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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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야구 팀 정보2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틀:Ja-y,영어: Yokohama DeNA BayStars)는 요코하마 시를 연고로 하는 일본의 프로 야구 구단이며, 센트럴 리그 소속 구단이다.

1949년 11월 22일다이요 웨일스(大洋ホエールズ)라는 이름으로 창단, 1960년에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제패했다. 자회사는 일본의 민영 방송사 중의 하나인 TBS 이며,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쓰고 있다. 최근에 일본 시리즈 우승한 연도는 1998년이다.

2011년 11월 4일 일본의 대표적인 모바일 게임 업체인 DeNA사가 3일 TBS로부터 정식으로 요코하마를 인수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 따르면 DeNA사는 TBS가 가지고 있는 요코하마의 주식 69.23% 중 2.31%를 제외한 나머지를 65억엔에 사들임과 동시에 일본야구기구에 보증금 30억엔을 내면 정식으로 요코하마의 소유주가 된다.

그 동안 말이 많았던 구단 명칭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하기로 했다. 12월 1일에 열린 구단주 회의에서 3/4 이상의 동의를 얻어 인수가 정식으로 확정되었다.[1]

구단의 역사

임겸상점(이후 다이요 어업을 거쳐 현재는 마루하니치로 수산)의 실업 팀으로 1925년 5월에 설립되었다. 이후 1930년 제4회 전일본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첫 도전을 하면서 비록 초전 패퇴지만 전국 대회의 출전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이듬해 주고쿠 대회에서 4강에 오르는 등의 성적을 남겼으나 세계적인 대공황의 영향으로 제6회 전일본 도시 대항 야구 대회가 중지되어 연식 야구부만이 태평양 전쟁 시작 직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이후 종전 뒤 1946년 6월에 다이요 어업(1945년 12월에 개칭)의 연식 야구부로 부활해 같은 해 11월(일설에는 1947년 11월)에 경식 야구부로 변경되었다. 이후 도시 대항 야구에서 전국 대회의 단골이 되었고 1948년에는 국민 체육 대회에서 우승해 일약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49년 프로 야구의 리그 확장 정책으로 많은 기업들이 프로 야구 참여에 나섰고 다이요 어업 야구부에서는 도구라 가쓰키, 고우치 다쿠시, 도쿠아미 시게루 등의 주전 선수들이 새로운 구단인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뽑혀갔다. 야구부에 열정을 쏟고 있던 나카베 겐이치 전 사장은 이에 분개하여 자사 야구부의 프로 참여 방침을 밝혔다.

1949년 11월 22일주식회사 마루하 구단(株式会社まるは球団)을 설립하고 구단 이름은 잠정적으로 마루하 구단(まるは球団)을 자칭했다. 센트럴 리그에 가맹해 야마구치 현 시모노세키 시를 프랜차이즈로, 시모노세키 시립 경기장(시모노세키 구장과는 다름)을 홈구장으로 삼았다. 원래 다이요의 사장과 동일한 'は를 원형 그대로 マルハ'라고 표기해야 했지만 이것이 신문의 활자에 없었기 때문에 'まるは'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사회인 야구로서의 다이요 어업 야구부는 마루하 구단의 설립으로 인해 1949년 11월 30일자로 해산했지만 사회인 야구 시대의 선수에 구애받지 않는 나카베 사장의 정책으로 마루하 구단에 이적할 수 없던 선수를 위해 전 시모노세키(全下関) 팀을 만들어 1951년까지 활동했다.

시모노세키 시대

1950년 시즌 개막 후 다이요 웨일스(大洋ホエールズ)로 구단명을 변경하고 9월에는 사무소를 시모노세키 시에서 도쿄 도 치요다 구로 이전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나카지마 하루야스히라야마 기쿠지, 타이요 로빈스로부터 후지이 이사무하야시 나오아키를 넘겨 받았고, 우타카 이사무의 스카우트 활동으로 도큐 플라이어스에서 오자와 기요시나가모치 에이키치, 가타야마 히로시를 얻었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미야자키 다케시이마니시 렌타로를 얻어 구단을 보강하고 시즌을 시작했지만 리그에 가맹한 1950년에 5위, 1951년 6위, 1952년 4위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51년 부채산으로 경영이 악화된 히로시마 카프를 흡수 합병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지만, 히로시마 구단 관계자와 지역 시민들의 필사적 생존 운동으로 히로시마와의 합병 이야기는 흐지부지됐다. 1952년 9월 7일의 쇼치쿠 로빈스 전(교토 니시쿄고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에서 당시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인 연장 20회까지 갔으나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오사카 시대

1953년 1월 10일 이전 년도의 "시즌 승률 3할 미만의 구단에게 처벌을 내린다"는 합의로 인해 그 해당 구단이 된 쇼치쿠 로빈스와 대등 합병해 센트럴 리그는 6팀 체제가 되었다. 구단의 명칭은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大洋松竹ロビンス)로 개칭했고, 이듬해인 1954년 통칭인 '요쇼'(洋松)가 들어가는 요쇼 로빈스(洋松ロビンス)로 개칭했다.

