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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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이규완 (1930년)
출생1862년 11월 15일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뚝섬
사망1946년 12월 15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석사리
사인병사 (중풍, 등창, 노환 등)
거주지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뚝섬→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성부일본의 기 일본 야마구치 현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성부일본의 기 일본 야마구치 현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성부 강원도 춘천군 춘천면→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 춘천군 춘천면→함경남도 함흥부경성부 청량리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춘천군 춘천읍
성별남성
국적조선의 기 조선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일본의 기 일본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기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
학력일본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 졸업
직업군인, 무신, 정치인, 농업인
종교유교(성리학)→기독교
부모이기혁(부), 유씨(모), 계모(이름 미상)
배우자본부인 이름 미상(이혼), 중촌매자(일본인)
자녀아들 이각일, 아들 이선길, 아들 이영일, 아들 이재길, 딸 이춘자, 딸 이부자, 딸 이절자
친척형 이윤필, 사촌 형 이종필, 매부 강성형, 사돈 김갑순
이규완
별명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
출생지 조선 경기도
사망지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석사리
복무 조선 병조
대한제국 육군
복무기간 1882년 ~ 1884년 12월
1905년 11월 23일 ~ 1907년 11월
근무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최종계급 조선 육군 하사관
대한제국 육군 소장
지휘 병조 조련국
주요 참전 갑신정변
기타 이력 강원도관찰사, 춘천농립고등학교장, 강원도장관, 함경남도장관, 함경남도지사, 동양척식회사고문, 강원도지사고문

이규완(李圭完, 1862년 11월 15일 ~ 1946년 12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무신, 군인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사상가였다. 그는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가 갑신정변에 행동대장 격으로 참여한 인물로, 박영효의 집사 출신이었다.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병조 조련국 소속 군사를 이끌고 수구파 대신을 척살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대왕의 왕자 임영대군의 15대손이었으나 가계는 몰락하여 그는 무학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던 중 박영효에게 발탁되어 그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1883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천거로 일본에 유학, 토야마 하사관학교(戶山陸軍下士官學敎)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했다. 1884년 12월갑신정변에 조련국 소속 군사들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일본으로 망명, 이후 망명과 귀국을 반복하다가 1907년 7월 고종 퇴위 후 사면되어 귀국했다. 이후 통위영 정령관(統衛營正領官),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과 경무부사(警務副使)를 역임했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을 살해하도록 사주받은 박영효 암살 미수범 이일직 무리를 사전에 잡아 일본 경찰에 넘겼다.[1] 이후 1907년(융희 1년) 중추원 부찬의, 수강원도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에도 강원도도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10년 10월 강원도도장관에 유임된 뒤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을 지냈으며, 1924년 사직서를 제출한 뒤 중추원 참의직과 고위직 제안을 물리치고 시골로 내려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는 조선인들도 일본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 획득론과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1924년 동양척식회사의 고문을 지냈고, 1927년 신간회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하였다. 해방후 강원도지사 고문을 지냈다. 춘천농공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이기도 하다. 춘천농공고는 1910년 4월 29일 당시 강원도 관찰사인 이규완이 초대 교장을 겸임하고, 사립 측량학교를 가교사를 빌려 1년제의 춘천공립실업학교를 개교한 뒤 그 해 9월 춘천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2] 본관은 전주이고,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이다.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이다.

생애

초기 활동

출생과 초기 활동

이규완은 1862년(철종 13년) 11월 15일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와 행상을 하던 이기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혁은 임영대군의 14대손이었지만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와 행상 등으로 생계를 영위했다. 본적지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였다. 한성 뚝섬의 나무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배우지도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3] 이규완은 조선의 제4대 국왕 세종대왕의 7남 임영대군의 후손이었지만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기에 집안 배경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다.

어려서 어머니 유씨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소년기 때는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의 숙부 집에서 거처하다가 다시 상경, 박영효 가문에 출입하다가 그의 식객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가 박영효 집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그의 수하에 들어가면서 개화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이규완보다 불과 한 살 위였지만 철종의 사위로 당시 이미 촉망받는 젊은 관료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무학이었는데, 박영효가 특별히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4] 글을 가르쳐 일본으로 유학까지 보내주었다. 이후로 그는 평생에 걸쳐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한다.

일본 유학 선발

박영효

1883년(고종 20년) 1월 청나라에 파견되어 기기(機器,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그해 3월 귀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아문일기에 의하면 "이 해에는 이규완, 김완식(金完植), 김학승(金學升)이 기기를 배우게 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보냈다.[5]"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다녀온 그는 다시 일본에 가보고자 박영효에게 거듭 간청하여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규완은 박영효서재필 등의 추천과 후원으로 1883년(고종 20년) 4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박영효서재필은 이규완의 추천장을 써서 조정에 제출하여 그의 일본 유학 자격을 얻어 주었다. 김옥균에게서 학비를 받은 그는 1883년 4월 서재필, 서재창 등 61명의 관비유학생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토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그때 같이 공부하던 아홉 사람의 이름은 지금은 다 기억할 수 없으나 생각나는 이가 이규완인데 그 사람은 박영효집 사람이었고, 그 다음이 강원도 사람으로 임씨가 일본 생도를 공중들어 집어던지던 생각이 어렴풋하게 이억되는데, 그 이가 기운이 장사라고 하던 것이 어제같이 생각이 된다. 그 밖에 정씨, 박씨, 조씨 등은 성만 기억이 될 뿐이다.

이 호산하사관학교에 아홉 사람이 입학한 것도 김옥균이 일본 사람 후쿠자와 유키치(게이오 대학의 창설자)의 소개를 얻어서 된 것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역시 후쿠자와의 소개로 각각 다른 학교에 입학이 되었다.[6]
 
— 서재필의 회고담

이규완은 각축(脚蹴), 즉 택견의 명인이었다. 몸놀림이 빠르고 성격이 성실해서 박영효의 호신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7]

1883년(고종 20년) 5월 이규완은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다. 이때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8] 한편 노론 명문가의 자제임에도 자신들에게 무예를 배우는 점과 신분과 배경에 연연하지 않는 서재필에 감격하여 그와 친구가 된다. 1884년 2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군사 훈련 수료

1884년(고종 21년) 3월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장을 받고 바로 일본육군 하사관을 교육하는 도야먀 육군하사관학교(戶山陸軍下士官學敎)에 서재필, 정란교, 서재창, 신응희 등과 함께 입학,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후에 개설된 조선 병조 조련국의 사관생도는 이때 일본의 호산(戶山) 학교 등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신복모 서재필,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을 비롯한 14명이었다.[9] 6월 28일 귀국 직전에 별군관에 임명되었고,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의 교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옥균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10] 김옥균은 개화파 청년들의 한 부류를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제도와 관련된 실무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군 계통의 유학은 1883년 이들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이들 유학생들은 학자금이 점차 바닥이 나 1년 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0]

1884년 7월 그는 일본 토야마 하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더 유학하며 견문을 익히려 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귀국 요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 무렵에 박영효광주부유수로 있으면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사관생도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을 귀국시켜 신식 군대의 양성에 착수할 계획을 세웠다. 인원은 600여 명이었다.[11] 1884년 7월 토야마 하사관학교 수료와 동시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병조 소속 무관으로 근무하며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정변 직전 그는 김옥균 등과 갈등하였다. 그에 의하면 '김옥균과 박영효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한다. 이규완 역시 김옥균을 가볍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김옥균을 가볍게 보았는데, 나중에야 재능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귀국과 갑신정변

귀국 직후

조련국 교관이 된 후 그는 박영효의 집에서 나와 독립하였다. 이후 그는 조련국 교관으로 병력 훈련을 맡아보았다. 박영효는 서울에 둔 일부 병력을 골간으로 하고 해산당한 훈련도감군과 지방 청년 1천여 명을 모아 별군영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조직하였다.[12] 사관학교 출신인 신복모가 별군영 대장직을, 이규완은 별군영 별동대 대장직을 맡았다.[12] 그는 조련국의 교관으로 별동대장을 겸임하였다.

1884년 8월 그는 박영효로부터 거사가 있음을 전달받고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러나 박영효는 그를 불신하였다. 9월 5일 남행부장에 임명되었다. 1884년 11월 4일 김옥균의 집에서 열린 비밀 회합에 참여하였다. 김옥균 등의 거사 계획이 누군가에 의해 누설되자 11월 4일 개화파 일파는 김옥균의 집에 모여서 비밀회합을 하였다.

김옥균은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이 세가지 안을 놓고 토의하고 있는 중에 대궐에서 급사가 왔다. 급사는 국왕이 즉각 김옥균을 참내하도록 내린 어명을 전했다. 김옥균은 황급히 대궐로 향했다.[13] 이들은 왕이 김옥균을 부른 것은 '아마 임금께서 당시 변란의 풍문을 듣고 근심하던 끝에 김옥균을 불러 그 뜻을 타진하시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13] 김옥균이 입궐한 사이, 회의 끝에 제1안인 우정국 창립 기공식 때 대신들을 불러서 척살하기로 하고, 서재필과 이규완, 윤경순, 윤경완은 각각 부대를 맡기로 하고, 서재필을 총지휘관으로 정한다.

결정을 한 후에 개화파는 평소부터 향성해둔 이규완, 임은명, 정란교, 이인종, 윤경순 등의 사관생도와 그밖의 장사패 수십 명을 지휘하여 연일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 구입 등에 착수하여 제반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13] 그는 구 훈련도감 군사들을 모으는 한편 장사패와 기타 청년들을 동원하였다.

갑신정변 전후

김옥균 등과의 갈등
서재필

한편 김옥균박영효는 그를 불신했다고 한다. 김옥균서재필을 시켜서 그를 시험하였다. 후일 이규완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는 대안동에 사는 서재필이가 대단히 반기면서 내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우리 오늘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였다.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남의 집 청지기양반집은 대청이나 간신히 올라가지 방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때였는데, 이게 별안간 꿈도 같고 취중도 같았다.[14]"한다.

