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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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
小野洋子
Yoko Ono

2010년의 오노 요코
2010년의 오노 요코
신상정보
출생 1933년 2월 18일(1933-02-18)(91세)
일본 일본 도쿄 부 도쿄 시
(현재의 일본 도쿄 도)
직업 행위예술가, 음악가
국적 일본 일본 국적
미국 미국 시민권(前 국적)
영국 영국 시민권(前 국적)
배우자 이치야나기 도시(1956~1962)
앤서니 콕스(1963~1969)
존 레논(1969~1980)
샘 허배토이(1981~2001)
주요 작품
영향

오노 요코(일본어: 小野洋子, 영문명 Yoko Ono, 1933년 2월 18일 ~ )은 아방가르드적인 작품 활동을 벌인 일본의 행위예술가이자 음악가이다. 존 레논의 배우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요코의 어머니 오노 이소코는 야스다 그룹의 창립자인 야스다 젠지로의 손녀였다. 아버지 오노 에이스케는 일본 왕가의 후손이었으며 요코하마의 은행에서 근무하였다.[1] 요코가 태어나기 2주일 전 그의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로 전근하였으며, 1937년 가족들도 미국으로 이사하였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요코 역시 일본으로 이사하였으며 도쿄가쿠슈인 학원을 졸업하였다.

요코는 아버지를 따라 1940년 뉴욕으로 옮겼다가 1941년 아버지가 베트남하노이로 전근하자 다시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오노는 미쓰이 그룹기독교계 사립학교로 진학하여 도쿄 대공습 기간 동안 도쿄에 있었다. 공습이 계속되자 오노는 도쿄 인근의 아자부에 있었던 가족의 지인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대폭격이 지나자 오노는 나가노 인근의 가루이자와로 피난하였다.

피난 시절 요코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음식을 빌어야 했다. 후일 요코는 주변 아이들의 조롱을 받았던 당시의 경험이 자신에게 "적극성"과 "아웃사이더"의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요코의 아버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으며 요코의 어머니는 몇 킬로그램의 쌀을 위해 독일제 재봉틀 마저 팔아야 하는 곤궁함을 겪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요코는 다시 개교한 고쿄 인근의 귀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951년 졸업 후 이듬해 1952년 일본 가쿠슈인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두 학기를 보내고 자퇴하였다.[2]

교육, 결혼, 가족

전쟁 후 요코의 가족들은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온 그녀는 1953년 사라 로렌스 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그녀는 예술가, 시인들과 어울려 보헤미안과 같은 자유를 추구했으며, 전시회와 헤프닝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키워나갔다. 요코 오노에게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예술가는 라 몬테 영이었다.영은 그녀가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공연장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왔다. 오노는 한 공연에서 존 케이지의 도움을 받아 난연제를 사용한 종이를 써서 불로 그린 그림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라 로렌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한다.

1956년 오노는 작곡가이치야나기 도시와 결혼하였으나 7년 후인 1962년 이혼하였다. 같은해 오노는 재즈 음악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안소니 콕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오노 요코는 이치야나기와의 이혼에 대한 법적인 처리를 무시하여 이들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오노 요코는 자살을 시도하여 도쿄의 정신 병원에 보내졌다. 1963년 6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오노와 콕스는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서 딸 교코 찬 콕스가 태어났다.

콕스와의 결혼은 얼마 안가 파경을 맞았으나 공식적인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1969년 요코가 존 레논을 만나게 되자 오노와 콕스는 딸의 양육권을 놓고 법적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1971년 법원이 오노의 양육권을 인정하자 콕스는 8살난 딸과 함께 숨어버렸다. 콕스는 딸의 이름을 로즈마리로 개명하고 1977년까지 미국 기독교교파 중 하나인 리빙 월드 펠로우십에 의탁하였다. 1980년 존 레논이 피살 당하자 콕스는 오노 요코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예술 활동

요코 오노는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조지 마시우너스로부터 열열한 찬사를 받았다. 그당시 또다른 플럭서스 회원이었던 백남준과의 친분도 있어 후에 백남준의 장례를 치룰 때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플럭서스의 일원이 아닌 독립 예술가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3]

