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 해 일본 시리즈는 센트럴 리그 우승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경기로 진행되었는데 거기서의 이승엽은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3안타(타율 0.167)에 삼진을 12개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9년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이승엽은 스스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에는 3할타율, 장타율 1위 등에도 오르는 등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이승엽은 그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하였다.

홈런 16개와 타율 2할 2푼 9리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나가사키 현 빅N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8번 타순으로 배정되어 1루수로 선발 출전, 2루타 두 방을 날리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18]

2010년

타격 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된 뒤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시즌 종료 후 2010년 11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후 일본 잔류를 위해 팀을 물색하던 이승엽은 퍼시픽 리그 소속의 오릭스 버펄로스와 1억 5천만 엔에 플러스 옵션이 포함된 연봉으로 계약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 잔류하게 됐다.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1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후 2010년 12월 2일 퍼시픽 리그 오릭스 버펄로스와 1년간 1억 5,000만 엔 +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이승엽은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NPB가 공인구를 반발력이 적은 것으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타율 0.201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홈런 15개를 치며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 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타석 미달로 인해서 순위에는 들지 못하였다.

KBO 리그 복귀

2011년 10월 21일 오릭스 버펄로스고베 홈 구장인 호토모토 필드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19]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20]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 원, 플러스 옵션 3억 원에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을 체결하여 복귀했다.

2012년에는 타율 0.307,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해 여전히 강타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홈런 7타점을 기록, 1차전에서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 홈런 타이기록을 수립했고 6차전에서 결정타였던 싹쓸이 3루타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첫 번째이자 최고령(종전은 김용수/1994년 34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고, 상대적으로 1루수로 출장한 경기가 적어서 처음으로 지명타자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2013 시즌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에서 KIA 타이거즈나지완과의 대결에서 6-2로 이기며, 데뷔이후 첫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우승을 맛봤다. 2013년 8월 28일 NC와의 경기에서 3,000루타에 달성[21] 하였으며, 이는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22] 이다.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타율 2할5푼2리 13홈런을 기록하였다.[23]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되기도 했다. 두산 베어스와 맞붙었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되어 7경기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 1일 대구에서 열린 7차전까지 단 한 점의 타점을 뽑아 내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류중일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24]

2014년에는 타격자세 교정을 받았고, 그 결과 전년도의 부진을 털고 역대 최고령 3할 - 30홈런 - 100타점을 달성하며 국민타자의 부활을 알렸다. 2014년 6월 14일 SK 와이번스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고, 7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는 7타점을 쓸어담았다. 또한 9월 10일 NC 다이노스전에서는 역대 최고령 30홈런을, 한 달 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는 연타석 홈런으로 최고령 시즌 100타점을 돌파했다.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하였지만 2차전에서 홈런을 때리며 타이론 우즈를 제치고 포스트시즌 역대 통산 최다 홈런 신기록을 수립하였다. 시즌 기록은 3할 8리, 32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회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2년만에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다. 이는 1루수로써 7번 받은 것을 포함하여 총 9번을 받으며 역대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 신기록을 경신하였다.

2015년 6월 3일 포항야구장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3회말에 구승민 투수를 상대로 두번째 타석에 올라와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2구 137 km 직구를 우익수 뒤로 넘어가는 장외홈런 올시즌 10호 솔로홈런, KBO 리그 통산 400호 홈런, 한일통산 559호 홈런을 기록하였다.

20156월 23일삼성 라이온즈 지명타자 이승엽은 롯데투수 조현우을 상대로 경기장 우측 외벽을 넘기는 비거리 140m짜리 역대 7번째 사직구장 장외홈런을 기록하였다. 이승엽은 좌타자로서 2번째 장외홈런이고 원정팀 3번째 장외홈런이자 자신의 시즌 14호 홈런을 때려냈다.