이규완에 의하면 "그러나 절에 간 색시처럼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였다. 저녁이 파한 뒤에 여러 가지 시국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내 손목을 다정하게 쥐더니 "여보, 우리가 개혁을 하는데 사람을 죽이고 여러 가지 희생을 낼 것이 꼭 한 사람만 죽여 없애면 일이 저절로 되게쓴데, 이런 좋은 일을 두고서 못하니 이런 원통한 일이 있소?"라 하였다. 내가 물으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민영익이지요. 지금 사대당이 수효는 많지만 그까짓 것들 다 무덤 속의 마른 뼈지, 무슨 근심이 있겠소. 그러나 민영익이만은 그 중에 제일 세도가요, 또 신진 정예이니 그놈이 제일 무섭지 않소. 그놈만 죽여 없애고 보면 큰일은 대번에 성공하겟으니 노형이 이 일을 한번 하겠다면, 내가 일본서 돌아올 때 일본에서도 유명한 보검을 한 자루 사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큰 용기를 내보시겠소? 노형 혼자만 희생할 결심을요." 이런 말을 하면서 자기집 벽장에서 일본도를 한 자루 내놓았다.[15]" 한다.

당초 이규완은 서재필의 제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칼을 보니 애국심과 의기가 쭉 내비쳤다. 그만 달려들어 그 칼을 빼서 들고 당장 일어나면서 "여보, 그까짓 것 내가 하겠소. 오늘날 국가의 중대한 일은 사람 둘만 죽이면 된다고 하니, 내가 그까짓 것을 못하겠소. 내 당장에 가서 민영익이 목을 베고, 이 이규완이도 그자리에서 죽을 테니 걱정 마시오."하면서 칼을 끌고 대청을 뛰어나갔다. 그러자 그는 황황해서 쫓아 나오며 "여보, 잠깐 들어오구려. 남의 말이나 똑똑히 듣고 가구려"하며 한사코 방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더니 내 두 손목을 꼭 붙잡고 하는 말이 "여보, 장군님. 용서하시오.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은 장군님의 담용을 시험해 보느라 그리 하였으니 용서하시오."하기에 "예, 여보, 다시는 그런 장난 마시오."하고 말을 마치고 칼을 도로 주었다.[15]'한다. 이규완은 김옥균이 자신을 시험한 것으로 눈치챘다. '이튿날 김옥균의 집에 갔더니 김이 버선발로 쫓아나와 나를 맞이하면서 "이 장군님, 이 장군님"을 계속 부른다. 가만히 눈치를 보니 어젯밤 서재필의 연극은 김이 시킨 것이 분명하였다.[15]' 한다.

갑신 정변 직전

12월 2일 새벽 1시경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이때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신중모(申重模), 임은명, 김봉균(金鳳均), 이은종(李殷鍾),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새벽 2시경에는 서재필이 도착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 만일 그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16]

이때 12월 4일 거사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작정되었다.[16] 12월 2일 새벽 그는 별궁에 방화와 한규직 처치 임무를 부여받았다. 별궁에 방화할 사람은 연장자인 이인종의 지휘 하에 이규완, 임은명, 윤경순, 최은룡의 네 사람이 실행하기로 했다. 이때 변수에게 포대 수십 매를 만들도록 해서 이 포대를 서광범의 집 남쪽 뜰 안에서 어두컴컴한 때를 타서 별궁 담에 월경시킨 후 별궁정전 안에 쌓기로 하였다.[16] 이규완은 변수, 서광범과 함께 기름과 포대자루를 별궁 바로 건너편인 서광범의 집으로 옮겼다.

실행할 담당자는 요인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배정하되 한 사람은 단검을, 또 한 사람은 단총을 가지기로 했다.[17] 민영익은 윤경순, 이은종 두 사람이,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 두 사람이 담당키로 했다.[17] 이어 그는 화약의 일부를 당일과 12월 3일 저녁과 새벽 사이에 일부를 궁궐 안으로 반입하여 궁궐 마당안에 묻어두고, 덮은 뒤에는 발로 다진 뒤 석유와 기름을 뿌려두었다.

1884년 12월 4일 8시경 이규완은 윤경순별궁에 방화하였다.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한 별동대 이규완과 윤경순 두 사람은 이날 오후 8시경에 별궁 뒷문에 이르러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자물쇠가 튼튼하여 깰 수가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간신히 깨뜨리고 들어갔다. 곧 폭발되기 쉬운 연료들을 모아놓고 횃불을 올렸다. 불꽃이 큰 소리를 내고 튀었으며 금세 불바다를 이루었다.[17] 서재필과 함께 일본 군사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함께 귀국한 그는 궁정 쿠데타에서 행동대장 서재필을 도와 요인을 제거하는 무력을 행사했다.[18]

갑신정변
우정국 낙성식 좌석 배치도
(홍영식과 박영효가 중앙, 그밖에 좌우로 좌측은 김홍집, 스커더 홍콩영사, 전승균, 이조연, 목인덕, 담경지 청국공사, 민영익, 한규직, 우측으로는 푸트 공사, 윤치호, 스기무라 일본공사, 김옥균, 일본 통역, 민병석, 진수당 청국공사, 아주돈 영국영사 순)}}

12월 4일 저녁 갑신정변 직전 우정국 낙성식장 입구에 숨어있다가 민영익을 습격하였다. 우정국 정문 입구에 서재창이 이끄는 분견대와 이규완이 이끄는 분견대가 숨어있다가, 민영익우정국 낙성식장에 들어갔다가 담배를 피우러 나왔을 때 서재창에게 습격당해 오른쪽 눈이 찔렸다. 눈이 찔린 민영익은 피투성이가 되어 우정국 안으로 들어왔다가 뭴렌도르프에게 업혀서 우정국을 나갔다. 정문에 숨어 있던 이규완은 민영익을 습격, 그의 한쪽 귀를 잘랐다. 다시 한번 민영익을 찌르려 칼을 휘둘렀지만 민영익은 피했고, 사격을 가했으나 역시 맞지 않았다.[19]

우정국 연회장이 한창 혼란했을 때 이규완과 최은종 두 사람은 칼을 빼어들고 우정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이놈!"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두 사람은 그가 동지인 듯하여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는 김옥균집의 평민 집사 김길로 "예, 저는 김옥균 선생집 하인으로 오늘 저녁 연회에 조력하러 온 김길(金吉)이올시다."라고 대답했다.[20] 떠들썩했던 연회장은 수라장이 되어 아무도 없는 텅빈 집이 되었다. 이규완 일행은 박영효의 집으로 모인 다음, 그 다음 지휘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20]

12월 5일에는 경우궁 소중문에 매복해 있었다. 경우궁 입구에 와서 왕과 왕비를 만나려 했던 좌우영 지휘관들이 모두 서재필, 박영효에게 가로막혀 나왔다. 먼저 윤태준이 거절당하고 나왔다. 윤태준이 먼저 나가기를 청해 밖으로 나왔다. 윤태준이 소중문 밖에 나서자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이규완, 윤경순에게 일격지하에 처치되고 말았다.[21] 그는 윤태준의 시신을 근처로 빼돌려 다른 영장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조연한규직김옥균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 했으나 김옥균 역시 박영효처럼 빨리 돌아가 각 영병을 데리고 와서 호위의 중임을 완수하도록 하라고 했다.[21] 이조연은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 안에 들어가기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경우궁 뒷문으로 나아갔다.[21] 경우궁 정문에서 이조연한규직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이규완은 자신의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경우궁 정문에 배치해두고, 일부는 직접 인솔하여 경우궁 후문으로 갔다. 막 문에 나아간 한규직과 이조연은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에게 타살당했다.[21]

정변 실패 직후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입궐하는 민씨 대신들과 친민씨 일파를 살육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고, 이규완을 비롯한 정변의 주역들은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12월 7일 청나라군이 덕수궁에 도착하여 왕을 내놓으라 하였다. 양쪽이 충돌하자 왕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에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가려다 도중에 각자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22] 홍영식, 박영교 및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향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이규완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22]

국왕을 보낸 후 일본영사관 중대장 무라카미는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전위로 해서 다케조에 공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란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세우고 행진하였다.[23]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들어갔다.[24] 피신해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등과 몇몇 개화파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쳤다.[25]

정변 실패 직후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궁궐을 빠져나간 그는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변수 등과 함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일본 공사관에 일시 피신했다가, 인천에 정박중인 일본 선박 천세환(千歲丸)에 승선하였다. 이때 뭴렌도르프인천까지 추격하여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일행에게 당장 천세환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일행과 함께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천세환 선장인 스치 가츠자부노우(十勝三郞)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없음을 나무란 뒤, 일행을 석탄 창고에 숨기고 그런 사람은 잠입한적이 없다고 하여 되돌려보냈다.

이규완과 일행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승선 거부에 망연자실하였다. 이때 일본인 선장이 다케조에에 맞서 이들을 배에 태웠다.[26]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망명 생활과 정치 활동

1차 망명 생활

망명 생활 초반

일본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서전에서 배의 선원 쓰지 후치주로(十藤十郞)가 나가사키에서 김옥균 일행과 헤어질 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회상했다.[27] 스치 후치주로는 이들이 조선 이름으로 생활하다가 자객에게 발각될 것이라 하여 이들에게 기념으로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신들이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면 조선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기념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27]

그리고는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雄三)라고 지었다고 한다.[27] 이 때의 사정이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서전에 기록돼 있다.[27]

망명 후에는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에 체류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2년여 기간 동안 머무르기도 했으며, 이 무렵 조선 정부 측 자객 이일직(李逸稙)을 잡아 일본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4]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그곳에서 모두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淺田良), 정난교는 나카하라(中原雄三), 유혁로는 야마다(山田唯一) 등으로 개명한 것이다.[28]

망명 초반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네 사람은 숙소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행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29] 서광범은 그의 13촌 조카뻘인 서재필이 시중을 들게 됐다. 한편 이규완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집안과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아랫사람 처럼 다루고, 수발, 시중을 들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분개하였다. 그는 이런 것이 계급, 사상, 나이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행태냐며 불만을 토해냈다.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29] 결국 상류층 혹은 윗 사람 수발을 드는 일은 폐지되고 각자 별도의 자기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886년 일본에 남겠다는 김옥균과 헤어져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그는 농장과 밭일을 다녔다.