오노는 개념 미술행위 예술을 탐구하였다. 1964년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공연된 "조각내기"(영어 Cut piece)는 그녀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중 하나로 이름 만큼이나 파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를 걷다 옷자락에 걸려 무릎을 꿇고 관중의 요구에 따라 알몸이 될 때까지 걸친 옷을 잘라내었다. 오노는 대학 시절 장 폴 사르트르실존주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자기 스스로의 인간적 고뇌를 달래는 작품을 갈망해왔다. 그런 이유로 오노는 자신의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점과 개성을 온전히 표출하고자 하였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가된 "조각내기"의 경우, 오노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오노는 "조각내기"를 런던에서도 공연하였다. 일본의 관객이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웠던 데 반해 영국의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열광하였다. 런던에서는 관객들이 잘려나간 오노의 옷을 집기위해 몰려들어 오노는 보안요원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1964년 오노는 자신의 개념 미술을 설명하기 위해 《그레이프플루이트》를 발간하였다. 오노는 여기서 자신의 활동을 초현실주의, 선(禪) 등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오노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몇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6년 작품 《N0.4》는 "바닥"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오노는 자동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존 레넌은 요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노와 존 레논

"평화에게 기회를 주세요"를 녹음 중인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존 레논은 1966년 11월 9일 런던인디카 겔러리에서 오노를 처음 만났다. 이 날 오노는 인디카 겔러리에서 전시회의 시사회를 개최하였다. 존 레논은 오노가 옆을 지날 때 그녀가 부착하고 있던 "숨쉬어"(Breathe)라고 쓰인 카드를 읽었다. 2000년 일본에서 출판된 《Y E S YOKO ONO》에 따르면 존 레넌은 이 날 오노 요코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전시된 요코의 작품은 "천정에 달린 그림"(Ceiling Painting)이었다. 이 작품은 의자에 놓인 유리 조각들이 천정에 달린 것으로 유리 조각은 불꽃 모양으로 제작되어 Y E S 라고 배치되어 있었다. 존 레논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작품을 보았다.

또 다른 작품은 실제 사과와 함께 "사과, 200파운드"라 적힌 카드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1966년의 200 파운드는 2007년 가치로 환산할 때 2300 파운드로 약 4,600 달러가 된다. 존 레논은 이 작품을 사과의 왕자라 부르며 "이거 정말 재미있는 농담인데."라고 하였다.[4]

전시회가 끝난 뒤 존 레논은 오노에게 찾아가 못 박을 망치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오노는 존 레논의 청을 거절했다. 레논이 돌아가자 화랑의 주인은 "저 사람 누군지 몰라? 백만장자야!"라고 하였다. 오노는 그 전까지 존 레논이나 비틀즈를 몰랐고 그들의 음악을 들은 적도 없었다. 존 레논이 다시 찾아 오자 오노는 5 실링에 못박을 망치를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이에 존 레논은 "당신이 내게 상상의 못을 박을 망치가 되어준다면 상상의 5실링을 드릴께요."라고 답하였다.[4]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로 인해 대략 2년 후 존 레논은 첫 부인 신시아 레논과 이혼하였다.

존 레논은 많은 노래에서 오노를 언급하였다. 비틀즈로 활약하는 동안 "존과 요코"를 지었고, 그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아일랜드어도 쓰인 "줄리아"에서 "바다의 아이가 나를 불러요. 그래서 난 사랑을 노래하죠."라고 언급하였다. 오노의 이름 요코(洋子)를 바다의 아이라 표현한 것이다.

존 레논은 비틀즈 시기부터 오노와 공동작업을 하였다. 1968년 발매한 전자 음악 앨범인 《Unfinished Music No. 1: Two Virgins》와 같은 것이 있다. 1969년 3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결혼하였다.

존과 요코의 음악 활동

더티 맥에서 존은 보컬,기타를 요코는 백업을 맡았다.

주석

  1. 오노 요초의 생애, imdb.com
  2. 요코 오노의 주요 생애, jpri.org
  3. Newhall, Edith. "A Long and Winding Road." ARTnews Oct., 2000: 163.
  4. Spitz, Bob. The Beatles. Little, Brown, and Company: New York, 2005.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