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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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李福男)
출생1555년 6월 28일
조선 강원도 강릉
사망1597년 8월 16일
조선 전라북도 남원부 남원성
거주지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
학력1588년(선조 21년) 무과 급제
직업무신, 군인, 시인.
부모이준헌(부), 전주이씨(모), 평산신씨(모)
배우자청주한씨 한곤의 딸
자녀이경여, 이경수, 이경보, 이씨(딸)
이복남 (李福男)
별명 자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
출생지 조선 강원도 명주군
사망지 조선 전라북도 남원군 남원성
복무 조선 육군
복무기간 1588년 ~ 1597년 8월 16일
최종계급 전라도병마절도사
지휘 전라도병영
주요 참전 나주 전투, 웅치 전투, 웅현 전투, 남원성 전투/임진왜란, 정유재란
기타 이력 1588년 과거 급제, 사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가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서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

이복남(李福男, 1555년 6월 28일 ~ 1597년 8월 16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이며, 본관은 우계(羽溪)로 자(字)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무과 급제후 선전관에 초임된 뒤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折衝將軍 全羅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1588년(선조 21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2년(선조 25)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되고, 그해 7월 나주판관 재직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참전하여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라조방장,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 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 남원 부사(南原府使)·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로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남원성이 포위되자, 그해 8월 7백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가 남원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등의 5만 군사를 대적하다가 패하고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사후 바로 (贈) 자헌대부 병조판서지의금부사증직(贈職)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으며,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추증(追贈)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남원 칠충신사에 제향(祭享)하고 칠충신사는 후에 광해군 때에 충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1711년(숙종 37년) 숙종 때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1] 강원도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소년기

이복남은 강원도 명주 출신으로 1555년(명종 10) 6월 28일 갑산도호부이준헌(李遵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광식(李光軾)의 증손이며 이감(李戡)의 종손이다. 위로는 형 이귀남(李貴男)이 있었고, 동생 이덕남(德男), 이인남(仁男)이 태어났다. 처음에는 글을 배웠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을 익혀 무관(武官)이 되기로 결심한다.

고려의 장수 이의(李薿)의 후손으로, 고조부 이지방(李之芳), 증조부 이광식(李光軾), 할아버지 이전(李戩), 종조부 이용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변방의 장수로 활동하였다.

허균에 의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비분 강개하는 큰 뜻이 있었다. 처음에는 글을 배웠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을 배워 그 대의를 통하였고, 평생 나라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하였었다. 그리고 장순(張巡)ㆍ악비(岳飛)ㆍ문천상(文天祥)의 전기를 읽을 적마다 반드시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2] 허균은 그의 시재주를 칭찬했는데, 시문(詩文)을 지으면 나는 듯한 기략(氣略)이 있었지만 시 짓기를 탐탁잖게 여겼다. 남을 대해서 고금(古今)의 흥망 성패를 담론하는 대목은 시원스러워서 들을 만하였으므로 남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2]

과거 급제

1588년(조선 선조 21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 별장(別將)을 거쳐 1589년(선조 22)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할 때 변협(邊協)의 천거를 받고 비변사 낭관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나주판관(羅州判官)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1592년 7월 나주판관 겸 도복병장에 임명되었고,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병장 황박, 이광, 김제군수 정담 등과 함께 전주 웅치 전투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다.

임진왜란

전주, 안덕원 전투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瑗)가 이끄는 일본군은 전주로 상륙하기 위해 웅치로 몰려들었다. 이때 광주목사 권율광주 지방에서 모집한 군사 1,500여 명을 직접 이끌고 이치를 지켰다. 이 부대에는 일본에 가서 기개를 떨친 동복현감 황진도 가담하고 있었다.[3] 김제군수 정담(鄭湛)이 웅치를 막는 임무를 맡았으며 나주판관 이복남군이 선발대에 배치되었다. 황박(黃璞) 등 의병도 다수 가담했다.[3] 7월 7일 일본군 선봉대가 조총을 쏘아대며 웅치로 올라왔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딛쳐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일본군은 병력을 총동원해 진격했다. 1선을 맡은 황박군이 저지하다가 밀려나자 2선을 맡은 이복남군이 나섰다. 적은 2선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3]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여 안덕원으로 후퇴하였다가 계곡으로 들어오는 왜군을 모두 섬멸하였다.