국가 대표 경력

연도별 성적















2

3



















4












O
P
S
1995년 삼성 121 411 365 55 104 29 1 13 174 73 0 3 2 7 33 1 4 54 4 .285 .345 .477 .821 타점 6위
1996년 122 504 459 57 139 32 6 9 210 76 4 1 1 5 34 4 5 42 10 .303 .354 .458 .811 타율 8위, 안타 6위, 타점 3위
1997년 126 577 517 96 170 37 3 32 309 114 5 2 1 4 49 4 6 79 10 .329 .391 .598 .988 타율 2위, 안타 1위, 홈런 1위, 타점 1위, 시즌MVP
골든글러브(1루수)
1998년 126 568 477 100 146 32 2 38 296 102 0 2 1 7 78 10 5 97 4 .306 .404 .621 1.024 타율 8위, 안타 3위, 홈런 2위, 타점 2위, 장타율 1위
골든글러브(1루수)
1999년 132 614 486 128 157 33 2 54 356 123 10 2 0 4 112 6 12 114 7 .323 .458 .733 1.190 안타 9위,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1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 OPS 1위, 시즌MVP, 골든글러브(1루수)
2000년 125 544 454 108 133 33 0 36 274 95 4 5 0 3 80 7 7 113 5 .293 .404 .604 1.008 홈런 4위, 타점 8위, 골든글러브(1루수)
2001년 127 574 463 101 128 31 2 39 280 95 4 2 1 2 96 11 12 130 6 .276 .412 .605 1.017 홈런 1위, 타점 8위, 시즌MVP, 골든글러브(1루수)
2002년 133 617 511 123 165 42 2 47 352 126 1 2 0 2 89 5 15 109 11 .323 .436 .689 1.125 타율 3위, 안타 2위,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1위
출루율 2위, 장타율 1위, OPS 1위, 시즌MVP,
골든글러브(1루수)
2003년 131 596 479 115 144 23 0 56 335 144 7 0 0 6 101 9 10 89 11 .301 .428 .699 1.127 홈런 1위, 타점 1위, 득점 1위, 출루율 3위
장타율 2위, OPS 2위,시즌MVP, 골든글러브(1루수)
2004년 지바롯데 100 382 333 50 80 20 4 14 150 50 1 2 1 3 42 0 3 88 6 .240 .328 .450 .779
2005년 117 445 408 64 106 25 2 30 225 82 5 4 0 3 33 3 1 79 9 .260 .315 .551 .866
2006년 요미우리 143 592 524 101 169 30 0 41 322 108 5 1 0 7 56 3 5 126 5 .323 .389 .615 1.003 타율 2위, 안타 5위, 홈런 2위, 타점 4위
2007년 137 583 541 84 148 29 2 30 271 74 4 3 2 1 38 0 1 119 8 .274 .322 .501 .823
2008년 45 170 153 21 38 4 0 8 66 27 1 0 0 0 11 0 6 37 3 .248 .324 .431 .755
2009년 77 257 223 33 51 9 0 16 108 36 1 2 0 1 28 4 5 65 1 .229 .327 .484 .811
2010년 56 108 92 13 15 1 0 5 31 11 1 0 1 0 12 0 3 26 0 .163 .280 .337 .617
2011년 오릭스 122 432 394 28 79 20 0 15 144 51 0 0 0 6 32 1 0 121 8 .201 .257 .365 .622
2012년 삼성 126 556 488 84 150 28 2 21 245 85 6 0 1 4 59 4 4 101 10 .307 .384 .502 .886 타율 6위, 안타 4위, 홈런 5위, 타점 3위, 득점 3위
골든글러브(지명타자)
2013년 111 483 443 62 112 24 0 13 175 69 3 1 0 8 30 2 2 94 8 .253 .298 .395 .693
2014년 127 548 506 83 156 30 0 32 282 101 5 1 0 2 40 3 0 77 10 .308 .358 .557 .915 안타 6위, 홈런 4위, 타점 5위, 골든글러브(지명타자)
최고령 3할 30홈런 100타점 달성
2015년
KBO:12년 1507 6592 5648 1112 1704 374 20 390 3288 1203 49 21 6 56 801 63 82 1099 96 .302 .393 .582 .975
NPB:8년 797 2969 2668 394 686 138 8 159 1317 439 18 12 4 21 252 11 24 661 40 .257 .324 .494 .818

수상

KBO

  • MVP :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 골든글러브 : 9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2년, 2014년)
  • 한국시리즈 MVP : 1회 (2012년)
  • 홈런왕 : 5회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 타점왕 : 4회 (1997년, 1999년, 2002년, 2003년)
  • 득점왕 : 5회 (1998년, 1999년, 2000년, 2002년, 2003년)
  • 최고 출루율 : 1회 (1999년)
  • 최고 장타율 : 3회 (1998년, 1999년, 2002년)
  • 최다 안타 : 1회 (1997년)
  • 올스타전 출전 : 8회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2013년)

NPB

국제대회

고교야구

주요 기록

KBO

  • 진한 바탕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최초 기록임
기록 날짜 소속 구장 상대팀 상대 투수 경기수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최연소/최소 경기 2000루타 2002. 5.16 삼성 대구 롯데 914 25세 8개월 28일 DH-2
  • 2015년 6월 3일: KBO 리그 통산 400 홈런, 포항 롯데전 상대투수 3회 구승민
  • 2013년 6월 20일: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 홈런 기록 경신 (352개), 인천 SK전 상대 투수 3회 윤희상
  • 2003년 10월 2일: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최고 기록 경신 (56개), 대구 롯데전 상대 투수 2회 이정민
  • 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 세계 최연소/최단 경기 통산 300 홈런(만 26세 10개월 4일/1075경기, 상대 투수 8회 김원형, 기존 - 한화 장종훈, 32세 5개월 26일, 1565경기)
  • 2001년 6월 21일: 대구 한화전, 최연소 통산 200 홈런(만 24세 10개월 3일, 상대 투수 8회 김정수, 기존 - 한화 장종훈, 28세 4개월)
  • 1999년 5월 5일: 대구 현대전, 최연소 통산 100 홈런(만 22세 8개월 17일, 상대 투수 3회 정명원, 기존 - 한화 장종훈, 23세 5개월)

