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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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별칭La Albiceleste (하양-하늘)
협회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AFA)
대륙 연맹남미 축구 연맹 (CONMEBOL)
감독아르헨티나 헤라르도 마르티노
주장리오넬 메시
최다 출전자하비에르 사네티 (145)
최다 득점자가브리엘 바티스투타 (56)
홈 구장엘 모누멘탈
에스타디오 마리오 알베르토 켐페스
FIFA 코드ARG
FIFA 랭킹
현재1위 (2015년 8월 6일 기준)
최고 순위1위 (2007년 3월, 2007년 10월 ~ 2008년 7월, 2015년 8월)
최저 순위24위 (1996년 8월)
첫 국제 경기 출전
우루과이 8 - 3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1901년 5월 16일)[1]
최다 점수차 승리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12 - 0 에콰도르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1942년 1월 22일)
최다 점수차 패배
체코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 6-1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스웨덴 헬싱보리; 1958년 6월 15일) 볼리비아볼리비아 6-1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라파스; 2009년 4월 1일)
FIFA 월드컵
출전 횟수16회 (1930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우승 (1978년, 1986년)
코파 아메리카
출전 횟수39회 (1916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우승 (1921년, 1925년, 1927년, 1929년, 1937년, 1941년, 1945년, 1946년, 1947년, 1955년, 1957년, 1959년, 1991년, 1993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 횟수3회 (1992년에 처음 출전)
최고 성적우승 (1992년)
메달 기록
남자 축구[2]
올림픽
2004 아테네
2008 베이징
1928 암스테르담
1996 애틀란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스페인어: Selección de fútbol de Argentina)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이며, 아르헨티나의 축구 행정부인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AFA) 가 관리한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의 홈 경기장은 에스타디오 안도니오 베스푸시오 리베르티이며 현 감독은 헤라르도 마르티노이다. 아르헨티나는 현재 FIFA 랭킹 1위이다.[3]

국가대표 (La Selección) 는 하양-하늘 (Albicelestes) 로도 알려져 있으며, 초대 월드컵이자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에게 2-4로 패했던 1930년 FIFA 월드컵을 포함하여 5번 월드컵 결승전에 올랐다. 1978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역대 두번째 결승전 진출에 성공하였고, 네덜란드를 3-1로 꺾으며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었던 1986년 FIFA 월드컵에서는 서독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가장 최근에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결승전에 오른 때는 2014년 FIFA 월드컵으로, 독일과의 연장 혈투 끝에 마리오 괴체의 결승골로 인하여 0-1로 석패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컵 결승에 5회 이상 진출한 팀으로는 독일(8회, 4승 4패), 브라질(7회, 5승 2패), 이탈리아(6회, 4승 2패), 아르헨티나(5회, 2승 3패)뿐이며 그 이외에 월드컵 결승 진출팀의 결승 진출 횟수는 네덜란드(3회, 3패), 우루과이(2회, 2승), 프랑스(2회, 1승 1패), 헝가리(2회, 2패), 체코슬로바키아(2회, 2패), 잉글랜드(1회, 1승), 스페인(1회, 1승), 스웨덴(1회, 1패) 이다.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를 14회 우승하며 이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중 1941년, 1945년, 그리고 1946년에는 트로피 없이 우승하였다. 또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키린컵을 모두 1992년에 우승하였고, 세명만 23세를 넘는 선수로 구성된 스쿼드를 가지고 아르헨티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남자 축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4]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3·4위전에 진출한 적이 없으며 준결승에 진출하기만 하면 무조건 결승에 진출했다. 만일 결승에 진출하지 못할 경우는 아예 8강 이하에서 탈락했다. 심지어는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종목에서조차도 3·4위전에 진출한 적이 없어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2개를 획득하는 동안 동메달은 단 한개도 획득한 적이 없다.