1953년 시즌은 구단의 합병·통합을 결정하면서도 운영 회사의 완전한 합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프랜차이즈도 다이요 구단의 시모노세키 시와 쇼치쿠 구단의 교토 부에서 병립하는 체제가 되었다. 구단 운영도 2개에서 1개의 구단을 운영하는 말처럼 변칙적인 형태가 되어 선수들의 연봉도 각각의 구단에서 지급하게 되었다. 주최 경기는 흥행면의 이점을 살려 오사카 구장에서 진행되었다. 합병 후 1년차의 시즌 종료 후인 12월 26일에 구단 운영 회사가 신설 합병으로 정식 통합하며(당시 회사 이름은 주식회사 다이요 쇼치쿠 구단(株式会社大洋松竹球団)) 구단 사무소도 오사카 구장에 위치하게 되었다.

오사카 시대의 구단 성적은 1953년 5위, 이듬해인 1954년에는 32승 96패 2무의 최하위로 우승 팀인 주니치 드래곤스와 55경기, 2위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와 22경기의 큰 차이로 벌어지는 대참패였다.

가와사키 시대

1954년 12월 11일을 마지막으로 쇼치쿠는 구단 경영에서 물러나고 나카베 겐키치가 오너가 되었다. 구단 명칭을 다시 다이요 웨일스(大洋ホエールズ)로 변경했고 보호 지역을 가나가와 현으로 이전했다. 가와사키 시가와사키 구장을 홈구장으로 하는 '신생 웨일스'로 다시 시작했으나 1년차인 1955년의 성적은 31승 99패로 1위인 요미우리와는 61.5경기 차였으며 5위인 고쿠테쓰와도 큰 차이가 난 채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이후 팀은 로빈스 시대인 1954년부터 1959년까지 6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1956년 메이지 대학에서 아키야마 노보루, 도이 기요시, 이와오카 야스히로, 구로키 히로시게, 오키야마 데루토시의 5명이 입단했다. 같은 학교의 선수가 같은 구단에 동시에 5명이 선발되는 것은 드문 경우여서 '메이지 5인방'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이목을 끌었다. 에이스인 아키야마가 매년 혹사를 견디어 냈고 요미우리에서 이적한 아오타 노보루가 세 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다.

1960년 이전까지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감독이었던 미하라 오사무를 감독으로 초빙했다. 미하라는 신인 곤도 아키히토와 시즌 중에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획득한 스즈키 다케시로 2-유간을 굳혀 아키야마와 시마다 겐타로를 중심으로 한 투수력을 앞세워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이끄는 요미우리와 우승 경쟁을 다퉈 전년도 최하위에서 리그 우승을 한다. 그 해 일본 시리즈에서도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를 상대로 모두 1점차 승리로 4연승하며 일본 제일을 차지했다.

1962년1964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와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1963년에는 최하위인 히로시마와 한 경기 차인 5위에 머물렀다. 이후에는 점점 우승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미하라는 1967년에 감독을 퇴임했다. 메가톤 타선이라는 강력한 타선과 곤도 가즈히토, 클리트 보이어, 구와타 다케시, 마쓰바라 마코토, 히라마쓰 세이지, 존 시핀 같은 이름난 선수들을 보유했으나 팀의 전체적인 전력이 약했고 1965년 이후 팀의 승률은 1969년에서 1971년의 3년 간을 제외하면 본거지 이전까지 5할을 넘지 못했다.

1965년에서 1973년에 걸친 요미우리의 V9 동안 다이요는 강력한 타선으로 요미우리의 투수진을 붕괴시켰는데 빈약한 투수진이 비슷한 타선에 막혀 언제나 타격전의 양상을 보였다. 당시 요미우리와 타격으로 맞붙어 이길 수 있는 대표적인 팀이 다이요였다. 그것도 양익 89m, 중견 118m의 가와사키 구장의 좁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3년에는 개막전부터 6월까지 혼전을 보이던 센트럴 리그에서 히로시마와 함께 선두 경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7월부터 서서히 침체되어 결과적으로 요미우리에게 선두를 내주고 우승 경쟁에서 밀려나 있던 야쿠르트에게도 밀려나 5위를 차지했다. 감독이었던 아오타 노보루가 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74년 팀은 5위를 기록했지만 마쓰바라가 처음으로 타율 3할을 기록하며 최다 안타를 획득했다. 다음 해인 1975년에도 5위로 시즌을 끝냈다.

1976년 가와사키에서 요코하마로 이전 계획을 획책하고 있던 다이요 구단은 요코하마의 새로운 야구장 건설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아스카다 이치오 요코하마 시장의 주선으로 국토 계획(현재의 프린스 호텔)의 출자를 받아 들였다. 따라서 다이요 구단의 지분율은 다이요 어업 55%, 국토 계획 45%가 되었다.

1977년, 오너였던 나카베가 1월에 사망하면서 모회사인 다이요 어업은 장남인 나카베 도지로가, 다이요 구단주는 삼남인 나카베 신지로가 각각 물려 받았다. 마쓰바라나 요네다 게이자부로 등의 수비의 명수들 이외에 보이어, 시핀, 미얀의 호수비를 자랑하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으로 1970년대의 다이요 내야진은 실력을 뽐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야마시타 다이스케, 모토이 미쓰오다카기 유타카에 철벽의 2-유간이 계승되었다. 이 때 '2루수가 역 싱글 포구 뒤 짧은 토스, 그 순간에 원 바운드 송구로 주자 아웃' 같은 플레이를 실제로 하고 있었다.

