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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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ful (토론 | 기여)님의 2013년 12월 23일 (월) 00:17 판

오화영(吳華英, 1880년 4월 5일 ~ 1960년 9월 2일[1])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오하영(吳夏英)이라고도 한다. 아호는 국사(菊史)이다.

생애

황해도 평산 출생이다. 본관은 고창이다 [2].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동학에 입문한 적이 있으나, 곧 개신교로 개종하여 1906년 세례를 받았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감리교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가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목회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개성과 원산의 지역 만세 운동을 조직한 것이 확인되어 비교적 중형을 받은 것이다. 출옥한 뒤 신간회에 참가했고, 광주학생운동흥업구락부 사건에도 연루되어 모두 3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민족대표 출신의 원로 독립운동가였기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 등으로 추대되었다. 우익 정치인으로서 반탁 운동에 뛰어들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미군정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지냈고, 1946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학관을 세웠다. 초대 이사장은 3·1 운동의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이었으며, 그는 1948년 이 학교가 개명한 정치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49년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 10인협의회에서 선출된 민족통일본부 협의원에 지명됐다.

1950년 5월 30일 서울 종로구에서 제2대 민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다음 달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다. 북에서 활동한 구체적 자료는 없지만 1956년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명단이 있다. 하지만 동단체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들을 비자발적으로 동원된 선전 단체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3]

같이 보기

참고자료

주석

  1. ““오화영 선생 60년 9월2일 사망””. 한겨레 (연합뉴스 인용). 2008년 6월 7일에 확인함. 
  2. 고창오씨대종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http://gochangoh.com/ 참조
  3. http://blog.daum.net/sail50/8368150 고창오씨대종회 제19대 회장 오병택의 블로그 게시물 참조

바깥 고리

전임
(종로구 갑)이윤영
(종로구 을)이인
제2대 국회의원(종로구 을)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종로구 갑: 박순천
후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김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