아르헨티나와 프랑스만이 FIFA가 승인한 주요 대회를 모두 우승해본 유이한 국가들이다: FIFA 월드컵, 컨페더레이션스컵, 그리고 올림픽 축구. 이 두 국가대표팀은 각 연고대륙 대회의 우승컵도 보유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코파 아메리카, 프랑스는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5][6]

아르헨티나는 또한 14번 중 6번의 팬아메리칸 게임 축구 우승을 경험하였는데, 이는 1951년, 1955년, 1959년, 1971년, 1995년, 그리고 2003년에 경험하였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우루과이, 독일, 그리고 잉글랜드와는 축구 역사상 역사적인 이유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7][8][9]

2007년 3월, 아르헨티나는 역사상 처음으로 FIFA 랭킹 1위에 올랐다.[10]

역사

초창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때 이미 우루과이, 잉글랜드와 나란히 세계 축구 3강을 이루었다. 특히 FIFA 월드컵이 창시되기 전에 아르헨티나는 이미 1928년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종목에서 결승에 진출하여 우루과이와 맞붙어서 패배하고 은메달을 획득했다.

첫 월드컵의 선두주자

우루과이 정부와 우루과이 축구 협회에서는 출전국에 대한 모든 여비와 수당, 숙식비용 일체를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기념비적인 첫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유럽은 프랑스, 벨기에,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이렇게 단 4개국만 출전했으며 나머지는 미주지역의 국가들만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조별리그에서 프랑스를 1-0, 멕시코를 6-3, 칠레를 3-1로 승리하며 전승을 달성하고 준결승에 올랐으며 준결승에서도 미국을 6-1로 완파하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인 우루과이와는 서로 자국의 공인구를 사용하겠다고 다투었고 결국 제비뽑기로 전반전은 아르헨티나제 축구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 축구공을 사용하여 경기를 진행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전반전을 2-1로 끝냈으나 후반전에서 일방적으로 밀리며 결국 2-4로 우루과이에게 패하고 준우승을 달성했다. 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스타플레이어인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득점왕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극심한 선수유출과 쇠락기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후 개최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아르헨티나에는 좋은 축구선수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때까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인 루이스 몬티, 엔리케 구와이타, 라이문도 오르시를 총칼로 협박해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뛰게 했다. 이렇게 되자 극심한 선수 유출을 걱정하던 아르헨티나는 고의로 실력없는 선수들을 엔트리에 넣고 월드컵에 출전시켜서 아르헨티나보다는 한 수 아래인 스웨덴에게 2-3으로 패하고 1라운드 탈락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월드컵을 이용하여 파시즘을 선전해야 했으므로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팀들에게마다 경기직전 락커룸에 찾아가서 총칼로 위협했다. 결국 갖은 방법으로 이탈리아는 이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아르헨티나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이후에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등을 스페인에게 빼앗기는 등 극심한 선수유출에 시달리며 쇠락했다.

아르헨티나는 FIFA로부터 1946년 FIFA 월드컵 개최권을 따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전후복구문제로 아무도 출전하지 않아 취소되었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FIFA로부터 195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하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만 막상 1950년이 되자 FIFA는 이 약속을 어기고 브라질에게 1950년 FIFA 월드컵 개최권을 부여했다. 이에 화가 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이 월드컵과 다음 월드컵인 1954년 FIFA 월드컵에 불참하였으며 이후 1958년 FIFA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초라한 성적으로 1라운드에서 조기탈락했다.