12월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팔량신성의 수비를 명 받았으며 1593년 전라조방장, 전라방어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4월 일본군은 조선군과의 화의를 깨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순변사 이빈은 운봉을 거쳐 의령에 주둔했고, 전라방어사 선거이충청병사 황진, 전라방어사 이복남은 권율의 지휘 아래 창녕 등지에 분산 주둔했다.[4]

임진왜란 후반

그 뒤 충청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7월 병으로 이시언(李時言)과 교체되었다가 1593년 12월 다시 충청조방장이 되었다. 1594년 남원 부사 겸 전라조방장, 1595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5년 남형(濫刑)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가 복관, 1596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여 날마다 군마(戎翰)를 훈련시키어 죽을 힘을 다하여 여러 번 적을 베고 기를 베어 바치니, 그 공으로 붉은 비단옷을 하사받았다.[2] 1597년(선조 30)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97년 4월 왜군 15만 명이 부산에 상륙하자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군을 막으러 전라남도 순천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전쟁이 그치지 않은 때문에 그는 완력 있고 용감한 사람으로, 투석(投石) 잘하고, 발거(拔距) 잘하고, 활 잘 쏘는 자들을 특별히 모아 5백 인을 얻었다.[2] 그는 이들을 막하(幕下)에 예속시켜 번갈아 숙직시켰다. 그리고 밤낮으로 같이 기거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안 먹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으니 휘하 병사들이 감동하였다.[2]

정유재란

왜군의 남원성 침공 도면

1597년 8월 명나라와 일본의 회담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해안가로 들어오는 왜적을 섬멸하려 군사를 이끌고 해안가로 내려갔다. 순천, 광양까지 내려갔다가 남원성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명나라 부총병 양원(陽元)의 청을 듣고 회군하였다.[5] 섬진(蟾津) 일대를 방어하며 석만(石蠻)ㆍ행장(行長)과 막으려 하던 차였다.[2] 이에 격문을 받고는 곧 떠나려면서 군리(軍吏)를 불러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따를 사람은 따르라고 하였다.

적은 많고 응원은 끊어졌으니, 성의 함락은 기정사실이다. 나는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안 갈 수는 없다. 이제 수천 명의 군사로 그 많은 적을 당해내기란 마치 큰 용광로에 기러기 털[鴻毛]을 사르기와 같아, 형편상 요행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장부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명을 바치는 데 있어 죽음을 사양할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제군(諸君)은 부질없이 함께 죽을 것은 없다. 가고 싶은 자는 가도 되나, 남고 싶은 자는 머물러 있거라.[2]

이에 그를 따르던 군졸 7백은 그를 따라 죽겠다고 맹세하고 함께 남원성으로 올라갔다. 회군 중 왜적이 차지할 우려가 있는 식량창고를 모두 소각했는데, 현지의 관료들은 숨어있다가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알리며 그를 무고하였다.

남원성 잠입

8월, 남원 전투에서 그가 동복(同福)에서 올 때 이미 왜군은 남원성에 당도하였다. 그가 천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왜군이 성곽을 포위하였다. 성으로 오는 길에 접반사 정기원, 방어사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申浩) 등을 만나, 죽음으로서 전투에 임할 것을 다짐하였다.

사나이 국은을 갚을때가 이날이 아닌가

라며 동행하였다. 성앞에 이르러 죽음으로서 싸울 것을 선언하고 살고 싶다면 떠나도 좋다고 선언한다. 병사들은 그를 따라 행군하였다. 남원성 입구에 이르러 그는 천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죽음을 각오하고 성 남문으로 잠입, 행군하였다. 피리와 나팔을 불고 행군하는 그의 부대를 본 고니시 유키나카의 병사들은 소수의 병력으로 행군하는 그들을 보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남원성 전투와 전사

남원성 내부 간략도

죽음을 각오하고 성 남문으로 들어가 성안에 있던 관민 1만 명, 병력 4천 명과 함께 분전하였다.