일본 체류 생활

박영효가 돌아간 뒤 1년간 더 미국에 체류하며 노동으로 생활하다가 1888년 그도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효의 거처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일본 체류 중 그는 정난교박영효의 토론 상대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 1월 귀환한 박영효는 이후 건백서를 작성하여 고종에게 보낸다. 일설에는 그가 단순한 박영효의 경호만을 담당한게 아니라, 박영효의 정치담론 토론 상대였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박영효일본에서 영어 학습을 시작으로 서양의 철학과 기독교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이런 배경이 건백서의 내용에 반영된 것은 물론이다. 이런 글을 남기기 위해서 박영효의 주위에는 그의 수하였던 정란교, 이규완을 비롯한 이른바 토론 그룹이 있었을 것이다.[30]"라는 것이다.

1889년 8월 14일 병조의 병비에서 특별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하였다.[31] 그러나 그는 취임을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그의 부사용직은 한달 만에 면직 조치되었다.

1892년 4월 민씨 일파인 민영소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은 무역상으로 가장해 일본에 들어왔다. 이일직은 김옥균, 박영효, 정난교, 이규완, 유혁로 등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인사들에게 접근하였다.[32] 이일직의 최종 목표는 개화 망명객의 우두머리인 김옥균박영효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이일직은 금전적으로 궁핍한 이들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32] 그러나 이규완은 이일직의 호의를 의심하였고 그의 돈을 대부분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 망명객의 신분으로 대우받으며 독서와 토론, 담론하는 다른 망명객과 달리 그는 홀로 체력을 단련하였다.

본국에 있던 그의 처는 갑신정변으로 연좌되어 노비가 되어 헤어졌다. 그는 야마구치 현에서 만난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 중촌매자)와 만나 결혼하였다. 나카무라 우메코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풍습에 따라 이씨로 성을 바꾸고, 한국식 성과 이름을 따서 이매자(李梅子)라 하였다. 중촌매자의 집은 양잠을 하였으며, 그는 처갓집에서 양잠업을 도우면서 생활하였다. 중촌매자와의 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다.

조선 정부 자객 적발

이일직김옥균과 그의 일행이 고베를 떠나는 것을 본 후, 오사카로 돌아가서 소네자키 무라에 있는 그의 애인의 집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외국인 옷을 입었다.[33] 1894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암살대원 중 한 사람인 홍종우김옥균의 암살에 성공한 뒤, 홍종우의 일행이었던 이일직은 무사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일본가와쿠보 주네기치(川久保常吉)를 매수하여 박영효의 은신처를 알아낸 뒤 암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첩자의 파견을 예상한 이규완에 의해 적발되어, 권동수(權東壽)는 친린의숙에 감금당하고 주동자격인 이일직 등은 일본 경찰에 넘겨진 뒤 일본에서 추방당했다.

1894년 3월 25일 이일직은 다시 도쿄에 와서, 사쿠라다, 홍고 지역에 있는 호텔 무라이 칸에서 가와구보를 만났고, 이때 양인은 당분간 하숙하였다. 이일직과 가와쿠보는 이때 박영효, 정란교 그리고 이규완을 이 호텔로 유인해서 그들을 없애는 절차를 수행하자는 것은 이일직의 계획이었다.[33] 그러나 그들을 그 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듭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33] 조선 정부에서 자객을 보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한 이규완은 박영효 등에게 신변에 각별히 신경쓸 것을 주문했다.

이일직 등은 박영효서예를 잘 하고, 서화와 서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 박영효의 별실에서 휘호를 쓴 뒤 박영효가 품평을 하게 하는 사이에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일직 등은 가와쿠보를 매수하여 박영효가 투숙하고 있는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알아내고, 김태원(金泰元) 등을 보내어 박영효를 유인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이 가와쿠보 주네키치이일직 등과 접촉하는 것을 알리면서 계획이 누설되었다. 권동수 형제는 권총일본도를 휴대하고 운래관(雲來館)에 대기하고 이일직이 직접 박영효를 방문,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경계하던 이규완과 정란교에 의해 적발됨으로써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규완과 정란교는 이일직이 박영효, 김옥균 및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려는 계획에 몰두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시인을 받아냈었다. 이규완은 이에 대해 박영효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들과 논의하는 즉시, 이일직을 반초에 있는 기숙학교로 소환해서 그 곳에서 심문하기로 결의했다.[34]

이규완은 박영효3월 29일에 다른 곳으로 간다는 소문을 내고, 이일직에게도 3월 29일에 박영효가 떠나니 그 전날 초등학교에서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3월 28일 새벽 이일직도쿄 측지의 박영효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박영효는 이미 몸을 피하여 집에 없었다. 이일직은 곧바로 그리 멀지 않은 친린의숙으로 갔다.[35] 그곳에서 이일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규완과 정난교는 이일직을 붙잡았다.

자객 유인과 역납치

3월 25일 그는 이일직을 초대하였다. 그러나 거듭된 초대에도 불구하고 이일직은 오지 않았다. 박영효와 협의하여 이일직을 유인하기로 계획한다.[34] 이규완은 김태원을 시켜 이일직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는데, 이 편지에 박영효는 이일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박은 29일 순회 여행을 떠날 계획이므로 이일직이 28일 아침 열 시까지 학교로 나와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36] 이일직은 그를 의심한 이규완과 정난교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경솔하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였고, 실행 직전 사전에 발각된다.[37]

이일직은 도쿄지방법원에서 "역적으로 해치려고 한 것은 누구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이선호 외 6명이다."라고 답하였다.[38] 이일직에 의하면 "머리를 깎고 3월 24일 도쿄에 온 것은 박영효, 정난교, 유혁로, 이규완, 이선호 외 5인의 목과 손목을 잘라 그것을 가방에 넣어 권동수, 권재수에게 들려서 귀국시키고 나는 상하이 쪽으로 갈 목적으로 그랬다.[39]"고 했다. 재판 경과와 내용은 지지신문 1894년 6월 20일자로 보도되었다.

3월 28일 그는 포박, 감금한 이일직에게 일본에 온 목적과 배후를 캐물었다. 이때 그는 다리미로 이일직을 고문했는데 이 일로 그는 '무력 감금, 폭행, 고문 수사[34]'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일직은 3월 28일 아침에 기숙학교로 가서 그 집의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이규완과 정란치를 만났으며, 이들은 두 가지 질문을 한 뒤 이일직을 붙잡아서 대마끈으로 손과 발을 묶었다.[36] 이규완은 이일직의 얼굴을 지짐 인두(히바스키) 다리미로 때리고 코에 상처를 냈다.[36] 곧 이규완은 경찰을 불렀지만 고문 행위가 드러나 정란치와 함께 체포, 투옥되었다.

재판과 석방

6월 27일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이일직은 다시 도쿄 지방법원살인 미수 혐의로 회부되었고, 이규완 역시 정난교 등과 함께 이일직 감금, 고문,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도쿄지방재판소6월 28일 김옥균 살해 혐의와 박영효 등에 대한 살해미수 혐의 등으로 사형이 구형되었던 이일직과 무기 구형의 야쿠보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40] 오히려 이규완, 정난교에게는 이일직을 불법 감금, 구타한 혐의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40]

1894년 7월 16일 박영효를 암살하려던 이일직은 다시 도쿄 지방법원에 살인미수 혐의로 다시 회부되었다.[41] 동시에 이규완 역시 이일직을 구타하고 다리미로 살을 지져 고문한 혐의로 법정에 회부되었다.

전술한 사실들은 증인 김태원, 류 카쿠로, 시바 신로, 이토가와 긴지, 그리고 심판관 마츠다 진지로 등에 의해서 이일직, 가와구보 주네기치, 그리고 다른 여섯 명의 피고들이 예심에서 했던 선서문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이 사용했던 대마끈과 지짐인두 다리미가 현장에서 발견되어 제시됨으로써 명백히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일직이 박영효, 이규완, 정란치를 살해할 의도로, 문제의 날에 신린-기주쿠로 갔었다는 것, 그리고 피고 이규완과 정란치는 그들의 생명이 현저한 위험 상태에 있지 않은 시점에서 이일직을 불법 포박하고 그를 고문 수사토록 했으며, 전자는 그를 폭행구타하는 정도로까지 범해 약간의 상처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고들은 그 후 이일직을 풀어주었으나 박영효의 지시에 따라 그를 여전히 방에 감금했다. 법에 의하면 두 피고(이일직, 가와구보)의 행위들은 일본 형법 223, 104조에 특별 규정들에 상응하고 있는 한편, 이규완이 범한 폭행구타와 상해는 동법 324조와 301조의 마지막 조항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관련되는 특정의 정상 참작도 있으므로 그들의 처벌을 동법 89조, 90조에 의거 두 단계 감형될 것이다.[36]

이어 '박영효, 박정길, 지오 료준에 해당되는 이일직 포박 및 고문 수사 혐의는, 이일직을 불법 구금했다는 류소만의 혐의와 마찬가지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 3인은 형사소송법 236, 224조의 규정들에 의거, 유죄로 선고받지 않게 됐다.[42]'며 박영효 등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규완은 징역 40일형과 2엔의 벌금형이 부과되었다. 최종 선고에서 '피고 이규완과 정란치는 한달 10일간의 구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외에도 2엔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피고 박영효, 박정길, 지오 료준은 유죄가 아니므로 석방될 것이다.[42]'라고 구형되었다. 이 소송에 들어온 검사는 이일직과 가와구보에게 내려진 판결에 불복, 법원의 판결이 발표된 그 날로 고등법원에 항고했다. 이규완과 가와구보 역시 선고에 불복, 즉각 동경 항고법원에 항고했다.[42]

귀국 직후

이준용

1894년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구성되어 갑오경장을 단행하면서 박영효와 함께 10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 통위영 정령관(統衛營正領官)이 되고 곧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으로 발탁되었다. 11월 13일 박영효가 복권되면서 그도 복권되었다. 11월 13일 고종은 금릉위 박영효의 직첩을 되돌려주고[43], 아울러 갑신정변에 관련되었던 대역죄인들도 모두 사면한다고 선언했다.[44] 이미 국내에 잠입해있던 서광범, 이규완, 정란교 등은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44] 12월 10일 3품으로 승진하여 경무관이 되었다.