이후에도 아르헨티나의 쇠락은 눈에 띌 정도로 심각했으며 특히 1970년 FIFA 월드컵에서는 지역예선에서조차 탈락할 정도로 심각했다. 다만 1966년 FIFA 월드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개최국인 잉글랜드의 편파판정 속에 안토니오 라틴이 많은 논란 속에 퇴장당함과 동시에 온갖 편파판정에 시달린 끝에 잉글랜드에게 패했다. 잉글랜드는 이 월드컵 동안 시종일관 편파판정으로 일관했으며 결승전에서는 서독을 상대로도 편파판정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점점 기량을 회복하고 1970년대 말부터 FIFA에서 이중국적 제한규정을 도입하면서부터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홈 안방에서의 월드컵 우승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이 잘 다스리고 있었던 것을 갑자기 호르헤 비델라등의 반역자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독재정권을 성립하면서 국가가 기울기 시작했다. 호르헤 비델라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월드컵을 이용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자국리그에서 뛰는 선수 위주로 엔트리를 편성했으며 해외파는 마리오 캠페스가 유일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켐페스의 소속팀인 발렌시아 CF에 거액의 돈을 쥐어주고 월드컵을 준비하는 기간동안 클럽에서의 경기에 일절 출장시키지 못하게 하고 자국 국가대표 경기만 뛰도록 조치했다. 게다가 비델라는 마리오 캠페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들에게 우승하지 못하면 총살시키겠다고 총칼로 협박했다.

호르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가 보다 쉽게 결승에 진출하기 위해 유럽은 유럽끼리, 남미는 남미끼리 대진표를 묶어놓았다. 그 결과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같은 승점을 달성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 페루전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페루에게 서로 뒷거래를 했다. 아르헨티나는 5점차 이상으로 패하면 페루에 무상으로 곡물 원조를 해주겠다고 했으며 브라질은 페루에게 아르헨티나를 무승부로 막아주면 선수 1명당 6만달러씩 지급하겠다고 했다. 경기 결과는 아르헨티나가 페루를 6-0으로 이겼으며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을 골득실차로 따돌리고 결승에 진출했다. 당시의 브라질은 비록 펠레가 은퇴한 이후였으나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의 강팀이였다.

결승에 진출한 아르헨티나의 결승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는 시종일관 박빙의 승부로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마리오 캠페스의 맹활약으로 통산 첫 우승을 달성했다.

아르헨티나를 월드컵에서 우승시킨 호르헤 비델라의 지지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월드컵의 열기가 식자 비델라의 지지도는 급감했다. 굉장히 무서운 사실은 이 월드컵 결승전이 진행되던 그 시각 경기장의 바로 옆건물에서는 비델라를 반대하는 인사를 고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켐페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언제 그 비델라를 반대하는 인사와 똑같은 처지가 될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서 월드컵 경기에 출전했다. 그렇지만 비델라는 이 월드컵 덕분에 1982년까지 5년 동안 집권했으며 이는 군사독재정권 당시 집권했던 독재자들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집권한 것이 된다.

한편 CNN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이렇게 월드컵 우승한 것에 대해 '국가의 운명과 월드컵 우승을 맞바꿨다.'라든가 '월드컵 우승을 댓가로 국가가 파탄났다.'라는 등의 기사를 보도했다.

눈물의 월드컵

아르헨티나는 호르헤 비델라가 물러난 뒤 그 후임으로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집권했다. 이 때 갈티에리는 지지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지만 패했다. 그러나 갈티에리는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거짓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1982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한 아르헨티나 선수단은 스페인 현지에 도착해서야 자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성통곡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2인방인 마리오 캠페스디에고 마라도나를 둘 다 보유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인 아르헨티나임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기간 내내 대성통곡만 하는 바람에 첫 경기부터 한 수 아래의 벨기에에게 패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명색이 디팬딩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한 팀이였으므로 나머지 두 팀인 헝가리엘살바도르를 연파하고 2승 1패의 전적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러나 2라운드에 진출한 아르헨티나에게 기다리는 조편성은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죽음의 조였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탈리아로 편성된 이 죽음의 조는 3팀 모두가 FIFA 월드컵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는 강팀들 뿐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됨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선수단을 시종일관 대성통곡만 했으며 결국 브라질 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브라질의 수비수를 고의로 걷어차서 퇴장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숫적 열세에 시달리며 패배했고 이탈리아에게 마저 패하면서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후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이 자국 내에서 돌게 되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실각했으며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종식을 선언하게 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활약 하의 월드컵 우승

