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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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義親王
의친왕 이강
의친왕 이강
사동궁 오얏꽃 문장
사동궁 오얏꽃 문장
의화군
재위 1892년 1월 28일 ~ 1900년 8월 17일
의친왕
재위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
재위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후임 이건
이름
이강
李堈
별호 호 만오
초명 이평길
신상정보
출생일 1877년 3월 30일(1877-03-30)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955년 8월 16일(1955-08-16)(78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별궁
국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학력 미국 로노크 대학교 졸업
부친 고종
모친 귀인 덕수 장씨
배우자 본부인 덕인당 김씨측실 13인
자녀 이건, 이우 외 19인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 : 비오)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능묘 의친왕묘
의친왕 이강
義親王 李堈
별명 이름은 이강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는 만오(晩悟)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동궁
복무 대한제국 육군
복무기간 1905년 - 1910년 10월
최종계급 대한제국 육군 부장
지휘 대한제국 육군
기타 이력 대한적십자사 총재, 보빙대사, 의화군, 의친왕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이다.[1] 어머니는 귀인 장씨(貴人 張氏)이다. 본관은 전주, 는 강(堈), 초명이평길(李平吉), 는 만오(晩悟)이다.

1891년 의화군에 봉해졌으며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그 해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경술 한일 합방 이후 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저우 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 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임종 직전 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생애

출생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강(李堈)이며 초명 평길(平吉), 뒤에 강으로 개명하였다. 어머니 귀인 장씨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궐밖으로 축출되었다.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에 추증받고 다시 1906년 귀인(貴人)에 추증되었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11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2]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권동진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하였다.[출처 필요]

미국 유학

의화군 시절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일본의 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1년 3월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노크 대학교(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김규식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기도 했다. 1901년 6월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3]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1898년에 아버지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므로 전례에 따라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1907년 부황 고종이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했다. 이때에도 그는 황태자 책봉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1907년 8월 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4][5]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6] 이강을 견제하려는 순헌황귀비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7]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형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7]

국권 피탈 이후

일제 강점기 초기

의친왕

1910년 한일합방 직후 그는 친왕(親王)에서 공(公)으로 강등당하여 이강 공이 된다.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비밀리에 끊임없이 접촉, 교신하며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1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및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臣民)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또한 구 양반이었던 동농 김가진 등이 상하이로 망명, 이들은 임시정부와 의친왕 간의 연락선을 접선, 주선하였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보복을 당했다.[8]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9]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망명 실패 이후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의 친서', '의친왕 전하' 라는 말과 함께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라고 쓰여 있다.[10]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 2면의 기사에는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으며 이후 그 뒤에도 상당 지면 할애되었다 한다.[10]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이라는 공족의 작위를 박탈당했으며, 그의 공위는 장남 이건(李鍵公)에게 습공되었다.

1919년 재판에 회부됐으며, 그는 같은 해 대동단 총재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11]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거절·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족에서 강제로 물러났으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광인과 주색에 빠진 것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정 요인들이 환국,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갔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휴전 후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황족으로서의 어떠한 예우도 없는 조건이 붙었다.

1955년 8월 9일 병석에서 장면(張勉) 부통령(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를 받았다.[12] 의친왕의 천주교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사후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재조명의 기회가 없었다. 능은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복권 노력

1975년 생모 김금덕의 위독소식을 듣고 귀국한 다섯째 딸 이해경은 30년 넘게 아버지 의친왕의 복권운동을 추진했으나 실패하였다.[11] 이후 2000년대 들어 의친왕이 임시정부 요인, 대동단 등과 비밀리에 서신연락을 주고 받은 점 등이 발굴되어 연구진행 중에 있다.

의친왕의 손자인 이원(李源)대한제국의 황실 수장이었던 황태손 이구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황태손 이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대한제국의 황실 수장 자리를 계승하였다.

학위

상훈

가계

  • 어머니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덕수 장씨 (친모)
    • 대한 5황자 의왕 이강(義王 李堈), 친왕
    • 왕비 덕인당 김씨(德仁堂 金氏), 김수덕(金修德)연안 김씨, [14]
      • 제1후실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 제2후실 수인당 김씨(修仁堂 金氏), 김흥인(金興仁)
      • 제3후실 수현당 정씨(修賢堂 鄭氏), 정운석(鄭雲石)
      • 제4후실 조씨(曺氏), 조병숙(曺秉淑)
      • 제5후실 수덕당 이씨(修德堂 李氏), 이희춘(李喜春)
      • 제6후실 수완당 김씨(修完堂 金氏), 김정완(金貞完)
      • 제7후실 수길당 박씨(修吉堂 朴氏), 박영희(朴英喜)
      • 제8후실 송씨(宋氏)
      • 제9후실 수경당 김씨(修慶堂 金氏), 김창희(金昌熙)
      • 제10후실 김금덕(金今德, ? - 1975년[11])
      • 제11후실 함개봉(咸開鳳)
      • 제12후실 김혜수(金蕙洙)
      • 제13후실 홍정순(洪貞順)
        • 황손(皇孫)에 관해서는 아래 항목 "황손"을 참조하시오.

