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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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감 (조선)
출생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조선
거주지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다른 이름은 감(勘), 자는 언신(彦愼) 또는 언신(彦信)
학력1543년(중종 38) 식년문과 을과 급제
직업문신, 정치인, 작가, 외교관, 교육자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이광식, 함안이씨
배우자풍천임씨, 예천윤씨
자녀이성헌, 이희헌
친척이계변(형), 이전(동생), 이용(동생), 이지방(할아버지), 이복남(종손), 임권(장인), 임유겸(처조부), 이준헌(조카), 윤근수(사돈), 윤두수(사돈), 광원군 (사돈), 윤지임(사돈), 윤원형(사돈)
이감 (李戡)
별명 자는 언신(彦信) 또는 언신(彦愼)
출생지 조선 강원도 명주군
사망지 조선 한성부
복무 조선 육군
최종계급 함경도순변사 종사관, 병조참판, 대호군
기타 이력 1543년 문과 급제

이감(李戡, ? - ?)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작가, 유학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자(字)는 언신(彦信) 또는 언신(彦愼)이다. 일명 이감(李勘)으로도 쓴다.[1] 이광식의 아들이며 충장공 이복남(李福男)의 종조부이다.

1543년(중종 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9월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권지,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중종실록》 편찬에 기주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형조의 낭관, 홍문관 수찬, 교리 등 홍문관사간원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고 참판, 대사헌을 지내고 대호군에 이르렀다. 장흥부사, 종성부사로 출안 송덕비가 세워졌다. 한때 윤원형의 심복이었다가 그를 배신하고 다시 이량의 편에 가서 붙었다.

윤원형, 윤춘년 등과 결탁하여 사림파를 공격하다가 후에 명종이 점차 윤원형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왕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의 세력을 후원하여 윤원형을 견제하자 다시 이량의 편에 가담하여 윤원형 일파 및 사림파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1563년(명종 18년) 이량의 몰락으로 유배되고, 윤원형의 몰락 이후 사림파로부터 거듭 공격을 받았으나 1581년의 대재앙으로 석방되었다. 유배 생활 중에도 학문연구를 계속하여 문하생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강원도 강릉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이감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아버지는 병조참판 이광식(李光軾)이고, 어머니는 함안이씨로 평안도관찰사 정국공신 이세응의 딸이다. 부인 풍천임씨는 좌참찬 정헌공 임권의 딸이며, 지중추부사 소간공 임유겸의 손녀이고, 관찰사 임추의 조카딸이다. 후처 예천윤씨는 윤연수의 딸이다.

형은 이계변으로 요절하였고 동생은 이전이용으로, 이전은 충장공 이복남의 조부였다. 어려서 성리학자에게 수학하였으나 스승의 이름은 실전되어 미상이다.

그는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과는 겹사돈이었는데, 그의 고모부 윤확은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의 6촌 형이었고, 그의 누이는 윤원형 형제의 형 윤원개의 아들 윤강(尹綱)에게 시집갔다. 또한 외조카딸은 이중경의 후처가 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에 보임된 뒤 홍문관사간원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고 《중종실록》 편찬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관료 생활

1545년(명종 즉위년) 예문관대교(待敎)가 되었다. 그러나 동료의 직언(直言)을 누설한 일로 1545년(명종 즉위)에 탄핵을 받아 홍문관 정자에서 면직되었다.

그 뒤 복직, 1545년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의 글씨를 잘 써서 칭찬을 들었으며, 이어 정언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윤춘년(尹春年) 등과 결탁, 사류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2] 명종 연간에 정언을 비롯한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언적(李彦迪) 등을 탄핵하는 등, 윤원형(尹元衡), 윤원로, 윤춘년 등을 도와 사림파(士林派)를 탄압하는데 참여했다.

