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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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환

원숭환(袁崇煥, 1584년 - 1630년)은 명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자는 원소(元素)이며, 현재 광동성 동관 출신으로 하카족이었다.

뛰어난 전략으로 요동과 요서(현재 요녕성 남부)에서 후금군에 승리해 삼국 시대의 이름난 군사인 제갈량에 비견되면서 찬사를 받았다. 군사에 대해서도 배려 깊은 인물이었지만, 명 왕조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처형됐다.

생애

1619년 만력 47년 3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에 급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문관이었다. 복건 지역의 지방관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군사에 대해 토론을 좋아했다는 일화에서 알수 있듯이 이미 관직에 오를 때부터 군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진사에 급제한 해는 후금의 군대에 맞서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 10만 군사가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때이기도 하다. 이후 명나라의 요동과 요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듬해인 1620년만력제가 죽고,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9월 26일 재위 29일만에 신하에게 독살당해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1622년 천계 2년에 병부 직방 주사에 임명됐다. 이 때, 위장을 하고 혼자서 적의 진영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영원성 개축(또는 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에 귀국 후 여진족과 국경 지대인 요동 지역 방위를 위해 지원했다. 그리고 산해관의 외곽으로 영원성 (현재의 흥행성 현성)을 축성했다. 이 성은 성벽의 높이는 10.2m, 성벽의 두께는 기저부에 약 9.6m, 상단에 약 7.7m이며, 거의 사각형이며, 4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르투갈에서 최신식 대포( "홍이포")를 들여와 성에 설치하여 총병 만계, 참장 조대수의 보좌를 받아 병사를 잘 훈련시켰다.

1626년 천계 6년 1월, 누르하치의 후금군이 쳐들어왔지만, 이들을 격퇴(영원성 전투)했고 공적으로 병부시랑 요동순무 주지관외 군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627년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홍타이지를 격퇴하였다.

숭정 원년 (1628년)에는 병부상서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가 되었다. 동시에 가도(皮島)를 거점으로 교역을 하고 있던 명나라 하급 장교의 모문룡을 직무 태만의 이유로 주살했다.

그러나 모문룡의 부하들이 청나라에 투항했고, 홍타이지는 장성을 우회하여 북경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명나라에 간자를 보내 내시를 매수하여 원숭환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그러자 시기심이 강한 숭정제도 쉽게 그 소문을 믿었고, 당시 엄당의 잔당의 부활을 노리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온체인과 왕영광(王永光)의 이익과 잘 맞아 떨어졌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를 지을 만큼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던 자였다.[1]

1630년 9월 22일 숭정 3년 결국 북경 방위를 위해 급하게 달려온 원숭환을 모반 혐의로 능지형으로 처형했다. 혹자는 이것을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2]

사후

1631년 10월 28일 그의 사후 그를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 등은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이로써 명나라는 자신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영원성과 금주성을 잃어버렸다.[3]

원숭환의 처형 후, 그 일족은 거처를 잃고 유랑민이 되었지만,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후금군에 입대하여 공을 세웠고, 영고탑의 한군팔기에 편입되었다.

그의 자손은 청에 관리 생활을 했으며, 청나라 말기에는 원숭환 7세 손자인 부명아(원세복)가 중국 내륙의 신강 반란을 진압에 공을 거두었고, 길림장군까지 승진했다. 또 그의 장남 원수산(1860년 - 1900년)도 팔기병을 이끌고, 광서 20년(1894년)부터 다음 해에 걸친 청일 전쟁 등에서 싸웠다. 또한 흑룡강 장군이 되어, 광서 26년(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의 난에서는 만주로 침입한 러시아의 군대와 싸우지만 대패했고, 처자식을 직접 죽인 후 향년 41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김용이 명나라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쓴 소설 《벽혈검》에서 원숭환의 남겨진 자식 원승지가 아버지의 원죄를 풀기 위해서 활약하는 모습을 설정으로서 그리고 있지만 ‘원승지’ 자체가 가공의 인물로, 픽션이다.

같이 보기

주석

  1. 한명기 명지대 교수. “병자호란 다시 읽기 (51) - 원숭환의 죽음과 그 영향”. 서울신문. 
  2. 張伯楨, 《袁崇煥遺集》
  3. 병자호란 57, 대릉하성의 비극 (2),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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