김학우 암살 사건이 터지자 박영효의 집사 출신 이규완(李圭完)이 체포와 수사를 맡았다.[18] 흥선대원군동학군이 손잡고 민씨 정권 타도를 계획하자 그는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했다. 1895년 3월 23일 경무관 이규완이 지휘하는 30여 명의 순검은 지체없이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을 덮쳤다. 대원군은 이규완의 말을 듣고 진노하였다.

이런 못된 것이 다 있나.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궁내부종정경이 무엇이 답답하여 역모를 꾀한다더냐. 너희는 종정경이 주상과 숙질간임을 정녕 모르느냐? 당장 물러가렸다.[45]

이규완은 물러서지 않고, 흥선대원군에게 김학우를 암살하고 개혁당을 일망타진하려 한 자가 이준용이라고 대들었다. 이규완은 대원군 부부가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두들겨 패면서 포박했다.[46]

시생은 어명을 시행하고 있사옵니다.[45]
네 이놈, 뉘 앞에서 그따위 터무늬없는 말을 입에 담느냐. 당장 물러가지 못할까![45]

그는 즉시 '대역부도의 죄인이니라, 당장 끌어내어 포박하렸다.[45]'라고 명하였다. 대원군의 격노도 왕명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45] 경무관 이규완의 일갈이 있자 순검들은 지체없이 이준용을 끌어내어 포박했다.[45] 그는 이준용에게 김학우 암살 혐의와 개화파 암살 미수 혐의를 말하고 체포해갔다. 4월 1일 경무관 칙임관 2등에 임명되었다.

춘생문 사건

제1차 갑오 개혁 당시 그는 박영효, 서광범 계열의 개혁 관료로서 활약하였다.[47]

그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의 왼쪽 귀 하나를 일본도로 쳐서 끊어냈던 실력을 인정받아 경무청 순사로 임명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직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신임주조선공사로 부임하자 특별히 경무청 경무부사(警務副使)로 발탁되었다. 가끔 입궐, 퇴궐시에 그를 마주치게 되면 송병준이완용에게 "불알 잘 간수하시오. 저 검은 옷 입은 저 순사가 누군지 아시오"라고 농담하였다 한다.

1895년 7월 6일 춘생문 사건 직후 내부대신 박영효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임되었으며, 경무사 이윤용은 경무관 이규완, 최진한과 더불어 내부의 제청으로 해직되었다.[48] 그해 7월 박영효명성황후를 암살하려 했다가 유길준에 의해 폭로된 박영효 반역사건으로 박영효가 망명하자, 그도 친러파의 거듭된 탄핵을 받다가 1895년 말 일본으로 다시 망명해야 했다. 이번 2차 망명에서는 12년의 세월이 흐른 1907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2차 망명 생활

왕비 암살 미수와 도피

1895년(고종 32년) 7월 박영효와 함께 왕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박영효는 왕후의 권모와 계략을 두려워 하여 암살을 감행하지 않으면 화근을 근절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895년 7월 마침내 날짜를 잡아 계책을 정하고 일본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49] 이어 7월 6일 박영효, 우범선과 함께 왕비 암살을 계획하였다.

7월 5일 신응희, 이규완, 우범선 세 사람은 박영효와 상의하여 왕궁 수비 교체를 구실삼아 실력 행사로 대세를 만회하려 했다.[50] 그들은 7월 5일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은밀히 계획을 짜고, 그 다음 날인 7월 6일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일본인 사사키(佐佐木某)가 그 내용을 상세히 탐지해 한재익(韓在翼)에게 필담으로 누설시켰다.[50] 한재익은 사사키와의 필담을 적은 종이 수첩을 가지고 특진관 심상훈에게 급히 보고했고, 심상훈은 7월 6일 입궐해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50] 고종은 그날 밤 전 총리대신 김홍집을 대궐로 불러들여 지시를 내렸다.[50]

7월 6일 수배령을 받았다. 고종은 즉시 "법부는 실상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엄히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51]"고 지시했다. 이때 경무사는 이윤용이었다. 고종은 박영효를 비밀리에 잡아들이라고 이윤용에게 명했다.[51] 이윤용은 박영효를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즉시 대궐을 물러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몰래 뒷담 쪽으로 이웃인 박영효를 물러냈다. 그리고는 오늘 밤으로 그를 잡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빨리 도망쳐 큰 화를 면하라고 재촉했다.[51]

1895년(고종 32년) 7월 6일 저녁 박영효의 호출을 받고 신응희와 함께 달려간 이규완은 즉시 변복하고 도피를 계획하였다. 7월 7일 경무청 관리가 박영효의 집 대문 앞에 다다랐을 때는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작은 증기선에 올라 행주산성 밑으로 돌아 인천으로 향하였다.[51] 신응희, 이규완 등도 함께 박영효의 뒤를 따랐다.[51] 이규완은 신응희, 박영효와 함께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성을 빠져 나와 용산에서 기선 을 타고 도주하였다.[49]

2차 망명
친필 휘호, 1918년 1월 1일

박영효는 심복 이규완을 데리고 한강으로 나가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를 거쳐 7월 8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52] 1896년 1월 처가가 있는 야마구치 현에 정착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했던 그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5년 12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망명 생활 초반 조선 사회에 환멸과 염증을 느낀 그는 도쿄(東京), 야마구치(山口), 후쿠오카(福岡) 등을 방황하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고로 야마구치 현(山口縣) 하기 촌(萩村)에 체류하며 잠업 강습소에 입소하여 잠업 기술을 배웠다. 이후 그는 양잠업에 종사하면서 양잠 기술을 익혔고, 후쿠오카 현에서는 기계업에 종사하며 기계 수리 방법과 기계 설계, 제도 기술을 배웠다. 이규완은 망명 기간 동안 박영효의 경호원 격으로 근무했으며, 박영효와 개화당의 귀국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서 공작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

1898년 8월부터 안경수윤효정의 방문을 받았다. 1898년 가을 안경수윤효정은 유세남, 이규완, 우범선, 구연수, 황철 등 망명자들을 만나, 독립협회가 자금을 보내 망명자들의 귀국을 촉구하고 있는 문제를 논의, 일본에 사람을 보내기로 결정한다.[53] 박영효는 "가서 죽을 필요는 없다."며 인원 파견에 소극적이었다.[53] 그는 자청해서 조선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결국 황철과 이규완이 독립협회 응원을 위해 서울에 가기로 했다.[53]

고종 축출 기도

독립협회 지원 활동

1898년(광무 1년) 10월 일시 귀국하였다. 그는 한성부의 일본인 거류민 지역에 숨어 있으면서 최정덕 등과 연락하였고, 윤치호에게도 사람을 보내 박영효의 귀국 운동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처리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로부터 개혁의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898년 11월 9일 개화파독립협회의 지원 요청을 받고, 황철과 함께 독립협회 지원 시위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규완과 황철은 11월 9일 후쿠오카 현의 몬지 항을 출발하여 인천에 상륙, 서울에 무사히 들어가 진고개 일본인 여관에 투숙했다. 여관으로 오세창, 윤치호, 고영근, 이승만 등이 찾아왔다.[54] 그는 서울 시내에서 4~5천 명의 군중 앞에서 연설도 한 뒤 일본으로 무사히 돌아갔다.[54] 12월 박영효의 최측근이었던 이규완이 몰래 귀국하여 과격 투쟁을 선동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55] 11월12월 그는 대한제국에 잠입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박영효대통령에, 윤치호부통령에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 직원에 의해 사전에 유출되어 정변 기도는 무산되고 만다.

고종 폐위계획 미수

1898년 10월부터 이규완은 황철, 강성형, 윤세용 등 박영효 추종자들과 일본에서 몰래 귀국하여 진고개에 잠복, 일본 공사관측이 제공하는 자금으로써 친위대 소속 군인 150명과 자객 30여 명을 규합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박영효를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56] 10월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11월 9일 다시 국내에 입국하여 독립협회를 지원하였다.

1898년 11월 이규완은 황철, 강성형 등을 중심으로 황제 폐위와 박영효 추대 운동을 추진했다.[57]

이규완은 이승만을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로 박해받던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민권 운동을 탄압하는 조선에서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였다. 이규완은 이승만을 곧 고종 폐위 운동에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이승만은 이규완을 찾아가서 타국에 의탁하는 길을 부탁하고 이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언급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강성형과 대질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없다고 극구 꾸며대기에 바빴지만 역명(逆名)에 이름이 든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서 자신의 거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은 극히 해괴하온 바.[58]
 
— 1899년 1월 11일자 경무사 이근용의 법무부 대신 이도재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이승만은 이규완 등을 만나 자신의 향후 거취를 상의하는 등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59] 그러나 불행히도 이승만까지 참여, 지원했던 박영효 일당의 쿠데타 음모는 포섭 대상이었던 친위대 장교들의 고발로 사전에 누설,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58] 이들의 정변 계획은 12월말에 발각되었다.