8월 9일 전라병사로 있던 이복남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포위를 뚫고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온다. 의연한 자세로 나팔과 호각을 불며 포위된 남원성 내로 들어온다. 그 후 5일 동안의 남원성 수비를 위한 처절한 전투가 계속된다. 8월 12일 병력 다수는 죽고 그는 생존 장병에게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허락하였다. 모든 장병은 최후의 일각까지 결전에 임하라"고 명령하고 교전하였다. 8월 15일 이복남은 배속된 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노와 함께 북문을 지키고 있었다. 전세가 기울자 명나라 부총병 양원은 사람을 보내 이복남에게 수하의 군졸을 보내와 같이 탈출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땔나무로 쓰던 풀을 그의 주위에 쌓게 하여 성안에서 죽을 각오를 하였다. 그는 오응정·김경로 등과 함께 대검을 빼어 들고 군졸들의 싸움을 독려하면서 사력을 다하며 분전하였다.

북문의 교룡산성 별장 신호는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 들고 동문과 서문으로 오가며 적을 베었다. 가복이 탈출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가족에게 전하라며 이를 빼어 가복에게 주었다. 관민 1만 명, 병력 4천 명과 함께 5만 8천의 왜적과 필사항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고분군투한 보람 없이 병사 다수를 잃고 성은 함락, 8월 16일 군졸을 시켜 볏짚을 가져다가 자신의 둘러싸고 불을 지르게 하여 분신자결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후일 그와 교분이 있었던 교산 허균성소부부고에서 이복남을 추모하는 뇌사를 지었다. 선조는 원야에서 충성을 다하다 죽었으니 장하도다며 녹공증직을 명하였다.

사후

시신은 만인의총(萬人義塚)에 안장되었으며 시신을 대신한 투구와 갑옷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 선영하에 천익장으로 장사되었다. 후일 다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83-2번지) 산에 안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증조부 이광식, 6촌 동생 이명남, 재종손 이서우 등의 묘소가 있다.

선조 임금이 이르기를 원야에서 충성을 다해 순국하였으니 장하도다 하며 바로 증직을 내려 바로 자헌대부 병조판서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서되었다. 뒤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하였다. 바로 정려하여 제천충신문(忠臣門)을 세웠다. 이복남의 정려문은 제천 봉양면에 세워졌으나, 후에 돌보는이 없이 허물어져서 1971년 중원군 주덕면 당우리로 옮겨져 재건, 복원되었다.

후일 남원에 함께 전사한 신호, 정기원, 오응정, 임현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마련되었으며 1612년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충렬사는 대원군 집권 때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이 헐렸다가 1964년 남원 향교리 왕봉산 아래에 다시 사당을 재건하고 묘역을 재건하였다. 1711년(조선 숙종 37년) 6월 16일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다.[6]

나주의 금우사에 금은 김수연 5부자와 함께 배향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철되었다.

가족

  • 조부 이전(李戩, 1517년 - ?)
  • 조모 고성이씨, 좌랑 이광택(李光澤)의 딸
  • 조모 하빈이씨, 부장 이윤우의 딸
  • 서조모 이름 미상, 관비 출신
    • 숙부 이경헌(李敬憲)
    • 숙부 이승헌(李承憲)
    • 숙부 이봉헌(李奉憲)
    • 고모 이씨
    • 고모부 한강(韓降, 한양위, 청주한씨)
      • 고종 사촌 한호문(韓好問)
      • 고종 사촌 한선문(韓善問)
  • 처 정경부인 청주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 ? - ?, 한곤(韓梱)의 딸)
  • 처조부 한거비(韓去非, 한치량(韓致良)의 증손, 한치형의 종증손)
  • 장인 한곤(韓梱, ? - ?, 본관은 청주)
  • 장모 함열 남궁씨
  • 사돈 윤근수(尹根壽)
  • 사돈 윤두수(尹斗壽)

평가

관리 노릇을 하면서 매우 꿋꿋하여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좋게 여겼다.[2] 지방관으로 있을 때 그 다스림이 엄정하고 밝고 인자하고 관대하여 교화(敎化)가 크게 이루어졌었다.[2]

기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의 작전본부를 설치하였던 용성관은 성이 함락되자 병마사 이복남이 태조의 위패가 왜적에게 능욕을 당할까 염려하여 용성관을 소각하였다.