요코하마 시대

다이요 시대

1978년 국토 계획의 주도로 요코하마 시 나카 구에 건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도시 이름을 넣어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横浜大洋ホエールズ)로 개칭했다. 요코하마의 초등학생이 가입하기 쉬운 팬클럽 창설 등 영업 체제 개혁을 수반한 운영에 의해 팬이 증가했다. 이 해에 국토 계획이 후쿠오카 야구 주식회사(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스)를 인수했기 때문에 야구 협약에 저촉되어 회사가 가진 다이요 구단의 주식은 닛폰 방송과 TBS(도쿄 방송)에 2:1의 비율로 매각되었다. 이후 2002년 초까지 구단 지분율은 다이요 어업(이후 마루하) 55%, 닛폰 방송 30%, TBS 15%를 차지했다.

요코하마로 이전한 첫 해에는 4위, 1979년에는 2위로 약진했으나 시즌이 끝나고 감독었던 벳토 가오루가 퇴임해 이듬해에 다이요 구단의 전무 이사·구단 대표로 취임했다. 1980년 신인 지명 회의에서는 지역의 대학인 도카이 대학하라 다쓰노리를 1순위로 지명했으나 교섭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도이 기요시가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4위로 시즌을 마쳤고 1981년에도 부진에 이어 도이 감독이 9월 24일부터 휴양으로 팀을 떠나면서 최하위에 머물렀다. 1982년 나가시마 시게오를 감독으로 초빙하는 포석으로 나가시마와 친분이 있던 세키네 준조를 감독으로 맞이했으나 나가시마의 영입에는 실패했다. 또한 '주니어'라고 불리었던 투수 세키네 히로후미의 입단 과정에서 닛산 야구부와의 협상이 결렬되며 시즌을 5위로 마쳤다. 1983년 3위로 A클래스에 입성했지만 1984년 다시 최하위로 전락하며 세키네 감독이 사임했다.

1985곤도 사다오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다카기 유타카, 가토 히로카즈, 야시키 가나메슈퍼카 트리오가 결성되어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엔도나 사이토 아키오의 투수진은 개선되지 않아 팀 성적은 4위에 그쳤다. 이듬해 1986년 4위를 기록하며 감독이었던 곤도는 2년 만에 퇴임했다.

1987년에는 히로시마에서 4회 우승을 이끌었던 고바 다케시를 감독으로 맞이했으나 3년 동안 5위, 4위, 최하위로 한 번도 A클래스에 입성하지 못하는 부진으로 1989년에 팀 부진의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이후의 1998년 우승 당시의 주력 선수들을 획득하는 등 리빌딩의 측면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스도 유타카가 감독으로 취임해 3위로 팀을 A클래스에 이끌었으나 1991년에는 5위로 B클래스로 전락하고 말았다. 1992년 개막 이전에 사임해 수석 코치였던 에지리 아키라가 감독 대행을 맡다가 정식 감독으로 승격해 팀을 이끌었으나 5위로 시즌을 끝냈다. 한편 에지리 감독 시절에 모리타 고키사사키 가즈히로의 더블 스토퍼 체제를 확립했다.

1992년 11월 11일에 모구단인 다이요 어업이 법인 조직의 정체성 실현을 위해 이름을 마루하로 개칭한 것에 따라 웨일스도 지역에 밀착한 시민 구단을 목표로 하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横浜ベイスターズ)로 구단 명칭을 변경했다. 이듬해 4월에 회사 이름도 기존의 '주식회사 다이요 구단'에서 주식회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株式会社横浜ベイスターズ)로 변경했다. 구단 이름에서 회사 이름인 '다이요'를 분리하고 도시 이름인 '요코하마'만 씌운다는 방침은 CI의 도입 결정시 정해져 있었지만 개칭 후 구단 이름은 사내·외에서는 당초의 애칭을 그대로 사용한 '요코하마 웨일스'가 된다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오너였던 나카베 케이지로는 한때 다이요 어업의 주력 사업이었던 상업 포경의 규제가 강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우리 회사는 이제 더 이상 고래만에 의존할 수 있는 여유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애칭도 변경해야 한다"고 말하며 내부에 새로운 애칭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애칭은 '요코하마 베이브릿지'에서 따온 '베이스타스'가 되었다. 또한 베이스타스 선수가 마루하의 CM에는 일절 출연하지 않는 것이 약속되었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대

1993년 곤도 아키히토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구단 이름의 변경에 따라 유니폼·구단 깃발·마스코트 캐릭터를 새롭게 단장했다. 이 해 시즌 종료 후부터 시작된 프리 에이전트 제도로 요미우리의 고마다 노리히로를 획득했으나 오랫동안 팀에서 뛰었던 다카기 유타카나 야시키 가나메, 야마자키 겐이치, 이치카와 가즈마사 등의 주전 선수가 대거 해고되었다. 베이스타스 출범 첫 해는 5위를 기록했다.

1994년 고마다 이외에 사에키 다카히로하루 도시오 등을 기용하며 전력 강화를 도모했으나 혼전의 시즌을 거치며 최하위로 끝냈다.