일망타진된 박영효의 추대 음모자들 가운데 이규완의 매부인 강성형과 박영효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했던 윤세용의 공초에서 이승만의 이름이 토로되었고, 이승만도 곧 체포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1899년 1월 11일 체포되었다.[58] 한편 이규완은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경성을 탈출, 배편으로 다시 일본으로 귀환, 박영효 등을 만나고 야마구치로 되돌아왔다.

3차 망명

대한제국 육군 소장 시절 (1905년)

1899년(광무 2년) 1월 다시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1904년 3월 25일 대한제국 경성부를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일본에 망명중인 유길준, 이준용, 박영효 등에 대한 사면, 석방을 건의할 때 이규완의 사면, 석방도 건의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절했다. 이토 방한 중 고종은 일본 측과 내밀히 일본에 체류하는 망명자 처리 문제를 논의하여 "이준용,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조희문, 권동진, 구연수, 정난교, 이규완, 신응희 등 14명은 중범으로 용서해주는 것이 어려우며 그 밖의 자들은 귀국하면 각기 죄에 따라 관대히 처분할 수 있다.[60]"고 밝혔다.

1902년(광무 5년) 12월 4일 충청북도관찰부 주사(忠淸北道觀察府主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면직되었다.

고종일본특사 이토 히로부미1904년 3월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61] 고종이 지명한 요인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이행하지 않았다.[61]

1905년(광무 8년) 11월 18일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일본 망명객의 신분으로 고종에게 조약 체결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서재필에게도 불법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1906년 3월 3일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발탁되어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62]

관료 생활

귀국과 관료 생활
이규완

1907년(광무 10년) 3월 11일 일본을 방문한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참석했다가, 7월 10일 귀환하였다.[63] 1907년(융희 1년) 7월 고종이 퇴위하자 사면령이 내려졌으며, 충청도 관찰사직에 임명되었지만 거절했다. 그해 11월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이후 지방관의 물망에 여러 차례 거론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이 짧음을 들어 여러번 스스로 사양하였다.

1907년 귀국한 뒤로는 그동안 그를 보호해 준 일본에 의해 관료로 임용되었고, 맡은 바 역할을 다하며 여생을 보냈다. 귀국 이후 다른 일본 망명객들과 함께 통감부의 지원을 얻어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4]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이규완은 '나는 문맹이므로 지방 수령 직은 적당치 않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무식을 염려하는 모양이나, 만약 그대와 같이 서류를 볼 줄 모르는 무식이라면 보좌관을 두고서 결재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며 끈질기게 강권하였다. 결국 그는 1907년 11월 7일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부임하고 칙임관3등(勅任官三等)에 서임되었다. 강원도관찰사가 되면서 겸임 중추원 찬의(中樞院贊議)에 임명되어, 1910년 10월 1일까지 중추원찬의를 겸하였다.

강원도 관찰사였던 이규완은 관찰사의 집무실을 비롯한 집안 도처에, 그리고 측간 속까지 어망틀을 들여놓고 자신을 비롯하여 자녀, 자부들로 하여금 잡념이 생길 때마다 어망의 매듭을 맺도록 하여 고통스러운 여가를 생산적으로 승화시켰다.[64] 12월부터는 시탄회사(柴炭會社)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 시절

강원도 관찰사 재직 중에도 그는 해가 긴 여름날 퇴청하면 촌부차림으로 손수 지게를 지고 일하였다.[65] 언젠가 나무하러 가는데, 행군하던 수비대 병사들이 앞다투어 배낭을 벗어 이감사의 지게에다 얹었다. 그러고는 한 병사가 노인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이 감사는 연대장 관사 옆집이라고 대답하자, 연대장 관사 옆에는 관찰사 관사 밖에 없는지라 이 병사들은 그제서야 깨닭고 줄 지어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한다.[66]

출장길에 기차는 3등석을 이용했고, 아껴 쓴 출장비로 효자·효부를 포상하였다. 양복 한벌을 평생토록 입고 신발 한 켤레로 30년을 지냈다.[67] 퇴관(退官)하면 농토로 돌아간다는 소신을 지켜 후평·석사동 농장을 자전거로 왕래하며 호미를 들고 농사에 전념했다.[67] 그는 도내 군현마다 친상계를 조직하게 했다. 가는 고을마다 친상계(親喪契)를 들어 초상이 나면 손수 상여를 메곤 했다. 상여 멘 관찰사란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66] 평민의 상이든 관리의 상이든, 그가 직접 상여를 메는데 참여하곤 했다.

1908년(융희 2년) 6월 11일 겸임 강원도재판소판사에 임명, 강원도관찰사강원도재판소판사, 중추원 찬의를 겸임하였다.

도박, 노름 억제 정책

그는 자신부터 술과 노름을 피하고 퇴청 후에는 손수 거름지게를 지고 밭일을 하였다. 이감사 풍화 라는 속담의 기원이 되었다. 이 감사가 가는 고을 마다 푸화가 잘 되지 않는 고을이 없었다는 말이다.[66] 그는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땀흘려 일하기를 거부하고 술과 담배와 노름, 도박에 빠지기를 좋아한다며 조선의 멸망은 당연한 천벌로 받아들였다.

6척에 20관의 거구였던 그는 완력도 대단했다. 농번기 바쁜 시절에 장기를 두거나, 노름을 하고 있으면 그는 거름짐을 지고 가다가 짐짓 비틀거리며 쏟아버렸다.[66] 또, 돈 많은 지역 유지들이 기방에서 놀고 있다는 전갈을 받으면, 인분 만지고 있던 그 손 그대로 들어가 술을 청하고 맨손으로 안주에 손을 대어 판을 깨곤 했다.[66] 그는 땀흘려 일하는 농군들을 도우지는 못하면서, 환락에 빠졌다며 판을 갈아 엎었고 여러번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일분일초의 시간도 무료하게 보내면 안된다며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독서를 하거나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잦거나, 일본에서 배운 체조, 스트레칭을 하였다. 그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끔찍히 여겼다.

며느리 간택

그는 며느리가 될 사람, 사위가 될 사람을 볼 때 집안 문벌이나 형식적 예의 보다는 성실성, 성공 가능성 여부가 있는가 없는가 여부를 보고 골랐다. 이규완은 며느리를 얻으면 혼례가 끝나는 그 이튿날 반드시 밭에 데리고 나가 가래질을 시켰다. 그의 며느리들 중에는 당시 고등여학교를 나오고 교사를 하거나 상류층의 여자였는데도 셋 이상이 협동해야 일이 잘 되는 가래질로 노동의 협동적인 묘미를 익히게 했다.[68]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넷째 자부(이화평의 어머니)가 결혼 했을 때는 가래질할 철이 아니어서 이규완은 새로운 넷째 며느리에게 나흘 동안 계속하여 돌담을 쌓게 하기도 했다.[68]

그는 짚신도 손수 삼아 신었으며, 딸들과 며느리들에게는 용변시에도 실꾸리를 들고 가서 감으라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했다.[69]

한일합방조약 전후

1910년 4월 29일 공립 춘천실업학교가 개교하자 강원도 관찰사인 이규완이 초대 교장을 겸임하고, 사립 측량학교를 가교사로 빌려 1년제로 개교했다. 그 해 9월 2년제로 개편됐고, 교명도 춘천공립농업학교로 변경했다.[70] 10월 1일까지 춘천실업학교 교장직을 겸임하다가 한일 합방으로 관제가 개정되면서 춘천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강원도관찰사로 재임 당시 그는 춘천을 중심으로 한 경성(서울)∼양양과 원주∼금화(철원)를 잇는 열십자(十)형 철도 부설 계획을 세웠다.[71] 그러나 한일 합방 조약으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평소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그는[72], 한일 합방을 조선인의 게으름과 탐욕, 부패함이 불러낸 당연한 결과물로 인식하였다.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과 동시에 그는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고 강원도도장관로 발령되었다. 그는 도장관에 임명되자, 학식의 짧음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행정 실무는 실무 관원들이 처리하고 결제만 하면 된다 하여 애써 만류하였다. 한일합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강원도 철도 개설을 직접 건의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생애 후반

일제 강점기 초반

아들 이선길춘천 농장의 사과나무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된 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도 조선총독부로부터 10월 1일부로 강원도도장관에 임명되어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함경남도의 도장관(도지사)으로 이동했다.

그는 겨우 글은 깨쳤으나 고위 행정직은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학식이 얕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막 시작되던 시기로, 지식의 깊이보다는 통감부나 조선총독부와의 친밀도나 충성심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규완은 학식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고, 도지사로 있으면서도 휴일에 지게를 지고 직접 일을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 일본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겪으며 얻게 된, 개개인이 근검하고 절약해야 부국을 이룰 수 있다는 지론을 부지런히 실천에 옮겼다. 그는 도지사로 재직하면서 매춘굴과 유흥가, 주점을 단속, 혁파하고, 도박과 오락을 근절, 금지하였다. 그는 일각의 촌음이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며 독서를 하든, 물레를 잣든, 신문을 읽든, 청소를 하든 무엇이든 하라고 강조하였다.

강원도도장관 재직 중인 1912년에는 강원도 춘천군 춘천읍 아동리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는 퇴근 후 부내면 석사리춘천읍 아동리, 후평리의 농장에서 밭일을 하거나 양떼, 소떼를 돌보았다.

그는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도지사격인 자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제복 한 벌 외에는 여름에는 중의 적삼, 겨울에는 무명옷이 상복이고, 두루마기는 넝마 같았다.[73] 일을 할 때는 무명에 물감들인 색옷을 입었기에 중국인 고용인으로 오인받기 일쑤였고, 구두강원도 도장관 임관 당시에 사 신은 한 켤레를 30년 동안 기운 데를 다시 기워 신었다.[73] 그는 장관까지 지낸 분이 인색하다, 구차하다, 궁상이라는 시중의 주장에 대해 분수를 모르고 사치한 삶을 살다가 패가망신하게 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함경남도 도지사 시절

함경남도 장관 취임식 때
(대한제국 육군 정복 차림)

1918년 9월 함경남도 도장관으로 발령받았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반대하는 경고문을 내었다.[4] 또한 함경남도 관내에 포고령을 내려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과 소란하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근무에 임할 것을 당부하였다.