이감은 허엽이조좌랑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취임에 반대한 것으로 감정을 갖게 된다. 이때 마침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감은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 이에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믿고 허엽을 탄핵하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허엽이 짓는 것은 종가이다. 의심스러운 흔적을 가지고 논박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심전(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한지원심전은 참으로 죄가 있다 하겠거니와, 허엽은 사림의 명망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그렇다면 명망이 있는 자만을 다스리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대답을 못했고 허엽은 처벌을 모면하였다.

그 뒤 무재를 인정받아 1552년 함경도 도순변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기도 하였고[2], 1553년 교리(敎理) 가 되었다가 다시 종성부사로 나가 변경수비를 맡기도 하였다. 1558년에는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귀국 후 승지, 경상도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감사 재직 중 퇴계 이황을 찾아 깎듯이 대하였다. 후일 학봉 김성일도 그가 "경상도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서당으로 찾아오자 선생께서 그를 만나 보았다.[3]"고 하였다.

1560년 동지중추부사,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이 등용되어 국정을 전단하자, 윤원형의 편에 있다가 시세에 좇아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이때 이량은 사림을 공격하였는데, 이감의 당파인 이량(李樑)이 사림(士林)들을 모함하자, 이황은 당 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하기를, “이곳이 아무개가 그날 앉았던 곳이다. 지척에서 마주 보았는데, 어찌 그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알았겠는가.” 하면서, 오래도록 탄식하였다.[4]

몰락과 유배

1562년 병조참판, 승정원도승지, 형조참판을 거쳐 중종의 능침을 이장할 때 재궁시위집사로 이장을 보조한 공로로 한품계 승진했다.

그 뒤 공조참판을 거쳐 1563년 사헌부대사헌에 기용, 그는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63년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이조전랑에 천거됐으나 이량과의 상피제로 이정빈 대신 그의 친구 유영길을 이조 전랑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문형, 허엽, 윤두수 등이 이를 반대했다.

이때 그는 이량의 사주를 받아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윤두수, 윤근수(尹根秀), 기대승(奇大升), 이산해 등을 부박하게 선동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밖으로 내쫓으면서 다시 한번 사림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심의겸(沈義謙)의 사주를 받은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의 역공격을 받는다. 기대승의 친척인 기대항(奇大恒) 등의 역탄핵으로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가 여러 차례 비판, 탄핵을 받고 충청도 수안에 유배되었다.

유배와 교육 활동, 석방

거듭된 탄핵으로 다시 배소가 옮겨져 1565년(명종 18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명종 말엽 윤원형 일파도 몰락하고 사림들이 득세하자 양사 및 홍문관에서 여러 차례 죄를 주자고 주장하였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아버지 이광식이량의 사람 됨됨이를 미워하여 그에게 이량과 가까이 지내지 말도록 경고하였으나, 그는 아버지의 경고를 어기고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경원의 유배지에서 학문 연구로 소일하였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를 계속 하였고, 최대양(崔大洋) 등이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5]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을 찾아 인사하였으며 평소 이황을 깎듯이 예우하였기에, 유배 중 학봉 김성일 등 퇴계의 문인들이 부임해왔을때 그의 배소를 찾아 위문하기도 했다.

1571년(선조 4년) 대재앙으로 사면령이 내려졌으나 양사의 거듭된 반대로 취소되었고, 1581년(선조 14) 재난으로 대사령이 내려지자 양사의 반대가 있었으나 석방, 방면되었다.

사후

그의 문집과 작품은 대부분 실전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시 몇수와 8대조 이억의 묘갈명 등이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이성헌서인의 공격을 받아 파직과 복관을 반복하였고, 그의 문하생들 중 최대양임진왜란 때 전사한다.

