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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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boty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12월 27일 (금) 14:11 판 (일본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도토미 국 사람)
유키 히데야스
무사 정보
시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 1574년 3월 1일(덴쇼 2년 2월 8일)
사망 1607년 6월 2일(게이초 12년 4월 8일
개명 기이마루(義伊丸), 오기마루(於義丸)
→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康)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 히데토모(秀朝) → 히데야스(秀康)
별명 에치젠쿄(越前卿), 에치젠 코몬(越前黄門), 에치젠 사이쇼(越前宰相), 유키 쇼쇼(結城少将)
유키 번주 → 후쿠이 번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관위 종 5위하 지쥬 미카와노카미(従五位下 侍従 三河守),
종 4위하 사코노에곤쇼쇼(従四位下 左近衛権少将),
종 3위 곤주나곤(従三位 権中納言),
정 3위(正三位), 추증 정 2위(贈正二位)
씨족 도쿠가와 씨하시바 씨유키 씨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부모 부 :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 : 죠쇼인
양부 : 도요토미 히데요시, 유키 하루토모
배우자 정실 쓰루코(유키 하루토모의 양녀, 에도 시게미치의 딸)
파일:Fukui-C-3134.jpg
후쿠이 성의 유키 히에야스 동상

유키 히데야스(틀:Ja-y, 1574년 3월 1일 - 1607년 6월 2일)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차남으로 에치젠 국(越前国) 후쿠이 번(福井藩)의 초대 번주이다.


일생

출생

157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으로 도토미 국(遠江国) 하마마쓰(浜松)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에야스의 거성인 하마마쓰 성이 아닌 성 아래의 우부미 마을(宇布見村)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미카와 국(三河国) 출신으로 신사(神社)의 샤닌(社人)이었던 나가미 요시히데(永見吉英)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측실인 오만노 가타(於万の方, 죠쇼인長勝院)이다. 오만은 원래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로, 오만이 히데야스를 임신하자 쓰키야마도노의 분노를 두려워한 이에야스가 중신 혼다 시게쓰구(本多重次)에게 보내 아이를 낳게 하였다.[1] 히데야스는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의 후손으로 당시 우부미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나카무라 마사요시(中村正吉)의 저택에서 태어났는데, 이 때 부친 이에야스가 나카무라 마사요시의 집에 직접 심은 소나무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2] 이런 인연을 이유로 후쿠이 번의 히데야스 후손들은 참근교대 때마다 나카무라 가문으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는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3]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이다.[4]

불행한 유소년기

어린 오기마루는 이에야스의 미움을 받아 3세때까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복형 노부야스(信康)는 오기마루를 가엾게 여겨 아들로 인정하도록 이에야스를 설득하였다.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으로 자결한 후 집안의 후계자가 될 뻔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양자 겸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생부와 양부의 이름을 하나씩 물려받은 히데야스(秀康)라는 이름을 얻었다.

청소년기 및 요절

1587년 규슈 정벌에 첫 출진을 한 후 여러가지 전공을 세워 히데요시의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아들 쓰루마쓰(鶴松)가 탄생하자 유키 하루토모(結城晴朝)의 양자 겸 조카사위가 되어 11만 1천 석의 다이묘 지위를 물려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67만고쿠의 후쿠이(에치젠) 번주에 임명됐으나 1607년 매독으로 짐작되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자녀

  • 정실 쓰루코(鶴子) : 에도 시게미치의 딸, 유키 하루토모의 양녀
  • 측실 오카야마(岡山) : 나카가와 이치모토(中川一元)의 딸
  • 측실 고마(駒) : 미타니 씨(三谷氏)
    • 3남 마쓰다이라 나오마사(松平直政)
  • 측실 나오(奈和) : 조쥬인(長寿院), 츠다 노부마쓰(津田信益)의 딸
    • 6남 마쓰다이라 나오요시(松平直良)
  • 측실 혼료인(品量院) : 미요시 나가토라(三好長虎)의 딸