NPB

등번호

KBO 리그

일본 프로 야구

주요 방송 출연

대한민국 방송

  • MBC성공시대》 - 홈런왕 이승엽 (1999년 10월 23일)
    • PD수첩 - 이승엽 신드롬 (1999년 8월 24일)
    • 밀레니엄특집 아듀 20세기 웰컴 21세기 - 스포츠 100년 손기정에서 이승엽까지 (1999년 12월 31일)
    • 체험 삶의 현장 -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 (1998년 11월 16일)
    • 서세원쇼 (1999년 8월 17일)
    • 작전타임 스포츠쇼 - 집중탐구 (1999년 9월 29일)
    • 개그콘서트 - 걸인의 추억 (2003년 8월 26일)
    • 해피투게더 - 쟁반노래방 (2003년 12월, 게스트 윤도현, 장나라와 동반출연)
    • 파워 인터뷰 (2005년 11월 27일)
    • 단박 인터뷰 - 야구 선수 이승엽 (2007년 6월 26일)
  • KBS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 대구MBC The Lion - 이승엽 삼성 복귀 내레이션 참여 (2012년 3월 25일)
  • 대구MBC 덕아웃 -프로야구 삼성 우승특집 방송 출연 (2012년 11월 16일)
  • SBS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 국민타자 이승엽 (2012년 11월 19일, 2012년 12월 3일),신년의 밤 (2015년 1월 19일)
    • 줌인 내인생의 특종 (1999년 8월 17일)

CF

라디오

출신 학교

가족 관계

같이 보기

참조

  1. 주민등록상으로는 8월 18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양력 생일은 10월 11일이다. 일간 스포츠 2006년 8월 2일 기사 참고. 2014년 3월 23일 확인. - 이승엽, 역대 2번째 400홈런 타자 될뻔…
  2. 김도헌. “승엽은 병역 브로커”. 동아일보. 
  3. 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
  4. OSEN - 2007년 12월 기사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
  5. 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의 칼럼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
  6. 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
  7. 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
  8. 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
  9. 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
  10. 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
  11. 스포츠 춘추 - 2010년 2월 박동희의 칼럼 "외다리 타법의 창시자, ‘야구는 도(道)이고, 타격은 검(劍)’"
  12. 스포츠 춘추 - 2008년 9월 박동희의 칼럼 "일본 프로 야구의 대리인 제도를 말한다"
  13. 실제로 2006년 이승엽은 42개의 공을 펜스 너머로 넘겼지만, 이 중 2006년 6월 11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대결에서 3회 초 2사 1루 상황, 상대 선발 투수 와타나베로부터 친 홈런이 심판 판정에 의해 단타로 처리되면서(심판은 당시 1루 주자 오제키 데쓰야가 3루를 밟지 않고 홈에 들어왔다고 판단하였다) 공식 기록은 41개가 되었다.최정희. “[스포츠 10대 해프닝②] 이승엽, 도둑 맞은 19호 홈런”. 조이뉴스24. 2008년 9월 22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4. 강구열. “이승엽 2007년 시즌 결산, 모친 타계… 부상… 악재의 연속”. 세계일보. 2008년 6월 1일에 확인함. 
  15. 스포츠 춘추 - 2008년 4월 박동희의 칼럼 "한·일 전문가가 꼽는 이승엽의 문제"
  16. 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한-일 기자 대담 “9회초 대타 김현수가 의미하는 것”"
  17. 스포츠 춘추 - 2008년 8월 박동희의 칼럼 "일본에서 본 호시노 JAPAN의 침몰"
  18. “이승엽 “내 야구 인생에 포기는 없다””. 스포츠월드. 
  19. '국내 복귀' 이승엽, 日서 기자회견 '굿바이, 오릭스'. 스포츠서울. 
  20. 이승엽, 와이프에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인가 보다 - 스포츠조선
  21. 삼성 이승엽, 역대 6번째 3,000루타 달성
  22. 이승엽 최소 경기 3,000루타
  23. 이승엽의 무서운 다짐 "내 이름, 꼭 되찾겠다" - 노컷뉴스
  24. 이승엽, 홈런이 전부가 아니다… 부진 털어낸 동점 적시타 ‘우승 발판’ - 스포츠월드
  25. http://www.koreabaseball.com/generation/generation02.asp?p_type=1&b_type=6
  26. http://www.koreabaseball.com/generation/generation02.asp?p_type=1&b_type=9
  27. http://www.koreabaseball.com/generation/generation02.asp?p_type=1&b_type=8
  28. http://www.koreabaseball.com/generation/generation02.asp?p_type=1&b_type=17
  29. “300홈런 주인공 이승엽은 누구인가?”. 연합뉴스. 
  30. 박세운. '국민 타자' 이승엽, 퍼펙트 金 약속 지켰다”. 마이 데일리. 
  31. 동아일보 - 2009년 9월 12일 기사 "18…21…23…35… 영구 결번,역사가 된 숫자들"
  32. 이승엽 선수 아버지 이춘광씨, 고향 강진 방문, 데일리안광주전라, 2013년 3월 2일
  33. <프로야구> 이승엽을 만든 숨은 주역, 연합뉴스, 2003년 10월 2일
  34. 이승엽 모친 6일 별세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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