1995년 결과적으로 4위로 끝났으나 12년 만의 5할 승률에 복귀했다. 하지만 앞선 곤도에 대한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했고 결국 임기 만료로 퇴임했다. 곤도의 후임으로는 오야 아키히코가 부임했으며 이후에 수위 타자가 되는 스즈키 다카노리가 3번·좌익수로 기용되는 등 젊은 선수들이 부상했다.

1996년 4월에 선두를 질주하며 "센트럴 리그 태풍의 눈"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5월 이후 하락세를 보이며 결국 5위로 시즌을 마쳤다.

1997년 곤도 히로시를 배터리 코치로 맞이했다. 시즌 후반에 1위인 야쿠르트를 위협하며 추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2위에 머물렀다. 감독인 오야가 2년 임기를 마치고 사임하면서 곤도가 차기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1998년, 마무리인 사사키를 부동의 중심으로 하는 투수진과 "한 번 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는 머신 건 타선이 맞물려 10월 8일에 3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를 상대로 4승 2패로 일본 제일을 차지했다. 신인 선수 지명 회의에서는 요코하마 고등학교의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1순위 지명했으나 교섭권 획득에 실패하고, 후루키 가쓰아키를 지명했다.

1999년에는 머신 건 타선이 절호조에 이르러 팀은 시즌 타율 .294, 용병인 로즈가 153타점을 기록하며 팀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투수진은 가와무라 다케오가 17승을 올리며 활약했지만 미우라 다이스케의 부진이나 노무라 히로키·사사키의 부상 등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3위로 끝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사사키가 메이저 리그 시애틀 매리너스로 이적했다.

2000년 긴조 다쓰히코가 신인왕과 수위 타자의 2관왕을 차지했지만 투·타 모두 부진에 부상자 등으로 우승 경쟁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2년 연속 3위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 후 곤도 감독이 퇴진했으며 로즈와 고마다가 퇴단했다. 팜 조직의 이름을 쇼난 시렉스(湘南シーレックス)로 개칭하고 독립 채산을 목표로 활동에 나섰다. 감독에는 곤도의 뒤를 이어 모리 마사아키가 취임했다.

2001년 이 해에는 순위 결정 방식이 달랐고 5년 연속 A클래스(3위)가 되었다(이 해의 순위에 관해서는 후술).

2002년 개막전부터 기록적인 침체가 계속되어 9월 25일에 감독인 모리가 시즌 종료를 맞지 못하고 휴양을 강요당하며(최종 승률 .363) 3년 계약의 두 번째 해에 사실상 해임당했다. 1월 26일 모회사(최대 주주)가 마루하에서 닛폰 방송으로 변경되었지만 당시 닛폰 방송의 계열사인 후지 텔레비전(현재의 후지 미디어 홀딩스)이 야쿠르트 구단의 주식을 20% 이상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TBS(도쿄 방송)으로의 이행이 프로 야구 오너 회의에서 승인되었고 구단주가 당시 TBS의 사장이었던 스나하라 유키오로 바뀌었다(자세한 내용은 마루하에서 TBS의 필두 주주 교체 문단을 참고). 이를 기점으로 1978년 이후 닛폰 방송에 독점 중계권을 빼앗겨 상실했던 TBS의 라디오 중계가 부활했다.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야간 중계 이외의 경기나 요미우리 전 이외의 주말의 낮 경기를 'THE 베이스볼 베이스타스'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시작했다. 또한 두 개의 응원단이 통합하여 '전국성패회'가 발족하였다. 모리의 후임으로는 야마시타 다이스케가 부임했다.

2003년 젊은 선수와 공격을 중시하는 야구를 펼쳤으나 모두 실패하고 승률도 전년도를 밑도는 .324를 기록했다. 5위 히로시마와 22.5 경기 차 이상으로 벌어지며(2003년 시즌에 우승한 한신과 5위 히로시마의 경기 차이는 20경기) 45승 94패 1무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시즌 90패에 도달했는데 이는 1970년의 야쿠르트 이후 33년만의 일이었다.

2004년에는 4월 종료 시점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투수진의 부진으로 서서히 추락했고 시즌 종료에 5위 싸움을 했으나 최종전에서 패해 히로시마와 승률 0.00092라는 근소한 차이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45년 만에 3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고 감독이었던 야마시타가 사임했다. 오프 시즌에 이치바 야스히로의 금전 수수 문제로 오너가 스나하라 유키오에서 TBS의 부사장인 와카바야시 기요시로 교체되었다. 감독으로는 우시지마 가즈히코가 부임했다.