이후 아르헨티나는 마리오 캠페스가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고 디에고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팀이 재편성되었다.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팀을 재편성한 아르헨티나는 198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죽음의 조가 걸렸다. 지난대회에 만났던 이탈리아를 다시 만났으며 거기에 유럽의 다크호스인 불가리아와 아시아의 대한민국이 편성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첫 경기 대한민국을 상대로 마라도나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이 과정에서 허정무가 거친 수비로 마라도나를 괴롭혔다. 이후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거둔 뒤 불가리아를 이기고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과거의 강자였지만 이제는 쇠락한 우루과이를 상대로 맞붙어서 우루과이를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8강전이였는데 8강 상대가 포클랜드 전쟁을 치른 적대국인 잉글랜드였다. 8강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양국의 응원단 사이에서는 매우 험악한 분위기 속에 백주 대낮에 맥시코 도로 한복판에서 양국의 응원단끼리 패싸움을 벌였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이에 멕시코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는 경기당일 해당경기가 진행되는 경기장에 양국 응원단 사이에 철책을 설치했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8강전은 초반부터 험악한 분위기 속에 치러졌다. 경기시작 51분 만에 디에고 마라도나의 헤딩골로 아르헨티나가 잉글랜드를 1-0으로 앞서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라도나는 헤딩하는 척 하면서 왼손으로 공을 때려서 골을 넣었던 것이다. 사실 마라도나의 키는 168cm에 불과한 반면 잉글랜드의 골키퍼인 피터 실턴의 키는 185cm[11]였기 때문에 헤딩경합을 벌이게 될 경우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마라도나는 헤딩하는 척 하면서 손으로 공을 넣은 이른 바 신의 손 사건을 터뜨렸다. 이후 그로부터 약 5분 후 마라도나는 혼자서 전력질주를 한 끝에 골을 넣었다. 사람들은 이 두 골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추한 골과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골이라 부르면서 비난과 극찬을 동시에 했다. 잉글랜드는 이후 게리 리네커가 만회골을 넣었으나 경기는 2-1로 종료되면서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준결승전인 벨기에전에서도 거의 혼자 맹활약한 끝에 벨기에를 2-0으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서독과 맞붙게 되었고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상대로 디에고 마라도나, 호르헤 발다노, 호르헤 부르차가의 삼각편대를 이용하여 2-0으로 앞서나갔다. 절망에 빠진 서독은 비장의 카드로 루디 푈러를 내세웠다. 푈러는 1골 1어시스트로 2-2 동점을 만들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삼각편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추가골을 터뜨리고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이기고 통산 2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쇠락하는 마라도나 의존팀

하지만 1990년대에 이르게 되자 아르헨티나의 기량도 점점 쇠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 의존팀으로 전락했으며 첫 경기 카메룬전부터 이미 패배했다. 게다가 루마니아와도 비기고 소련 하나만 간신히 이겨서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숙적인 브라질과 맞붙었다. 브라질은 조별리그에서 전승을 기록한 반면 아르헨티나는 카메룬에게도 져서 누가 생각해도 브라질의 압승이 예상된 경기였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어시스트를 받은 카니히아의 골로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을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를 만난 아르헨티나는 디팬딩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기 내내 유고슬라비아보다 못한 경기력을 보였으며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보다도 오히려 고이코체아 골키퍼의 활약이 빛날 지경이였다. 결국 이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었고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 등 2명이 실축한 반면 유고슬라비아는 3명이 실축해서 아르헨티나가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개최국 이탈리아를 만났다.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에게 스킬라치의 골로 일찌감치 패색이 짙은 경기를 했으나 후반에 카니히아가 만회골을 넣어서 1-1로 팽팽하게 경기를 진행했다. 결국 또다시 승부차기를 하게 되었다. 마라도나는 이번에는 승부차기를 성공했고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모두 성공한 반면 이탈리아는 2명이 실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를 제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런데 마라도나는 이 경기를 전후해서 관중석을 향해 "나폴리 국민들이여, 북녘의 주적들을 응원하지 말고 너희들의 진정한 친구인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다오!"라고 외치는 바람에 이탈리아 조직위원회의 성격을 건드렸다. 결국, 마라도나의 이러한 행동과 개최국이자 자국인 이탈리아의 승부차기 패배로 자극을 받은 이탈리아 조직위원회는 대놓고 서독을 우승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아르헨티나가 결승에서 서독을 만나게 되자 논란의 퇴장을 2명에게 판정했다. 이에 아르헨티나는 9명으로 서독을 맞서게 되었으나 경기 양상은 여전히 팽팽하게 흘러갔다. 이에 이탈리아 조직위원회는 또다시 브레메에게 논란의 패널티킥을 판정하였으며 브레메는 이 패널티킥을 침착하게 골인시켜서 서독을 우승시켰다.