1921년 10월 18일 함흥여자청년회의 찬성원으로 가입하였다.[74] 1923년 7월 20일 한인기독학원민찬호, 김영우, 김노디가 인솔하는 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으로 구성된 모국방문단을 접견하였다.[75]

도지사로 재직 중 하루 아침은 까마귀를 잡아다가 국을 끓여 먹고 있노라니 어떤 도 서기(道書記)가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그는 "자네 국 좀 먹게"하고 권했다.[76] 서기는 황송하게 잘 받아 먹었다. 먹고 난 다음 물었다. "맛있나?", "네 참 맛 좋습니다." "자네 그게 무슨 고기인줄 아나? 까마귀 고기일세. 늙은 것이 고기는 먹고 싶고, 쇠고기는 비싸서 먹을 수 없고 그래 총을 들고 나갔더니 까마귀가 한놈 잡혔어.[76]"라더니 "그래, 그걸세." 듣던 서기는 그만 비위가 흔들려 고기를 토해버렸다. 그러자 따귀가 벼락같이 들어왔다. 이규완은 대로하여 "이놈, 도지사가 먹는 것을 도서기가 못 먹을게 뭐냐?" 했다는 것이다.[77] 함석헌은 후일 그를 가리켜 "조선에서 일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음식 투정을 부리는 것을 미워하여, 음식 가리는 것과 낭비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늘 희생당하는 동식물, 수확하는 농어부를 생각하며 쌀한알 고기 한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라고 하였다.

황무지 개간, 농업 활동

이규완, 함경남도지사 재직 시절 (1922년)

1924년 함경도 장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퇴직한 뒤에도, 비슷한 경력의 전직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들어가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참가하지 않고 식산흥업이라는 평소의 주장대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을 일구고 운영하는 일에 몰두하여, 1930년 청량리 전농 농장, 1936년 춘천농장을 경영했다.[4] 한편 그의 농사일은 화제가 되어 이상촌을 꿈꾸던 이광수김교신 등은 그의 농장을 직접 방문하여 농장 환경을 기록해가기도 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직을 여러번 제의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이규완은 민족 개량을 통해 문명 개화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을 내세웠고, 근검절약과 식산흥업으로 대표되는 실력양성론 외에도 문명화를 이룩하여 부를 축적한 뒤 이제는 한 나라가 된 일본의 국정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에 대한 주장을 일찍부터 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에 참여하고 신간회에 가입하였으나 1931년 5월 해산되었다. 1928년 4월 30일물산장려회 정기 대회에서 명제세, 김종협, 백홍균, 오화영, 문일평 등과 신간회의 지도자격인 안재홍, 허헌, 이종린, 한용운, 송진우 등과 함께 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선임되었다.[78]

1929년 변호사 이인의 학교 설립 도움 요청을 받고 토지 일부를 팔아 학교 건립 기금을 댔다. 이후 이인, 최송설당 등과 함께 김천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후원하였다. 1930년 경성부 청량리와 전농동 일대 토지 2,000여평을 매입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1936년 춘천군 신동면 석사리 땅 38,000여평을 매입하고, 춘천군 춘천읍내와 김화군 서면 자등리와 근남면 잠곡리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잡곡을 농사하거나, 농장을 운영하면서 소와 돼지 등 가축을 길렀다. 거듭된 공직 거절과 중추원 참의직 거부로 조선총독부에서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그의 성실성은 높이 평가하였다. 1936년에는 한성시탄주식회사(漢城柴炭株式會社)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해방 후 1945년 9월 강원도 도지사 고문이 되고 10월에는 해방 이후 공석이 된 강원도지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 한국민주당강원도지구당 위원장직에 천거되었지만 그는 고령을 이유로 거듭 고사하였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2월 14일 민주의원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만년에는 춘천읍 후평리의 2층집에서 거처하며 신동면 석사리에 있던 아들 집을 왕래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는 말년에 중풍으로 누워 있었는데, 죽을 때까지도 곁에 어망 짜는 실을 놓고 어망을 짰다[69] 한다. 중풍으로 병석에 누워 있다가 1946년 12월 15일 춘천군 춘천읍 자택에서 중풍등창, 노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이선길유도 지도자로 활동하였고, 다른 아들 이영일춘천에 거주하며 서양화가, 현대화가로 활동하였다.

다른 아들 이재길은 한의사, 접골원 등으로 활동했다. 아들 이재길은 접골원 등을 하였지만 워낙에 술을 좋아했다. 친구들에게 돈도 빌려주고, 술 마시는 일로 결국 부친(이규완)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데다가 접골원이라는 곳이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느라고 움직일 수 없는 직업이었다.[79] 후에 이재길은 자신의 아들 이화평을 따라 브라질로 이민갔다.[80]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저작

  • 《조선 개화당 사건 갑신대변란의 회상기》
  • 이규완옹일사 (강원도 내무국, 1956)

사상과 신념

이규완은 며느리에게 가래질을 시켜 근검, 협동의 정신을 가르쳤고, 철저한 보상주의 실행으로 노동의 가치를 깨우쳤으며, 몸에 밴 검약 정신으로 자신도 신발을 직접 꿰매 신었다고 한다.[68]

가난, 게으름에 대한 비판

이규완은 가난함과 게으름은 악으로 규정하였다. 이규완은 "2천만 명의 조선 사람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나머지 1,990만 명은 놀고 있다.[81]"며 한탄하였다. 그는 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조선 백성들의 게으름과 태만함, 나태함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백성들의 안일함과 게으름이 곧 국력을 약화시켰고, 급기야는 조선의 멸망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지론은 2천만 명의 조선 사람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나머지 1,990만 명은 놀고 있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지가 밥 얻으러 동냥 오면 밥을 먹여 주고, 그 대가로 밭갈이 노동량을 정해 주고는 그 일을 마치지 않으면 내보내주지 않았다.[81] 그는 가난한 것은 선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하였다.

게으름 망국론

이규완은 조선인들의 게으름과 배관열이 나라를 망쳤다고 봤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그는 장기간 일본·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미국의 노동자들을 본 그는 조선인들의 게으름과 비열함에 대해 환멸감을 품게 된다.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소신 친일파 이규완은 그 ‘본성’을 개량하자는 의미에서 도 장관이 되어서도 작업복 차림으로 짚신을 만드는 등 ‘노동의 신성’을 실천했고, 부하의 자녀에게 양잠·견직을 가르치고, 퇴직 이후에 땅 매입·개간을 해서 4만 평이 넘는 농장의 주인이 됐다.[72] 그는 조선이 멸망한 원인의 하나로 사농공상, 문존무비, 노동을 천시하는 사회 풍조 등을 지적했다.

이규완은 사회의 진보, 문명화를 위해서는 나태한 민족성을 고치고, 식산흥업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스스로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물론 이것은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조건들이었지만, 그는 일제에 의한 지배와 지도 하에 이를 이루려 하였다.[82] 춘천에서 도 장관직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몸소 거름통을 메어나르며 농장 일을 하였고,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용으로 양어장을 활용했다. 그는 황무지개간하여 드넓은 과수원을 손수 지도해 운영했는데, 자신과 아내 외에도 자녀들도 밭농사에 참여시켰다. 그는 아침마다 괭이와 밑씻개를 갖고 매 그루마다 차례로 찾아다니며 용변을 보았으니, 앉아 있는 동안 과수를 관찰하여 손질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하루 업무를 구상하였다 한다.

민족성 개조론

이규완은 노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글읽기만 좋아하는 민족성을 고쳐야 한다고 개탄하였다. 아들에게 글공부만 가르쳐서 입신양명을 기대하는 부모들의 풍조 역시 그릇되었다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학문을 가르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자제들에게 솔선수범을 하기로 하고, 자녀들과 조카들에게도 실용적인 기술을 익힐 것을 역설했다. 아들 이선길유도를 하게 했고, 다른 아들들에게는 기술, 농업 등을 익히게 했으며, 공부와 동시에 여가시간에는 일정 시간 밭일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일찍이 미국에서 2년 반 정도 생활하면서 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혹 노동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그는 미국인의 근검 절약 생활을 보고 '빈자는 세계의 노예'라고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 일본에서 생활해 보고는 '일본인의 생활이 윤택한 것은 근면역행 때문이다'라고 하였다.[82] 그는 유럽미국의 번영을 식민지에서의 탈취, 흑인 노예 무역 탓이라 주장하는 젊은이들에 맞서 미국인들의 근면성과 성실성 청교도 정신을 강조,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후 도장관 시절에도 이 문제를 가장 긴요한 과제로 제기하였다. 그는 "우선 조선의 제일 악습고질인 나타(懶惰, 나태(懶怠)와 같은 뜻)를 타파하여 근면의 기풍을 양성한 후에 개발을 도모할지오……근검역행 10년 안에 국부(國富)의 정도가 가히 신국면에 들 것이다."({매일신보}, 1916. 4. 12, 1917. 1. 16.)라고 강조하였다. 민족의 낙후를 민족성, 특히 게으름으로 돌리고, 이러한 민족성을 고쳐야 나라의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82]

그는 땀흘려 일하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더럽고 힘든 일을 꺼리고 기피하는 자야 말로 추악한 영혼을 가진 자라고 일갈하였다. 그는 근면의 기풍이 확립되면 그 다음 실질적으로 국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안은 '식산흥업'이라 하였다. 물론 이 방안은 일제의 이른바 '부원개발'(富源開發)의 일환으로, 식민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규완은 바로 이 식산흥업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82]