2005년에는 그 동안 부진했던 투수진이 부활하며 4년 만에 A클래스인 3위로 부상했다. 특별 고문으로 우시지마의 친구인 이시바시 다카아키(돈네루즈)를 발탁해 선수단과 팬들 간의 연결 고리를 담당하게 되는 등 새로운 팬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6년은 투수진의 선발진 약화와 이중 모션 금지로 인한 영향으로 주력 투수들이 잇따라 부진에 빠지며 5월까지 분위기가 침체되었다. 6월부터는 무라타 슈이치요시무라 유키 등 젊은 야수들의 대두와 우시다 시게루 등 젊은 투수들을 기용했으나 패배를 넘지 못하고 최하위에 그쳤다. 구단 측은 연임을 희망했지만 우도는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인 9월 3일에 퇴임을 발표했다. 후임은 오야 아키히코가 10년 만에 복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4월 3일 스포츠 활동을 통해 지역 공헌을 목표로 하는 NPO 법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스포츠 커뮤니티'를 설립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사장은 팀의 OB 출신인 히라마쓰 마사지, 부이사장에는 하타야마 히토시가 취임했다. 7월 1일 자회사인 주식회사 베이스타스 소프트를 인수합병했다. 12월 1일에 자본금이 6억 5천만 엔에서 1억 엔으로 감소했으며 '팀 운영 총괄'이라는 GM의 자리에 닛산 자동차 경식 야구부의 감독을 맡은 무라카미 다다노리가 부임했다. 오프 시즌에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데라하라 하야토다무라 히토시와의 트레이드로 영입했으며 요미우리의 니시 도시히사오다지마 마사쿠니에 현금을 더하는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이 해 팀의 유일한 두 자릿 수 승수를 거두었던 투수 가도쿠라 겐이 연봉 평가에 불만을 가져 FA를 선언하고 요미우리로 이적해 보상 선수로 구도 기미야스를 획득했다.

2007년에는 이적조와 베테랑 세력의 활약으로 전반기에는 임시 선두로 상위권을 맹추격하며 3위로 끝냈다. 후반기에는 계속된 연패를 당해 최종전 이전에 연패를 끊었으나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4위로 시즌을 마쳤다. 무라타가 구와타 다케시 이후 31년 만의 홈런왕 획득과 구단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100타점을 돌파했고 미우라의 35이닝 연속 무실점, 데라하라의 2경기 연속 완봉승 등 주력 선수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1월 15일 산노 능률대학과 제휴 업무 협약을 체결해 팜인 쇼난 시렉스를 스포츠 비즈니스의 수업에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에는 개막전 투수로 유력했던 한신 킬러 미우라의 복귀가 늦어지며 한신에게 개막 3연패를 당했다. 이후에도 침체가 계속되어 2년 만에 최하위에 머물렀다. 이 해에 도약 한 우치카와 세이이치 이외에 무라타, 요시무라의 강력한 타선을 가졌으나 투수진의 붕괴로 최하위로 침몰했고 2003년 이후 5년 만에 90패를 기록했다. 선수의 타율(우치카와의 .378)이 팀 승률(.338)을 상회하는 2리그 분열 후에는 최초의 진기록도 기록되었다. 성적의 책임을 물어 수석 겸 타격 코치인 히로타 스미오 등 4명의 코치를 교체했다. 주전 포수인 아이카와 료지가 FA를 선언해 야쿠르트에 이적했다. CS 방송의 홈구장에서의 중계권을 Jsports에서 TBS 소속 TBS 뉴스 버드에 이행했다.

2009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무라타의 부상 등으로 인해 개막 6연패를 당하는 등 초반부터 부진해 5월 18일에 오야 감독의 무기한 휴가(사실상 해임)가 발표되었다. 2군 감독인 다시로 도미오가 다음 날부터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팀을 반전시킬 수는 없었고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다.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다시로 감독 대행이 유임되지 않고 2군 감독으로 복귀했다. 11월 11일 후임 감독으로 요미우리의 투수 코치를 맡고 있던 오바나 다카오를 초빙했으며 요코하마 항을 주유하는 '마린 루즈'에서 취임 기자 회견을 가졌다.

2010년 지바 롯데의 에이스 시미즈 나오유키를 다인 트레이드로 획득했고 FA 선언을 한 지바 롯데의 하시모토 다스쿠와 닛폰햄의 터멜 슬레지를 영입하는 등 대규모 보강을 실시했다. 3월 31일 대 요미우리 전 승리로 공동 3위가 되며 히로시마가 6위로 시즌을 시작했는데, 요코하마의 '최하위에서의 탈출'은 2008년 4월 5일 이후 284번째 경기(725일 만)이며 라쿠텐의 이전 기록인 262경기(2005년 4월 9일 ~ 2007년 3월 24일)를 대폭 상회하며 경신했다. 그러나 교류전 이후 침체되어 최하위로 전락하며 한 번도 순위가 상승하지 않고 9월 7일 요미우리 전에서 패배하면서 5년 연속 B클래스가 확정되었다. 9월 25일 주니치 전 패배로 3년 연속 최하위가 확정되었고 9월 28일의 야쿠르트 전에서 패배하며 프로 야구 사상 첫 3년 연속 90패, 10월 6일 한신 전에서 패배하면서 130경기 제였던 1955년 이후 55년 만에 시즌 95패를 기록했다. 코치인 시마다 마코토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우치카와가 FA로 소프트뱅크에 이적했다. 8월에는 2010년 시즌 종료와 함께 '쇼난 시렉스'라는 명칭의 2군을 1군과 같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변경하는 것으로 일본 프로 야구 실행 위원회의 승인을 얻었다.

