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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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러시아의 황제
재위 1855년 3월 2일 ~ 1881년 3월 13일
대관식 1855년 9월 7일
전임 니콜라이 1세
후임 알렉산드르 3세
이름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신상정보
출생일 1818년 4월 17일(1818-04-17)
출생지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크렘린 궁전, 모스크바
사망일 1881년 3월 13일(1881-03-13)(62세)
사망지 러시아 제국의 기 러시아 제국 겨울 궁전, 상트 페테르부르크
가문 로마노프 왕가
부친 니콜라이 1세
모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배우자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자녀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종교 동방 정교회
서명 [[파일:|200px|alt=|알렉산드르 2세의 서명]]

알렉산드르 2세(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1818년 4월 17일 - 1881년 3월 13일)는 러시아 제국차르(황제)이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II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12번째 군주이다. 그는 농노 해방령 등 다양한 방법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1881년 암살당했다.

생애

1888년 알렉산드르 2세의 초상화

아버지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나약하고 선량한 기질의 인물로서 정책에 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해 어떤 때는 아버지보다도 더 반동적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의 군대식 통치와 크리미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형성된 여론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여러 개혁을 추진하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농노 해방을 비롯한 그의 개혁은 ‘대개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러시아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제도의 폐지였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개혁은 경제를 발전시켰으나, 농노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은 농노들을 술렁거리게 했다. 정부는 이러한 동요가 대규모의 농민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지주들이 솔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권리들을 빼앗길까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족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더욱 자극했고,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 토론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들에게 농토를 분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 해방 전에 “아래에서 농민이 자신을 해방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 농노제도를 폐지하는 편이 더 좋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농노 해방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는 이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농노 해방이 완벽한 개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지주들은 상실한 토지에 대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지만, 토지를 분양받은 농민들은 49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토지대금을 상환해야만 했다. 그리고 해방된 농노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너무 적었으며, 상환금액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토지가 개인에게 분양된 것이 아니라 농민공동체 단위로 분양되었으며, 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에게 재분할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처는 농민들에게 납세의무와 토지상환금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결정은 농민공동체의 기능을 상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업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농노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종래 지주가 농노에 대해 행사했던 독점적 재판권이나 치안 유지에 대한 권한 등은 자동적으로 소멸되었고, 지주들이 누렸던 권위도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일임되었던 지방행정은 1864년 젬스트보 기구가 조직되어 재편되었다. 젬스트보는 지주, 농민공동체, 도시민 세 계층이 대의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젬스트보에서는 주민들의 복지에 관한 사항만을 주로 다루었으며 일반 행정과 공공권력의 행사는 중앙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이 맡았다. 젬스트보에서는 기구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젬스트보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지주에게 유리하게 치러졌지만 자치의 원칙이 정식으로 인정되었고, 지방의 생활조건 향상을 위해 여러 사회계층이 협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젬스트보의 의석은 귀족과 관리에게 42%, 농민에게 38%, 상인과 기타 계층에게는 20%가 배정되었으며, 도로 건설, 의료, 식량, 교육 등과 같은 뒤처진 농촌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지방행정 못지않게 많이 바뀐 곳은 법원이었다. 계급차별주의 원칙을 근거로 한 개혁 이전의 재판은 권위주의와 재화주의에 물들어있는 재판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행해졌으며 피고를 대변할 변호인도 없었다. 또 재판과정이 매우 느리고 많은 경비를 소모하게 되어 있었다. 1864년의 개혁에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이 선포되었고 계급 차별도 없어졌다. 사법부는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었으며 재판관은 종신제로 임명되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은 공개되었고 배심원제도가 수립되었으며 변호사협회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지방법원에서 고등법원에 이르는 전 부문이 완전히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러시아의 법원조직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군대의 개편이 실시되어 이전까지는 하층계급만이 징병에 대한 부담을 지었으나 국민징병제가 실시되어 귀족과 평민에게도 군복무를 하게끔 만들었다. 복무기한도 25년에서 6년으로 축소되었고 병사들에 대한 대우도 훨씬 나아졌으며 훈련도 인도적 원칙이 강조되었다. 특히 사병들에 대한 초등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새로 조직된 법원과 함께 개편된 군대는 러시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더불어 검열을 완화하고 태평도 폐지하였다. 서구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장교들의 반란인 데카브리스트당의 반란 가담자들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석방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놓았던 계급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사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고, 그가 가는 곳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암살위기를 겪으면서 몇 해간 개혁사상을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로 들어섰으나 시간은 이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1881년, 알렉산드로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나로드니키(공화주의자)의 인민의 의지파 소속 그리네비츠키, 소피아 페룹스카야 등의 폭탄테러와 조우했다.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 덕분에 호위병과 마부만 다치고 황제는 무사했으나, 다친 호위병들을 살피러 마차 밖으로 나왔고 그순간 두 번째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로 2세는 폭살당했다.[1]

황태자 니콜라이가 22살에 요절하여 다른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뒤를 잇게 됐다. 알렉산드르 3세는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자녀

알렉산드르 2세는 헤센의 마리와 결혼하여 6남 2녀를 두었다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6세 ) 1842년 8월 30일 1849년 7월 10일 수막염으로 사망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 21세 ) 1843년 9월 20일 1865년 4월 24일 수막염으로 사망.
알렉산드르 3세 ( 49세 ) 1845년 3월 10일 1894년 11월 1일 러시아황제,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둠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61세 ) 1847년 4월 22일 1909년 2월 17일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58세 ) 1850년 1월 14일 1908년 11월 14일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 67세 ) 1853년 10월 17일 1920년 10월 24일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에딘버러 공작 알프레드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둠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47세 ) 1857년 5월 11일 1905년 2월 17일 헤센의 엘리자베트와 결혼, 슬하에 자녀 없음 1905년에 암살당함.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 58세 ) 1860년 10월 3일 1919년 1월 30일 1919년에 암살당함.

참고 자료

  1. http://navercast.naver.com/peoplehistory/foreign/3021 , 네이버캐스트 :: 인물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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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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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1세
러시아의 군주
1855년 3월 2일 - 1881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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