근검절약론

이규완은 조선이 망한 원인의 하나로 낭비벽, 사치, 허세로 꼽았다. 그에 따라 그는 낭비벽, 사치, 허세를 없앨 것을 촉구하였고 그 자신이 손수 모범을 보였다. 그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도장관 재직 시절에도 제복 한 벌 외에는 여름에는 중의 적삼, 겨울에는 무명옷이 상복이고, 두루마기는 넝마 같았다.[73] 일을 할 때는 무명에 물감들인 색옷을 입었기에 중국인 고용인으로 오인받기 일쑤였고, 구두는 강원도 도장관 임관 당시에 사 신은 한 켤레를 30년 동안 기운 데를 다시 기워 신었다.[73] 그는 1910년 강원도 도장관 취임 후 산 구두를 30년간 신었다. 이는 제복 입을 때만 신었을 뿐 그 밖에는 짚신을 신었고, 짚신이 해지면 두 쪽을 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어진 한 쪽만 새 짚신으로 바꿔 신었기 때문에 항상 짝신을 신을 수 밖에 없었다.[73]

그는 젊은이들에게 늘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아껴쓸 것을 강조했다. 그는 며느리에게도 곧잘 구두쇠 교육을 시키곤 했다. 그는 며느리에게 "빨래는 어떻게 하는가?"하고 물으면 며느리는 "냇물에 가서 합니다."라고 한다.[73]

그래서는 안된다. 빨래는 집에서 하고, 빨래를 빤 물은 모아 두었다가 다시 쓰던가, 거름에 섞어서 밭에 주든지 퇴비에 끼얹도록 해라. 때도 다 재물이니라.[73]

그는 때도 자원이라며 아끼라고 주문하였다. 그는 또 식구 가운데 누군가 굵직한 장작으로 불을 때고 있으면 이를 말렸다.[81] 그는 또 남이 재물을 아끼면 인색하다, 짠돌이라 하고 자기가 인색한 것은 근검절약이라 한다, 남이 화려하게 즐기면 사치라 하고, 자신의 사치는 고상한 취미로 여긴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사소한 나무 토막, 목재라고 해도 쓸 데가 있다고 봤다. "나무를 살 때는 그 나무를 손질해 딴 것으로 쓸 수 있나 여부를 따지면서 골라서 사야 한다. 그리하여 쓸 만한 것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후에 가느다란 놈은 도구(망치 등) 자루로 쓴다든가 한다. 싸리나무는 모아서 빗자루를 만들어 쓰다가 다 닳으면 때도록 한다.[81]"는 것이 그의 나무 활용 지론이었다.

시간 절약론

이규완은 평소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경멸하였다. 그는 시간도 절약할 줄 알아 모든 식구들에게 뒷간에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81] 신문 하나라도 갖고 가서 대변을 보면서 읽게 했다.

실 꾸러미라도 들고 가게 하여 그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 자신은 변소에서 종이 노끈을 꼬거나 변소에까지 어망 얽는 장치를 해두고 잠시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81] 그리고 다 쓰고 버린 잡기장을 주어다가 그 행간에 글씨 연습을 하고는 이를 잘라 노끈을 꼬아서 그 노끈으로 종이 조끼를 떠 입기까지 했다.[81] 그는 인생은 한번 뿐이며,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시간을 아낄 것을 주문하였다.

공무상으로 출장을 가더라도 군수부윤이 정해준 고급 잠자리는 마다하고 누추한 주막을 찾아들었고, 비단 이불을 빌려 펴놓으면 그것을 거두고 밤늦도록 짚신을 삼거나 버려진 (竹)쪽을 주워와 늦도록 이쑤시개를 만들곤 했다. 그러고는 그 짚신이쑤시개는 아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81] 평범하고 범상한 이부자리를 가져오면 바로 누워서 자고 고급 비단이불을 가져오면 밤늦도록 이쑤시개를 깎거나 짚신을 삼았다.

조선인 참정권 운동

그는 일찍부터 참정론을 주장하는 논리를 펴게 된다.[83] 1910년(융희 4년) 이전부터 그는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일 합방 조약 이후 그는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참정권, 자치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게으른 민족이 아니며,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명인임을 총독부 당국자들에게 역설하였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손수 모범으로 보였다.

매일신보 1917년 5월 6일자는 '도장관이 지게 지고 석재를 운반'한다는 제목으로 강원도 장관 이규완 씨의 근검을 칭찬하고 있다.[84]

능금꽃과 복사꽃이 만발한 과수원에서 휴일에도 쉬지 않고 다갈색의 노동복을 입고 소를 몰고, 지계를 등에 지고 일하는 두 명의 청년, 이규완의 아들 각일(覺一)과 선길(鮮吉)에 관한 이야기다. 직접 과수원을 개간하였을 뿐아니라 그의 집 밭에다 스스로 묘포를 만들어 각종 수종의 묘목을 키워 보급할 정도였다. 강원도 장관 시절에는 농민들에게 부업으로 양잠, 기직(機織:베틀로 베를 짜는 것), 종묘원 등을 경영하게 하고, '10년 후에는 강원도를 우리 나라 유일의 양잠지로 만들어 이 곳에 일대 공장을 세우고 많은 생사를 수출하게 될 것'이라고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군수 등의 지방관의 실업사상을 강조하였다. 지방관들이 관료의식에만 사로 잡혀 있으면 도저히 지방민과 융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 발달을 위한 관리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하여 자택 근처에 양잠상습소를 설치하고, 광대한 자기 집에는 자비로 견직기 10대를 설치하여 군수, 기타 관리 또는 지방 명망가의 자제를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1924년 함경도 지사에서 퇴직한 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코스와도 같은 중추원 참의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손수 농장을 개간하고 운영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식산흥업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는 자신의 확고한 소신에서 그러하였을 것이다. 1930년 이후 청량리 부근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약 2천여 평을 6년여 동안에 걸쳐 개간하였다. 하루에 한 평씩 삽과 괭이만으로 주야로 일하여 스스로 개간하였다. 그리고 곧 춘천 신동면 석사리의 하천 황무지 3만 8000여 평을 매입하여 개간하였다. 황무지이지만 장차 인구가 늘고 인지가 발달됨에 따라 농경지가 부족하게 되어 토지도 집약적으로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네 아들의 경제적 기반이 될 수 있는 농장을 각각 개간하였다. 이러한 황무지 개간은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길이었다. '나의 이상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나는 문명에게 버림받은 반개불전(半開不錢)의 땅을 개발해서 황금 세계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서슴치 않고 대답하겠네'라고 하였던 것이다.[84]

그는 부를 쌓아 실력이 양성된다면 일본의 국정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을 주장하였다.[84]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천황의 적자(赤子)로 내지인과 동등의 권리를 향유치 못하겠는가. 참정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비록 국무대신이나 주외사신이라도 가히 하지 못할 자가 없을 것으로 믿는다.({매일신보}. 1916. 4. 12) 문명의 정도가 내지인과 손색이 없다면, 일시동인지하의 필경 조선인도 상당한 지위로 참정권을 주면 국회위원, 정무대신도 가하다.({매일신보}. 1917. 12. 12) 라고도 주장했다.[83]

참정권은 3·1 운동 후 민원식(閔元植)과 같은 적극적인 친일파에 의해서 적극 추진되고, 일제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규완은 이를 처음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의 부원개발, 산업 발전, 민풍의 개선 등을 통한 문명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개화파 이래의 문명개화론에 입각하여 민족성을 개량하고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인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면 일본의 국정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85]

청탁 기피 방법

이규완은 사돈 하나가 벼슬자리 청탁하러 오건 거지가 밥 한 술을 얻으러 오건 공짜밥을 주어 보낸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이든 시켜서 내보냈다.[66] 거름 나르는 일이건 나뭇단 쌓는 일이건 응분의 일을 반드시 시켰기로 그 집에는 청탁꾼은 물론 거지들도 잘 드나들지 않았다.[66] 그는 조선인의 악질적인 습관은 법을 지키기 보다는 인맥과 연줄로 회피, 특혜를 누리려 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갑신정변 실패에 대한 관점

갑신정변의 핵심 행동대원이었던 이규완은 개화당 지도자들의 나이가 적었던 점, 민중이 무지하여 정변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사대당'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점, '사대당'의 배후에 있는 청국군이 막강했던 반면 일본군의 세력이 약했던 점 등을 들어 정변의 실패를 미리 짐작했다고 술회했다.[86] 그는 또 당시 일본군의 수가 적었던 점과, 외세를 너무 믿었던 점 역시 정변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봤다.

도박, 오락, 유흥 무용론

이규완은 도박과 오락, 유흥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역설하였다. 도박오락을 하고, 유흥가에 갈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 하던가, 그 시간에 낮잠을 자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모으는 비결을 물은 한 노동자에게 그는 “나무에 올라보라”라고 한 뒤 “이제 손을 놓아봐”라고 명했다. 이 노동자가“손 놓으면 떨어지는데요”라는 대답에 이규완은 은 만지면 만질수록 손에서 놓을수 없다고 답했다.[72]

이란 만지면 만질 수록 돈의 맛을 알아서 쉽게 놓지 못한다. 에 빠지되 너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돈 보다는 너의 건강을 우선순위에 두어라.

그는“손을 못 놓지? 돈도 마찬가지야. 일단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비록 한 푼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마라. 모으고 또 모으고 끝까지 노력하면 성공한다!”라고 답하였다.[72] 이규완은 돈을 벌어보지 못한 자들은 돈의 아까움을 모르지만, 한편으로 돈이란 벌면 벌 수록 돈의 맛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젊은이에게 싸리나무장미 가지를 손에 잡아보게 한 뒤, 나중에 싸리나무와 장미의 가시를 제거하고 다시 쥐게 하였다. 그는 주원장의 고사를 비유하여 인용했다며, 가지를 그냥 쥐면 손에 피가 나지만 가시를 제거하고 잡으면 안전하다. 이란 장애물을 치워주는 칼과 같다고 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오락도박, 유흥 같은 미친 짓에 빠지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한 젊은이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묻자 그는 오락하지 않고, 유흥에 빠지지 말고, 경마, 도박하지 않는 것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 답하였다. 이러 그는 “야구란 미친 짓이야. 그런 짓 하는 놈은 나중에 실업자 되지. 이상한 유희는 할 생각을 말고 (퇴근하고) 집에 가면 청소부터 하고, 과수원도 가꾸라”고 하였다.[72] 그는 게임, 경기, 오락, 도박 등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규정하였다. 이규완은 돈을 벌지 못하는 남자를 가리켜 “천대받아야 할 노예거지”라고 부르며 조롱하였다.[72]

가족 관계

이선길 (1927년)

유도선수인 이선길과 화가인 춘천(春泉) 이영일은 그의 아들들이었다.