2011년 FA로 닛폰햄의 모리모토 히초리를 영입했다.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 요코하마 구장에서 야쿠르트와 시범 경기를 진행하던 중이었으나 구장 전체가 흔들리고 경기가 중단되어 선수와 관중들이 그라운드로 피난했다. 당초 3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개막전이 지진의 영향으로 4월 12일로 연기되어 4년 만에 홈구장에서 개막전을 가지게 되었다. 개막 상대인 주니치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2000년 이후 11년 만에 개막 카드를 역전했으나 5월 이후 하락세를 타며 교류전에서는 원정에서 1승(9패 2무)을 기록하며 7승 13패로 11위로 마쳤으며 7월 이후에는 연승도 없이 전반기를 25승 44패 6무로 승차가 -19가 되었다. 후반전에도 하락세는 계속되어 9월 27일 요미우리 전(요코하마 구장)에서 패하면서 B클래스가 확정되었고 10월 9일 한신 전(요코하마 구장)에서 패하면서 4년 연속 최하위가 결정되었다. 결국 47승 86패 11무로 1위와 27.5경기, 5위 히로시마와 11.5경기 차이로 6위에 머물렀다. 팀 방어율은 6년 만에 3점대로 복귀했으나 2년 연속 최하위로 승률도 1957년 ~ 1961년의 긴테쓰 이후 50년 만에 4년 연속 3할대로 부진했다. 오프 시즌에 무라타가 FA를 선언해 요미우리로 이적했고 슬레지와 브렛 하퍼가 해고되었다.

10월 19일 TBS HD가 보유하고 있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주식의 대부분을 DeNA에 양도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에 합의했다. 10월 22일 최종전이 끝난 이후 감독인 오바나와 1군 코치진의 휴양이 발표되었다. 11월 4일 TBS HD가 소유한 주식의 일부(TBS HD 소유 640,000주(의결권 비율 49.23%), BS-TBS 소유 230,000주(의결권 비율 17.69%))를 12월 2일 자로 일본 프로 야구 기구 실행 위원회 및 오너 회의의 승인을 얻는 것을 조건으로 DeNA에 양도함으로써 양 회사 간의 정식 계약(취득 가격 주당 7,471 엔, 총액 65억 엔)을 맺었다. 또한 새 구단명으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신청되었다. 11월 22일 오바나 감독을 비롯한 6명의 코치의 해임이 발표되었다. 12월 1일 일본 프로 야구 오너 회의 및 실행 위원회에서 DeNA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인수와 오너 회사 변경이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2일 구단 주식이 양도되었고 상호 변경에 의해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横浜DeNAベイスターズ)로 새롭게 출발했다. 구단 GM은 요미우리 OB인 다카다 시게루가 취임했지만 감독 인선에는 난항을 겪었다. 당초에는 요코하마 OB이기도 한 구도 기미야스가 후보가 되었으나 투수 코치 인선을 둘러싸고 구단과 대립하여 12월 5일 다카다 GM에 의해 파혼되었다고 회견에서 밝혀졌다. 다음날인 12월 6일 후보였던 나카하타 기요시의 이름이 올라 12월 9일에 감독 취임과 함께 새로운 구단의 로고가 발표되었다.

DeNA 시대

2012년 모회사의 변경에 따라 유니폼·구단 깃발·마스코트 캐릭터를 변경했다. 1월 29일 퀸스 스퀘어 요코하마 퀸스 서클에서 신 유니폼 발표 행사를 실시했다. 3월 18일에는 지금까지의 구단 마스코트인 홋시·홋시나·홋시조의 졸업과 함께 새로운 마스코트인 DB 스타맨의 취임을 발표했다.

요미우리에서 자유 계약으로 알렉스 라미레스를 영입했고 같은 요미우리에서 FA로 쓰루오카 가즈나리, 주니치에서 FA로 고이케 마사아키를 영입하면서 각각 4년 만에 베이스타스에 복귀했다. 한편 무라타의 보상 선수로 요미우리에서 후지이 슈고를 획득했다. 3월 30일 시즌 개막전인 한신 전(교세라 돔 오사카)은 5대 5 무승부로 끝났고 4월 1일 같은 시리즈에서 6대 2로 구단 명칭 변경 후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어진 4일부터 10일까지, 22일부터 5월 1일까지 2차례에 걸쳐 6연패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이지 못했다. 교류전은 9승 14패로 10위에 머물렀고 7월 7일 주니치 전에서 패배하며 자력 우승이 사실상 소멸하고 말았다.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인 야쿠르트 전(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이번 시즌 첫 동일한 시리즈에서 3연승을 거두지만 전반기를 최하위로 끝냈다. 이후 9월 15일의 야쿠르트 전(메이지 진구 구장)에 패배해 B클래스가 확정되었다. 9월 29일의 요미우리 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 승리하고 이번 시즌 첫 5연승을(2무 포함)하지만 136경기째인 30일의 주니치 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패배하며 5년 연속 최하위가 결정되었다. 10월 7일 대 요미우리 전(도쿄 돔)에서 패배하면서 시즌 내 요미우리 원정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고 시즌이 끝나며 도쿄 돔에서는 센트럴 리그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 결국 1위 요미우리와는 40경기 차, 5위 한신과 9.5경기 차를 기록했고 시즌 전적 46승 85패 13무로 센트럴 리그 5구단에 모두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다.