자녀

의왕과 의왕비 덕인당 연안 김씨에게서는 슬하의 자녀가 없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친왕 의왕의 자녀는 12남 9녀이다.[15] [16] 일부 측실은 황손을 의왕에게 맡기고 재혼한 여성들도 있었으며, 덕인당 김씨는 황손들을 친자녀처럼 양육하였다. 근처에 생모가 양육하는 황손 몇 인을 제외하고는 사동궁 (寺洞宮, 현재 종로구 인사동)에 대가족 형태로 거주하였다. 사동궁(寺洞宮)은 의왕의 사저(私邸, 저택)이며 동시에 의왕궁(義王宮), 의왕부(義王府)이다.

순서 황실명 아명 호적명 출생 사망 생모 거주지 출계
1남 황손 이건(李鍵) 용길 - 1909년 1990년 수관당 정씨 - -
2남 황손 이우(李鍝) 성길 - 1912년 1945년 수인당 김흥인 - 운현궁이준용
3남 황손 이방(李鎊) 흥길 해진 1914년 1951년 수현당 정운석 - 소현세자파 이기손(李杞孫)
4남 황손 이창(李鎗) 창길 해직 1915년 사망 조병숙 - 완평군 이승응
5남 황손 이주(李鑄) 수길 해일 1917년 1982년 수인당 김흥인 - 대궁이인용
6남 황손 이곤(李錕) 명길 - 1919년 1984년 수인당 김흥인 - -
7남 황손 이광(李鑛) 형길 해청 1920년 1952년 송씨 - 계동궁이기용
8남 황손 이현(李鉉) 경길 - 1922년 1996년 수경당 김창희 - -
9남 황손 이갑(李鉀) 충길 해룡 1938년 2014년 함개봉 뉴욕 거주 회은 황태손 이구
10남 황손 이석(李錫) 영길 해석 1941년 생존 홍정순 전주 거주 -
11남 황손 이환(李鐶) 문길 해선 1944년 생존 김혜수 산호세 거주 -
12남 황손 이정(李鉦) 정길 해준 1947년 생존 홍정순 LA 거주 -
1녀 황손녀 이영 길순 해완 1918년 1981년 수덕당 이희춘 - 이기용
2녀 황손녀 이진 길운 해원 1919년 생존 수덕당 이희춘 하남시 거주 이기용
3녀 황손녀 이찬 길연 해춘 1920년 2009년 수완당 김정완 - 이기용
4녀 황손녀 이숙 길영 해숙 1920년 사망 수길당 박영희 - 이기용
5녀 황손녀 이공 길상 해경 1930년 생존 김금덕 뉴욕 거주 이기용
6녀 황손녀 이장 희자 희자 1940년 생존 김혜수 순천 거주 -
7녀 황손녀 이용 숙기 해란 1944년 생존 홍정순 LA 거주 -
8녀 황손녀 이현 숙향 해련 1950년 생존 홍정순 서울 거주 -
9녀 황손녀 이민 창희 창희 1953년 생존 김혜수 산호세 거주 -

손자

기타

의친왕은 사격술과 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화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과 권총술로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

대한제국 의친왕숭모회(大韓帝國 義親王崇慕會)는 의친왕의 행장과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뜻을 기르기 위해 2006년 설립된 단체로 의친왕의 제향을 주관하는 공식 단체이다. 초대 대표위원장으로 효령대군 19대손 이재용(李宰容)을 선임하고, 현재 의친왕 제향은 매년 양력 8월 15일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 의친왕묘에서 의친왕의 후손 및 종현, 일반인들이 참반한 가운데 제향을 받들고있다. 2013년 04월에 공식적으로 의친왕숭모회는 해체되고, 봉행하던 의친왕 제향은 2013년부터 후손들이 지내고 있다.

천주교 귀의

의친왕은 죽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1955년 8월 9일에는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구왕실(舊王室) 서무계장과 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연락, 8월 15일경 그들의 영향으로 서울 가회동성당 박우철 신부를 불러다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8월 16일에 영면했다.

참고 자료

관련 서적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6월 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04.27)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05-25)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08-06)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각주

  1. 〈대한제국 황족 의친왕 망명작전〉,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2. 《제국의 후예들》, 371-372p, 정범준, 2006.
  3.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 | 돌베개 | 2007) 260페이지
  4.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5.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6.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7.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8. 이덕일 외.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9. 주명준, 〈의친왕의 상해 망명기도 사건〉, 《황실학논총》 제7호, 한국황실학회, 2006년, 87~109쪽
  10. 서중석 지음 (2006).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327쪽. 
  11. 황손 이석씨 "아버지 의친왕 진면모 알려지길…" - 한국일보
  12.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558페이지
  13. 조선 문조 혹은 익종(추숭) 혹은 효명세자(孝明世子), 순조 19년(1819)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순조 27년(1827)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 년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순조 30년(1830) 졸
  14. 지밀댁, 지밀어머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한다.(1880.1.21. ~ 1964.1.14)
  15. 의왕비 김씨에 의해 만들어진 의왕 가계 족보에 따르면 12남 9녀로 등재되어 있다.
  16. 전해종 (이해종)씨가 아홉 번째 아들로 등재되어 13남 9녀이라는 설이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같이 보기

바깥 고리

제1대 사동궁 종주
1906년 ~ 1930년
후임
이건
전임
이재각
제2대 대한제국 적십자사 총재
1905년 6월 - 1910년 8월
후임
이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