에피소드

  • 당대 무장 중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지닌 무장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고, 뛰어난 무용과 강직한 성격, 큰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히데요시의 인질로 지내던 시절, 후시미(伏見)의 마방에서 승마 연습을 하던 도중 히데요시의 총신 중 한 명이 히데야스에게 다가와 마술을 겨룬다는 명목 하에 말머리를 나란히 하였다. 히데야스는 나의 허락 없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달린 것은 무례 라고 주장하며 총신을 베어 죽였다. 이를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리라는 주변의 요청을 묵살하고 나의 양자에게 소홀히 대한 것은 곧 내게 무례를 범한 것과 같다. 히데야스의 행동은 옳다며 오히려 칭찬하였다고 한다.[5]
  • 동생 히데타다의 쇼군 취임 축하 잔치 자리에 참석했을 때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와의 자리 양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쇼군의 형인 히데야스의 신분을 감안해 히데야스에게 윗자리를 양보했으나, 히데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공식적으로는 자신과 같은 곤주나곤(権中納言)의 지위이며 더욱이 자신보다 빨리 임명되어 선배의 입장이므로 윗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결국 히데타다의 중재로 히데야스가 윗자리를 차지했지만 이를 본 사람들은 히데야스의 예와 겸손함에 감탄하였다고 한다.[6]
  • 총포를 소지한 채로 에도로 향하던 중,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검문소에서 에도에 입성하는 다이묘들은 총포를 소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며, 히데야스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이유로 제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가문 내에서도 쇼군의 형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던 히데야스는 이 같은 처사에 격분하여 관리들을 성토하며 수하에게 관리들의 처단을 명령하였고, 놀란 관리들은 에도로 도망쳤다. 이를 전해들은 히데타다는 히데야스를 처분할 수는 없고, 단지 히데야스의 손에 관리들이 살해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사태를 수습하였다.[7]

주석

  1. 혼다 시게쓰구가 히데야스의 출생과 양육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오만의 임신을 알게 된 쓰키야마도노가 격노하여 오만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을 혼다 시게쓰구가 우연히 발견하여 제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는 설, 둘째는 쓰키야마도노의 화를 두려워한 오만이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쳐 오자 혼다 한에몬이 다시 혼다 시게쓰구에게 알려 혼다 시게쓰구가 오만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설, 셋째는 이에야스가 오만에게 혼다 시게쓰구의 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으라고 명령하였으나 오만은 이를 거부하고 친척이자 한때 이에야스의 시녀였던 혼다 한에몬의 백모에게로 가 아이를 낳았다는 설 등이다. 「에치젠 가전(越前家伝)」.
  2. 하마마쓰시/중요문화재 나카무라가 저택
  3. 나머지 한 명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었다고 하나 일설에 따르면 나가미 사다치카(永見貞愛)라는 인물이 바로 이 히데야스의 또다른 쌍둥이 형제라고도 한다. 당대에는 둘 이상을 낳는 것은 짐승들에게나 있는 일이라고 하여 쌍둥이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일각에서는 히데야스가 부친 이에야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히데야스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바쿠후 부녀 계보(柳営婦女伝系)』 제 1권 속군서류종완성회(続群書類従完成会).
  4. 일설에 따르면 히데야스가 동자개(빠가사리, 일본어로는 기기ギギ)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5. 『도쿠가와 제가계보(徳川諸家系譜)』, 속군서류종완성회(続群書類従完成会), 1992년.
  6. 『도쿠가와 제가계보(徳川諸家系譜)』, 속군서류종완성회(続群書類従完成会), 1992년.
  7. 『후쿠이 현사(福井県史)』 통사편 3
  8. 「오오쿠보 가류서(大久保家留書)」.
전임
없음
제1대 후쿠이 번 번주
1601년 ~ 1607년
후임
마쓰다이라 다다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