이후 마라도나는 이탈리아를 패퇴시켰다는 비난을 받으며 고통 속에 시달리다가 각종 약물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마라도나는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렇게 팀에서 퇴출당했다. 마라도나가 없는 아르헨티나는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긴 했으나 16강에서 루마니아에게 2-3으로 져셔 8강 진출에 실패했다. 마라도나가 없는 아르헨티나는 이후 쇠락기를 거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위주로 팀을 재편성한 1998년 FIFA 월드컵이 되어서야 다시 황금세대를 누리게 되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바티스투타를 내세워서 일본을 1-0으로 누른 데 이어 자메이카를 5-0으로 대승하고 크로아티아마저 1-0으로 이긴 후 16강에서 잉글랜드와 맞섰다. 당시 잉글랜드는 데이비드 베컴마이클 오웬이 공존하는 팀인 관계로 잉글랜드 역사상 최강팀이라 불리어도 무방할 정도의 강팀이였다. 또한 양팀은 포클랜드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상당히 원한이 깊은 사이인 관계로 우승은 못하더라도 절대로 상대방에게만큼은 패배할 수 없는 입장이였다. 양팀은 치열하게 경기를 했으나 베컴이 퇴장당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우세로 경기 양상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이러한 숫적 우세를 활용하지 못하고 결국 승부차기까지 갔다.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에르난 크레스포 혼자만 실축한 반면 잉글랜드에서 2명이 실축한 덕에 아르헨티나가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네덜란드를 만나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네덜란드에게 패배하고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마르셀로 비엘사의 임기

세계 축구계에서는 공격의 화신이라 불리는 마르셀로 비엘사가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2002년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당시의 아르헨티나는 지역예선에서의 성적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디팬딩 챔피언인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하지만 조추첨 결과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가 편성되는 죽음의 조에 걸렸다. 1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는 바티스투타의 멋진 헤딩골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2차전 잉글랜드 전에서는 마이클 오언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시뮬레이션 액션을 시도하여 이렇게 얻어진 페널티킥을 데이비드 베컴이 성공시켰으며 이 골이 결승골이 되어 아르헨티나는 패배했다. 스웨덴전에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에서 오히려 선제골을 당하면서 시종일관 스웨덴에 끌려다니는 졸전을 하다가 크레스포가 겨우 골을 넣어서 1-1로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경기 결과가 나왔을 때, 이미 2패를 기록하여 탈락을 확정지은 나이지리아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면 아르헨티나가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나이지리아가 잉글랜드와 무득점 무승부를 거두면서 결국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와 같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호세 페케르만의 임기