임진왜란과 가족

임진왜란 당시 지중추부사였던 할아버이 이전은 평안도 의주로 몽양가는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성공신 3등에 녹선되었고, 숙부 이경헌, 이승헌과 동생인 남도 우후 이인남(李仁男)은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부관으로 전사하였고, 동생 이덕남(李德男)은 무과 급제후 강원도 김화현감 재직 중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올라오는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일본에 유질(留質)로 끌려간 아들 이경보(李慶甫)는 리노이에 씨(李家氏)로 창성하고 이름을 성현(聖賢)이라 개명하고 일본 여인과 혼인하여 자손을 두었다[9].

전 언론인이자 아사히 신문사 사장이며 문학박사(文學博士)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는 자신의 성이 이가씨라는 특이한 성씨에 의문을 품고 80년간 자료를 추적 조사하여 자신의 조상이 정유재란 때 고니시에게 납치된 이복남의 셋째 아들인 이성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1980년 리노이에 마사후미는《찾아낸 2천년 전의 뿌리》라는 책을 출간하여 이 사실을 발표하였다. 1982년 리노이에 마사후미은 가족을 대동하고 한국에 입국하여 경주 경주이씨 이알평사당과 강릉 우계 사당과 이복남의 묘소, 남원 충렬사를 참배하여 화제가 되었다.

성소부부고

그는 교산 허균과 평소 친분관계가 있었는데, 이복남이 전사하자 허균은 그를 추모하는 장편의 뇌사를 지어 그를 추도하였다.

함께 보기

기타

그의 사위 최시환(崔時煥)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가 지은 시로 중 남원 광한루 현판에 걸려 있다.

二載登臨寒上樓 / 두 해에 걸쳐 광한루 위에 올라

故園歸夢大刀頭 / 머리맡에 큰 칼 두고 귀향을 꿈꾼다.

裳聞四海徵兵急 / 전국에 들리는 급한 징병 소식

已道三京指日收 / 이미 3경이 왜병의 수중에 있다고 하네.

末路知心黃石在 / 최후까지 황석의 병법 마음에 두었으매

暮年歸計赤松遊 / 노년에나 돌아가 신선놀음 하리라

白雲天末無消息 / 하늘 끝 흰 구름은 소식조차 없으니

傳世靑氈底處求 / 세상에 전하는 명예는 죽어서나 얻을까.

주석

  1. 숙종실록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16일(갑술) 1번째기사 / "한배주·권이진·송택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윤황·윤형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2. 성소부부고 제15권, 고(故)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書) 이공(李公)의 뇌사
  3.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1: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 이이화 지음》(한길사, 2000) 208페이지
  4.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1: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 이이화 지음》(한길사, 2000) 286페이지
  5. 8월 9일 왜적 10만 명이 남원성을 침공하여 명나라 부총병 양원 등이 이끄는 명나라 구원군이 이를 막았으나 병력 다수를 잃었다. 그러나 왜군은 5만 명이 생존했고 남원성(南原城)은 함락됐다.
  6. 숙종실록 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6월 16일(갑술) 1번째기사 / "한배주·권이진·송택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윤황·윤형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7.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5529
  8.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5436
  9. 이후 그의 후손들은 조슈 리노이에 씨(長州李家氏)로 정성(定姓)하고 일본에 귀화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국조보감
  • 연려실기술
  • 대동야승
  • 임진필록
  • 난중잡록
  • 난중일기
  • 강원도지
  • 남원 충렬사지
  • 남원잡록
  • 삼강행실도
  • 임영지
  • 금성일기

참고 자료

  • 이가원, 《李朝名人列傳》 (을유문화사, 1965)
  • 김수민, 《한국기동악부주해》(신장섭 역, 국학자료원, 1997)
  • 이덕일, 《류성룡》 (역사의아침, 2011)
  • 이순신, 《난중일기》 (허경진 역, 중앙북스, 2008)
  • 류성룡, 《징비록》 (두산동아, 2010)

외부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