2013년 주니치에서 자유 계약으로 토니 블랑코, 엔옐버트 소토, 호르헤 소사의 세 선수를 획득했다. 또한 한 때 팀의 주력 타자였던 소프트뱅크의 다무라 히토시를 포함해 3명의 선수가 요시무라 유키, 야마모토 쇼고 등 3명의 선수와 3대 3 트레이드로 입단했다. 다무라는 7년 만에 친정팀인 베이스타스에 복귀하게 되었다. 교류전은 7승 17패로 최하위에 머물렀으며 9월 24일 대 한신 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1대 6으로 패배하며 클라이막스 시리즈 진출 가능성이 소멸되었고 8년 연속 B클래스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10월 1일 야쿠르트가 요미우리에게 패배하며 6년 만에 최하위에서 탈출하게 되며 5위로 시즌을 마쳤다. 한편 야쿠르트와 한신, 주니치에게 위닝 시리즈를 기록했는데, 이 세 팀에게 위닝 시리즈를 기록한 것은 12년 만이었다. 시즌 종료 후 라미레스가 퇴단했다.

역대 감독

〈 〉은 재임 차수.

연도별 성적

연도 감독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타율 홈런 평균자책점
1950년 와타나베 다이리쿠 5위 140 69 68 3 .504 31 .273 111 4.47
1951년 나카지마 하루야스·아리마 기이치 6위 108 40 64 4 .385 37 .253 86 4.84
1952년 고니시 도쿠로 4위 120 58 62 0 .483 25 .248 57 3.68
1953년 고니시 도쿠로 5위 130 52 77 1 .403 37.5 .246 63 4.10
1954년 나가사와 다케오 6위 130 32 96 2 .250 55 .227 68 4.13
1955년 후지이 이사무 6위 130 31 99 0 .238 61.5 .209 51 3.69
1956년 사코하타 마사미 6위 130 43 87 0 .331 41 .208 74 3.15
1957년 사코하타 마사미 6위 130 52 74 4 .415 21.5 .229 63 3.10
1958년 사코하타 마사미 6위 130 51 73 6 .415 23.5 .215 78 2.75
1959년 모리 시게오 6위 130 49 77 4 .392 28.5 .214 73 3.47
1960년 미하라 오사무 1위 130 70 56 4 .554 - .230 60 2.32
1961년 미하라 오사무 6위 130 50 75 5 .404 21.5 .236 76 3.10
1962년 미하라 오사무 2위 134 71 59 4 .546 4 .242 100 2.73
1963년 미하라 오사무 5위 140 59 79 2 .428 24 .237 110 3.29
1964년 미하라 오사무 2위 140 80 58 2 .580 1 .255 134 3.03
1965년 미하라 오사무 4위 140 68 70 2 .493 23 .244 136 2.81
1966년 미하라 오사무 5위 130 52 78 0 .400 37 .247 116 3.74
1967년 미하라 오사무 4위 135 59 71 5 .454 25 .245 130 3.28
1968년 벳토 가오루 5위 133 59 71 3 .454 18 .236 131 3.71
1969년 벳토 가오루 3위 130 61 61 8 .500 11 .239 125 3.19
1970년 벳토 가오루 3위 130 69 57 4 .548 10 .241 106 2.75
1971년 벳토 가오루 3위 130 61 59 10 .508 8 .216 82 2.31
1972년 벳토 가오루 5위 130 57 69 4 .452 17 .242 135 3.66
1973년 아오타 노보루 5위 130 60 64 6 .484 5 .243 125 3.30
1974년 미야자키 다케시 5위 130 55 69 6 .444 17.5 .265 143 4.28
1975년 아키야마 노보루 5위 130 51 69 10 .425 21.5 .249 137 3.93
1976년 아키야마 노보루 6위 130 45 78 7 .366 32 .256 172 4.45
1977년 벳토 가오루 6위 130 51 68 11 .429 25.5 .268 176 4.94
1978년 벳토 가오루 4위 130 64 57 9 .529 7.5 .273 132 3.90
1979년 벳토 가오루 2위 130 59 54 17 .522 6 .266 135 4.05
1980년 도이 기요시 4위 130 59 62 9 .488 16 .259 135 4.18
1981년 도이 기요시 6위 130 42 80 8 .344 31.5 .252 105 4.41
1982년 세키네 준조 5위 130 53 65 12 .449 14.5 .250 125 3.92
1983년 세키네 준조 3위 130 61 61 8 .500 11 .272 137 4.52
1984년 세키네 준조 6위 130 46 77 7 .374 30.5 .263 100 4.55
1985년 곤도 사다오 4위 130 57 61 12 .483 14.5 .267 132 4.59
1986년 곤도 사다오 4위 130 56 69 5 .448 20 .264 84 3.81
1987년 고바 다케시 5위 130 56 68 6 .452 22.5 .259 113 4.26
1988년 고바 다케시 4위 130 59 67 4 .468 20.5 .273 85 3.93
1989년 고바 다케시 6위 130 47 80 3 .370 36.5 .260 76 4.07
1990년 스도 유타카 3위 133 64 66 3 .492 24 .266 90 3.94
1991년 스도 유타카 5위 131 64 66 1 .492 10 .269 66 3.74
1992년 스도 유타카·에지리 아키라 5위 131 61 69 1 .469 8 .249 97 3.75
1993년 곤도 아키히토 5위 130 57 73 0 .438 23 .249 87 3.83
1994년 곤도 아키히토 6위 130 61 69 0 .469 9 .261 107 3.76
1995년 곤도 아키히토 4위 130 66 64 0 .508 16 .261 114 4.37
1996년 오야 아키히코 5위 130 55 75 0 .423 22 .270 85 4.67
1997년 오야 아키히코 2위 135 72 63 0 .533 11 .273 105 3.70
1998년 곤도 히로시 1위 136 79 56 1 .585 - .277 100 3.49
1999년 곤도 히로시 3위 135 71 64 0 .526 10 .294 140 4.44
2000년 곤도 히로시 3위 136 69 66 1 .511 9 .277 103 3.92
2001년 모리 마사아키 3위 140 69 67 4 .507 .267 94 3.75
2002년 모리 마사아키 6위 140 49 86 5 .363 35.5 .240 97 4.09
2003년 야마시타 다이스케 6위 140 45 94 1 .324 42.5 .258 192 4.80
2004년 야마시타 다이스케 6위 138 59 76 3 .437 20 .279 194 4.47
2005년 우시지마 가즈히코 3위 146 69 70 7 .496 17 .265 143 3.68
2006년 우시지마 가즈히코 6위 146 58 84 4 .408 29.5 .257 127 4.25
2007년 오야 아키히코 4위 144 71 72 1 .497 9 .265 124 4.01
2008년 오야 아키히코 6위 144 48 94 2 .338 36.5 .266 145 4.74
2009년 오야 아키히코 6위 144 51 93 0 .354 42.5 .239 128 4.36
2010년 오바나 다카오 6위 144 48 95 1 .336 32 .255 117 4.88
2011년 오바나 다카오 6위 144 47 86 11 .353 27.5 .239 78 3.87
2012년 나카하타 기요시 6위 144 46 85 13 .351 41 .233 66 3.76
2013년 나카하타 기요시 5위 144 64 79 1 .448 23 .262 132 4.50
2014년 나카하타 기요시 5위 144 67 75 2 .472 14.5 .253 121 3.76
  • 2014년 시즌 종료 기준,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통산 성적 : 3724승 279무 4676패(승률 .443)