이러한 이유로 비엘사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감독에서 경질되었으며 그 후임으로 호세 페케르만이 선임되었다. 페케르만은 제일먼저 바티스투타를 엔트리에서 제외시키고 그 자리에 이미 어린나이로 세상을 놀라게 한 리오넬 메시를 편성했다. 아르헨티나는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또다시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는데 지난대회보다 더한 죽음의 조였다. 잉글랜드보다 강력한 네덜란드, 스웨덴과 호각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나이지리아보다 강력한 팀이자 아프리카 최강인 코트디부아르와 같은 조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첫 경기 코트디부아르전에서 양 팀의 에이스인 에르난 크레스포디디에 드로그바가 골을 주고 받는 공방전 끝에 2-1로 승리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전에서 아르헨티나는 막시 로드리게스에스테반 캄비아소등의 맹활약으로 골폭풍을 일으키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6-0 대승을 거두며 단 두 경기 만에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네덜란드전에서는 후보선수 위주로 경기를 하여 득점없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16강에서 멕시코를 만나 어려운 경기 끝에 2-1로 역전승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홈팀인 독일과 맞붙어서 선제골을 넣었으나 독일의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아르헨티나의 골키퍼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가 공을 차지하기 위한 경합을 벌이던 도중 클로제가 아본단시에리의 갈비뼈를 무릎으로 가격한 것이 원인이 되어 아본단시에리는 들것에 실려갔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아르헨티나는 결국 독일에게 만회골을 내주었고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갔다.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는 독일에게 패하고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디에고 마라도나의 임기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2010년 FIFA 월드컵 도중 알피오 바실레 감독을 경질하고 디에고 마라도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감독 경험이 거의 전무한데다가 인격에 결함까지 있는 인물로 실력으로 보나 인격적인 측면으로 보나 양쪽 모두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물인 관계로 축구 감독으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는 마라도나가 주장으로서 오랫동안 뛴 경험과 마라도나가 과거에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는 점을 감안해서 감독으로 선임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역예선부터 이미 처참했다. 일단 엔트리에서부터 실격점이였는데 후안 로만 리켈메,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사네티등을 대거 제외하여 팀을 쇠락하게 만들었으며 그 대체자라고 발탁한 선수라는 게 니콜라스 오타멘디, 하비에르 파스토레, 왈테르 사무엘등 실력이 부족해서 국가대표로 들어가기에 부적합하거나 실력은 있지만 부상이 잦은 선수 위주로 엔트리를 구성했다. 게다가 볼리비아와의 원정경기에서는 선수 소집조차 제대로 못해서 현지적응훈련 자체를 아예 못하고 경기시작 2시간 전에 라파즈에 도착하여 경기를 시작한 탓에 팀은 1-6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패를 당했다. 보통 원정경기 일정이 잡히면 경기시작 3일 전에 와서 현지적응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 축구감독으로서 기본이지만 마라도나는 이런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볼리비아와의 원정경기에서 경기 당일 부랴부랴 선수를 소집한 것이다. 게다가 마라도나의 부족한 지휘력 탓에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 역사상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패했다. 결국 마라도나의 무능함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지역예선 탈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칠레가 에콰도르를 이겨서야 겨우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 월드컵 본선에 자력진출하지 못한 경우는 단 3번이였는데 유일하게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1970년 FIFA 월드컵, 콜롬비아의 돌풍의 희생양이 되어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진출한 1994년 FIFA 월드컵, 감독으로서 무능한 마라도나 혼자만의 잘못으로 칠레와 에콰도르의 경기결과까지 계산해야만 했던 2010년 FIFA 월드컵이다.

본선에 진출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나이지리아, 그리스가 편성되어 3전 전승으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도 비교적 약체인 멕시코를 만나 3-1로 승리를 거두고 8강에 진출했으나 8강에서는 또다시 독일을 만났다. 결국 마라도나의 약점을 간파한 독일은 계속적인 역습으로 아르헨티나를 꼼짝못하게 만들었으며 아르헨티나는 독일에게 0-4로 패하면서 또다시 같은 상대에게 패배해 준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결국 마라도나는 감독직에서 퇴출당했으며, 전세계 60억 인구가 모두 인정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축구 감독이라는 낙인도 찍히게 되었다.

세르히오 바티스타의 임기

마라도나가 사퇴한 이후 세르히오 바티스타가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팀은 손발이 맞지 않아 졸전 끝에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단 1승만 기록한 채 8강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패배했다. 승부차기에서는 양팀의 10명의 키커들 중 유일하게 카를로스 테베스 혼자서만 실축했다.