가계

  • 증조부 : 이징(李徵)
  • 증조모 : 양천허씨(陽川許氏), 사헌부장령, 의정부 사인 허적(許迪)의 딸
    • 조부 : 이지방(李之芳, 1466년 - 1537년)
    • 조모 : 함안이씨(咸安李氏), 정국공신 평안도관찰사 이세응(李世應)의 딸
    • 아버지 : 이광식(李光軾, 1493년 - 1563년)
    • 어머니 : 함안이씨(1492년 - 1536년, 양간공 이세응(李世應)의 딸)
      • 형님 : 이계변(李繼邊, 요절)
      • 동생 : 이전(李戩, 1517년 ~ ?)
      • 제수 : 고성이씨(古城李氏), 좌랑 이광택의 딸
      • 제수 : 하빈이씨(河濱李氏), 부장 이윤우의 딸
      • 동생 : 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 제수 : 칠원윤씨(漆原尹氏), 윤리(尹伊)의 딸, 윤탁연(尹卓然)의 누이
      • 제수 : 여산송씨(驪山宋氏), 송맹경(宋孟璟)의 딸
      • 누이 : 이씨(李氏)
      • 매부 : 파평인 윤강(尹綱)
      • 부인 : 풍천 임씨(豊川任氏, 1515년 4월 12일 - 1556년 2월 1일),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 장남 : 이성헌(李成憲, 1534년 2월 22일 - 1601년 5월 8일)
      • 자부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한(李澣)의 딸
      • 자부 : 전주이씨(全州李氏), 광원군(廣原君) 이구수(李耉壽)의 딸
        • 손자 : 이명남(李命男, 1556 ~ 1619)
        • 손자 : 이길남(李吉男, 1561 ~1644), 초명은 이영남(李英男)
        • 손부 : 하동정씨(河東鄭氏), 정숭조의 손자 정욱의 딸
        • 손녀 : 우계이씨(羽溪李氏)
      • 장녀 : 우계이씨(羽溪李氏)
      • 부인 : 예천윤씨(醴泉尹氏, 1538년 10월 28일 - 1624년 11월 11일), 윤연수(尹延壽)의 딸
      • 차남 : 이희헌(李希憲, 1569년 6월 15일? - 1651년 11월 28일)
      • 자부 : 청주한씨(靑州韓氏, 1570년 6월 15일 - 1593년 6월 13일), 아버지 미상
      • 자부 : 금천장씨(衿川張氏, 1583년 7월 18일 - 1636년 1월 26일), 사과 장득해(張得海)의 딸
      • 삼남 : 이유헌(李有憲)
      • 사남 : 이의헌(李宜憲)
      • 차녀 : 우계이씨(羽溪李氏)
      • 사위 : 안동인 권봉수(權奉洙)
  • 장인 : 임권(任權, 1486 ~ 1557, 풍천임씨)
  • 장모 : 신씨(辛氏)
    • 처남 : 임중신(任重臣, 1517년 - 1580년, 풍천임씨)
  • 장인 윤연수(尹延壽, ? ~ ?, 예천윤씨)

평가와 비판

사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량의 몰락 이후 윤원형 일파 역시 몰락하면서 그는 사림파로부터 비토의 대상이 되었다.

작품

  • 8대조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 이억 묘갈명

명종 때 경상도관찰사로 소수서원에 들러 경렴정에서 읊은 시

山擁美高色 / 아득히 둘러싼 산세 사이로
溪流不息聲 / 시냇물 흐르는 소리 그치지 않네
登臨遐相足 / 높은 곳에 올라 본 광경 좋은데
莫過一孤亭 / 외로이 선 정자를 저물어 지나노라

주석

  1. 오자로 이감(李勘)으로 기록된 문헌도 있다.
  2. 이감
  3. 학봉속집 5권 잡저(雜著) 퇴계 선생(退溪先生) 언행록(言行錄)
  4. 학봉속집 5권 잡저(雜著) 퇴계 선생(退溪先生) 언행록(言行錄)
  5. http://e-kyujanggak.snu.ac.kr/MOK/CONVIEW.jsp?type=HEJ&ptype=list&subtype=mj&lclass=01&mclass=&sclass=&ntype=mj&cn=GK07772_00

같이 보기

참고 문헌

  • 인종실록
  • 명종실록
  • 선조실록
  • 대동야승
  • 국조보감
  • 연려실기술
  • 국조방목

관련 서적

  • 신봉승, 조선의 정쟁 (동방미디어, 2001)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