  • 아버지 : 이기혁(李基赫)
  • 어머니 : 유씨
    • 형 : 이윤필(李允必)
    • 누나 : 전주이씨
    • 매부 : 강성형(姜盛馨)
  • 계모 : 이름 미상
  • 부인 : 이름 미상, 갑신정변 이후 이혼
  • 부인 : 이매자(李梅子, 1880년 ~ 1963년(?), 본명은 중촌매자(中村梅子), 일본 야마구치 현 출신)
  • 사촌 형 : 이종필(李鍾弼)

평가

그와 더불어 장년기를 함께했던 박영효는 임종 때 “내가 일생을 통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동지(同志)는 이규완이다. 그는 참으로 솔직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열혈호담(熱血豪膽)한 사람이었고, 비범한 역사(力士)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67]

한편 평론가 이규태는 '그는 검약, 근면, 자조, 협동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라는 신념으로 풍화를 지도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관찰사의 행정력이나 제도로서 이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65]'는 평가가 있다. 며느리들은 냇물에 가서 빨래하지 못하고 반드시 샘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빨랫물을 두엄자리에 뿌리게 함으로써 땟물까지 절약했던 분이다[66]라는 평가도 있다. 함석헌은 그를 "일제시대 일 하기로 유명했던 분[76]"이라고 평하였다.

이씨를 말할 때에 먼저 친일성을 운운하는 사람도 있으나 파란 많던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그 만큼 비도덕적 행실이 지적되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고 하겠다[67] 는 평도 있다.

일화

그가 강원도 도지사로 재직 당시 춘천 일대는 툭하면 밤손님이 찾아드는데, 지칭 의병이라면서 군자금을 요구하거나, 게중에는 전혀 엉뚱한 도적, 마적들도 섞여 있어서 치안이 허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생활기반을 인구 많은 도회로 옮겼으니, 그때의 도시는 상공업이 흥한 것이 아니라 놀고 사는 백성들의 집합장소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벼 천석이나 한다는 지주들은 가만히 앉았어도 일정한 수입은 들어오겠다, 손 하나 까딱않고 두두룩한 배를 문지르며, 그 중에도 견딘다는 집 사랑에 모여앉아 싱거운 소리나 주고 받으며, 바둑이나 장기, 골패 등으로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그러는 어떤 집 사랑에 도청에서 전갈이 왔다. 어느 날에 도장관이 저녁 마실을 오시겠다는 것이다. 약속한 날짜에 찾아온 장관은, 모두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차려내온 요리상을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었다. 한참을 더 앉았다 일어서며 그는“과분하게 잘 먹었소이다. 백성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수확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받아먹을 수야 있겠소? 심심한데 노라도 꼬시지 않고... 내 수일내로 또 오리다. 나 밤참 좋아 않으니 준비하지 마시고... 하하하!”라고 하였다. 이튿날로 무리들은 기둥마다 미닫이 틀마다 못을 박고 노 갈고리를 구해다 걸었다. 그리고 서투른 솜씨로나마 손을 쉬지 않고 노를 꼬아, 주먹만하게 어떤 것은 제법 큰 노 몽댕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방안은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며칠을 안 가 이장관이 예고도 없이 찾아들었다. 그리곤 노 몽댕이 하나씩을 만져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노는 사뭇 1학년이구려! 그렇지만 꼬다 보면 자연 늘지요. 이건 아주 물렁물렁한데 노를 감는 데도 요령이 있어요. 옳지! 이것 꼰 분에게 배우시면 되겠군... 주안은 아니 내오기로 했는데 또 차리셨구려! 모처럼이니 들겠소이다만 번번히 그러면 어디 미안해서 자주 올 수 있겠소이까?

그리고 일어서 갔는데, 10여일 후 지나서 다시 찾아 들었다. 그리고는 먼젓번처럼 노 몽댕이를 하나하나 차례로 점검하다가 그 중의 하나를 만져보고는 묻는다.

이건 어떤 분 것이오?
저... 제 것이올시다만은...

장관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그의 오른 손목을 쥐어 잡아나꾸어 넘어뜨리며 왼쪽 무릎으로 찍어눌렀다. 앉아서 하는 격투기의 기본 기술로 오른팔을 뒤로 돌 려 비틀어 포승을 지르는 방법이다.

죽일 놈 같으니! 내가 지난번에 그냥 살펴본 줄 아냐? 손톱 밑에다 먹을 찍어가지고 와서 표시를 해놨는데... 이놈아!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십여일 동안에 단 한뼘도 더 안꼬아? 네놈 맛좀 봐라!

상대방의 지위도 있지만, 전문으로 기술을 익혔던 그였다. 이 자를 공기돌 놀리듯 하며 메다붙이고, 대가리를 방바닥에 쾅쾅 쳐 박아, 비틀 적마다 '애개개' 소리를 지르고 하는데 얼마를 그러다가 분을 삭이고 숨을 돌렸다.

정신들을 차려요, 정신을! 나라가 왜 망한 줄을 아시오? 당신네들 같은 작자들 때문에 이렇게 종살이를 하는 것이오. 내가 왜놈 밑에 심부름하고 있으면서 뽐내는 거 본 적 있소? 어쩌다가 이 자리에 운좋게 앉게 됐지만, 내 나름대로 우리 백성들을 일깨우고 기운들 차리게 하고... 이것이 나의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임무요. 내일도 퇴근하면 내 농장에 있을테니 구경들 와요. 보고 좀 배워요. 입에 밥이 들어가니까 제 세상으로 알지 말고... 뭐든지 한 가지씩 해요. 좋은 재주 좋은 재산 두었다 무엇에 쓰려오? 맞은 분한테는 미안하오만 그것을 약으로 알고, 한번 떨쳐 일어나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지. 얻어맞고 기가 죽어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면 그야 죽은 것이지. 숨만 붙어있다고 산 것이겠소?

개구락지 모양으로 방바닥에 납죽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발발 기며 비는 친구는 돌아보지도 않고, 장관은 한마디 하였다.

기타

일찍부터 무술 수련으로 뼈마디가 굵었다 한다. 이규완은 후일 김옥균을 평하기를 '처음에는 김옥균을 가볍게 보았는데, 나중에야 재능이 있음을 보고 애지중지 알아보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1910년 초대 강원도 지사로 이규완이 부임하였다. 이에 따라 이규완 의 3남인 이영일이 소년 시절을 춘천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 그는 근대 초기 춘천 미술활동 의 최초 인물 이라고 할 수 있다.[87]

같이 보기

참고자료

참고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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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이규완옹일화집》 (강원도산업부농정과, 1942)
  • 채만식, 《아시아의 운명》 (교보문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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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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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포럼 편집부,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6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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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한길사, 2003) 8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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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19. 이들은 즉시 민씨 대신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우정국 낙성식에서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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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일본인 쓴 ‘춘천찬가’… 아픔의 역사 속 빛나는 절경 강원도민일보 2012.02.27
  63. "삼인이입성", 대한매일신보 1907년 07월 10일자 2면, 잡보외방통신면
  64. 이규태,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잘된다 1》(신원문화사, 2000) 156페이지
  65. 이규태, 《한국인의 정신문화》 (신원문화사, 2011) 277페이지
  66. 이규태, 《한국인의 정신문화》 (신원문화사, 2011) 278페이지
  67. [진귀품 감상] 관심 두어야 할 근·현대사료(2) 강원일보 2007.03.22
  68. 한동희, 《느낌표 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265페이지
  69. 한동희, 《느낌표 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266페이지
  70. 농업교육의 명문 춘천농공고 개교 100주년 중앙일보 2010.04.29
  71. 70여년 전 ‘경춘 철도 시승기’ 공개 화제 강원도민일보 2012.02.27
  72. '남자' 노릇하는 다양한 방법 한겨레신문 2006년 05월 18일자
  73. 이규태, 《한국인의 힘 2》 (신원문화사, 2009) 139페이지
  74. "女子靑年會贊成會", 동아일보 1921년 10월 18일자 4면, 사회면
  75.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311페이지
  76. 함석헌,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한길사, 2009) 191페이지
  77. 함석헌,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한길사, 2009) 192페이지
  78. 이균영, 《신간회 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3》 (역사비평사, 1993) 297페이지
  79. 한동희, 《느낌표 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267페이지
  80. 한동희, 《느낌표 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269페이지
  81. 이규태, 《한국인의 힘 2》 (신원문화사, 2009) 140페이지
  82.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돌베개, 1993) 180페이지
  83.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돌베개, 1993) 182페이지
  84.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돌베개, 1993) 181페이지
  85.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돌베개, 1993) 183페이지
  86.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푸른역사, 2005) 52페이지
  87. 강원사회연구회, 《강원 사회의 이해》 (한울, 1997) 552페이지
전임
(한일 합방)
제1대 강원도장관
1910년 10월 1일 ~ 1918년 9월 23일
후임
원응상
전임
신응희
제2대 함경남도장관
1918년 9월 23일 ~ 1919년 8월 1일
후임
이규완 (도지사)
전임
이규완 (도장관)
제1대 함경남도지사
1919년 8월 1일 ~ 1924년 12월 1일
후임
김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