알레한드로 사벨라의 임기

이 일로 인하여 바티스타가 경질되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감독을 선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뽑힌 감독이 알레한드로 사벨라였다. 사벨라는 굉장히 노련한 감독으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 뜯어고쳤다. 이 과정에서 카를로스 테베스, 니콜라스 오타멘디, 하비에르 파스토레를 퇴출시켰으며 오타멘디가 있던 자리에는 마르코스 로호를 추가시켜 전력을 보강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2014년 FIFA 월드컵 남아메리카 지역 예선에서 16전 9승 5무 2패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게다가 골 득실도 16경기 35득점 15실점으로 막강한 공격력과 짠물수비를 겸비한 강팀으로 변모시켰다. 즉, 마라도나가 감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지역예선 탈락을 걱정하던 팀을 사벨라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변모시켜 놓은 것이다.

본선에 진출한 아르헨티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란, 나이지리아와 같이 편성되었다. 이 조에서 아르헨티나는 3전 전승을 기록하며 16강에 진출했다.

16강부터 준결승까지 아르헨티나는 시종일관 짠물수비로 일관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16강 스위스전에서는 연장 혈투 끝에 앙헬 디 마리아의 골로 승리했으며 8강에서는 경기 초반에 곤살로 이과인의 골로 승리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디팬딩 챔피언인 스페인을 5-1로 대파하고 올라온 네덜란드와 맞서게 되었는데 네덜란드를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3번 연속 독일과 맞붙었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디 마리아가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호각의 경기력으로 독일을 괴롭혔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골 결정력이 부족한 탓에 계속되는 슈팅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연장 후반이 종료되기 직전 마리오 괴체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바람에 독일에게 0-1로 석패하고 준우승을 기록했다.

똑같은 팀이 단지 감독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마라도나가 지휘봉을 잡던 시절 8강에 머물렀던 팀이 사벨라로 감독이 바뀌자 결승까지 진출했다. 게다가 2014년에 아르헨티나가 만난 팀들이 2010년에 아르헨티나가 만난 팀들보다 훨씬 강력했으며 특히 네덜란드는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데다가 1994년 FIFA 월드컵 이후 아르헨티나가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이긴 팀 중 가장 강력한 팀이였다. 이 정도로 감독 하나만 바꾼 아르헨티나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성적을 낸 것이다.

헤라르도 마르티노의 임기

알레한드로 사벨라가 2014년 FIFA 월드컵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 더 이상 어떠한 팀의 감독직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로 심신이 크게 지쳤다. 때문에 알레한드로 사벨라는 휴양을 이유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 심지어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까지 나서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계속 수행해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후임으로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8강에 진출시킨바 있는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을 선임했다.

헤라르도 마르티노가 부임한 첫 경기는 2014년 FIFA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이긴 독일이였는데 아르헨티나는 앙헬 디 마리아의 활약으로 일찌감치 4골을 폭발시키면서 독일을 4-2로 완파함으로써, 그 결승전 때의 석패를 화끈하게 설욕했다. 그러나 그 이후 치뤄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0-2로 패배했으며 이 때문에 FC 바르셀로나시절부터 도마위에 올랐던 헤라르도 마르티노의 지휘력이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직후 약체 홍콩을 상대로 7-0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일단락 지었다. 다만 헤라르도 마르티노는 그 동안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사람들이 외면한 선수들인 에리크 라멜라, 니콜라스 가이탄 등을 중용하면서 팀의 선수층을 두텁게 했다.

올림픽 축구

홈 경기장

유니폼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유니폼은 흰색 바탕에 하늘색 줄무늬가 있으며 이는 홈 유니폼을 오렌지색으로만 고집하는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마찬가지로 이 무늬의 유니폼을 홈 유니폼으로 고집해오고 있는 팀이다. 매 월드컵마다 하늘색 줄무늬의 갯수와 굵기만 달라질 뿐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 유니폼은 191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년 이상 되는 기간동안 단 한번도 변경한 적이 없다.