구단 기록

경기·승패·승률에 관한 기록

1950년부터 현재까지의 팀 순위, 붉은점은 일본 시리즈 우승을 나타냄
  • 리그 우승 : 2회
(1960년, 1998년)
  • 일본 시리즈 우승 : 2회
(1960년, 1998년)
  • A클래스 : 15회
(1960년, 1962년, 1964년, 1969년 ~ 1971년, 1979년, 1983년, 1990년, 1997년 ~ 2001년, 2005년)[2]
  • B클래스 : 50회
(1950년 ~ 1959년, 1961년, 1963년, 1965년 ~ 1968년, 1972년 ~ 1978년, 1980년 ~ 1982년, 1984년 ~ 1989년, 1991년 ~ 1996년, 2002년 ~ 2004년, 2006년 ~ 2014년)
  • 최다 승리 : 80승(1964년)
  • 최다 패전 : 99패(1955년)
  • 최다 무승부 : 17무(1979년)
  • 최고 승률 : .585(1998년)
  • 최저 승률 : .238(1955년)
  • 최다 연승 : 10연승(과거 5차례 기록이며 10연승을 기록한 것은 1999년)
  • 최다 연패 : 14연패(1955년, 2008년)
  • 최장 경기 시간 : 6시간 13분(1998년 8월 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연속 A클래스 진입 최장 기록 : 5년(1997년 ~ 2001년)
  • 연속 B클래스 최장 기록 : 10년(1950년 ~ 1959년)
  • 통산 4500패(2012년 8월 24일의 요미우리전에서 양대 리그제 도입 후 가장 빠른 기록)

그 외의 기록

  • 최소 경기차 : 1.0경기차(1964년)
  • 최대 경기차 : 61.5경기차(1955년)
  • 최다 홈런 : 194개(2004년)
  • 최소 홈런 : 51개(1955년)
  • 최고 타율 : .294(1999년)
  • 최저 타율 : .208(1956년)
  • 최고 평균자책점 : 2.31(1971년)
  • 최저 평균자책점 : 4.94(1977년)

역대 홈구장


유명 선수

역대 한국인 선수, 코칭스텝 (재일교포 포함)

  • 송재박 (일본명 : 요시모토 히로시) : 1983년 ~ 1987년
  • 김일융 (일본명 : 니우라 히사오) : 1987년 ~ 1991년
  • 홍순기 (일본명 : 고노 준키) : 1992년 ~ 1993년
  • 박결 (일본명 : 아라이 기요시) : 1997년 ~ 2000년
  • 김용언 (일본명 : 긴조 다쓰히코) : 1999년 ~ 2014년
  • 강무지 (일본명 : 나카무라 다케시) : 2002년 ~ 2004년, 2006년 ~ 2008년(코치)
  • 김영화 (일본명 : 미쓰야마 히데카즈) : 2002년
  • 이희철 (일본명 : 모리모토 히초리) : 2011년 ~ 2013년
  • 임창범 (일본명 : 하야시 마사노리) : 2012년 ~ 현재

주석

  1. DeNA사, 요코하마 인수 최종 확정 - mk 스포츠
  2. 2001년 센트럴 리그의 순위는 승률 순이 아닌 승수 대로 되어있기 때문에 승률의 경우에는 B클래스(4위)가 되어 있었다.

같이 보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