어웨이 유니폼은 주로 파란색 계열의 색상만 고집하며 매 월드컵때마다 색상이 달라진다. 완전히 밝은 파란색, 진한 파란색, 곤색, 남색, 검정색 등의 색깔로 매 월드컵마다 변경해왔다. 1998년 FIFA 월드컵 이후에는 2010년 FIFA 월드컵만 유일하게 밝은 파란색이였으며 그 나머지 대회에서는 거의 검정색에 가까운 남색으로 유니폼 색깔을 선택했다.

또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은 매 월드컵마다 유니폼 콘테스트에서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멋진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니폼 변천사

1901
1911 - 74
1975
1999년
2004
2008
2011년


원정

1919
2004
2008년
2011


FIFA 월드컵 (본선)

FIFA 월드컵 기록
년도 결과 순위 경기 무* 득점 실점 승점
우루과이 1930년 준우승 2위 5 4 0 1 18 9 12
이탈리아 1934년 1라운드1 9위 1 0 0 1 2 3 0
프랑스 1938년 불참
브라질 1950년
스위스 1954년
스웨덴 1958년 조별리그 13위 3 1 0 2 5 10 3
칠레 1962년 조별리그 10위 3 1 1 1 2 3 4
잉글랜드 1966년 8강 5위 4 2 1 1 4 2 7
멕시코 1970년 예선 탈락
서독 1974년 8강 8위 6 1 2 3 9 12 5
아르헨티나 1978년 우승 1위 7 5 1 1 15 4 16
스페인 1982년 2라운드 11위 5 2 0 3 8 7 6
멕시코 1986년 우승 1위 7 6 1 0 14 5 19
이탈리아 1990년 준우승 2위 7 2 3 2 5 4 9
미국 1994년 16강 10위 4 2 0 2 8 6 6
프랑스 1998년 8강 6위 5 3 1 1 10 4 10
대한민국일본 2002년 조별리그 18위 3 1 1 1 2 2 4
독일 2006년 8강 6위 5 3 2 0 11 3 11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0년 8강 5위 5 4 0 1 10 6 12
브라질 2014년 준우승 2위 7 5 1 1 8 4 16
러시아 2018년 ? ? ? ? ? ? ? ? ?
카타르 2022년 ? ? ? ? ? ? ? ? ?
합계 16회 진출(16/20) 우승(2회) 77 42 14 21 131 84 140
순위 FIFA 월드컵 역대 순위 : 4위
1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루이스 몬티, 엔리케 과이타, 라이문도 오르시 등의
주력선수들을 상당수 빼앗기고 이 여파로 제대로 뛸 수 없었다.


FIFA 월드컵 (예선)

년도 순위 경기 무* 득점 실점 승점
우루과이 1930년 자동참가[12]
이탈리아 왕국 1934년 자동진출(칠레 기권)
프랑스 1938년 기권
브라질 1950년 기권[13]
스위스 1954년 불참[13]
스웨덴 1958년 2조 1위 4 3 0 1 10 2 9
칠레 1962년 1그룹 승리[14] 2 2 0 0 11 3 6
잉글랜드 1966년 3조 1위 4 3 1 0 9 2 10
멕시코 1970년 1조 3위 4 1 1 2 4 6 4
서독 1974년 2조 1위 4 3 1 0 9 2 10
아르헨티나 1978년 자동참가(개최국)
스페인 1982년 자동참가(전 대회 우승국)
멕시코 1986년 1조 1위 6 4 1 1 12 6 13
이탈리아 1990년 자동참가(전 대회 우승국)
미국 1994년[15] 1조 2위 8 4 2 2 9 10 14
프랑스 1998년 1위 16 8 6 2 23 13 30
대한민국일본 2002년[16] 1위 18 13 4 1 42 15 43
독일 2006년 2위 18 10 4 4 29 17 34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0년[17] 4위 18 8 4 6 23 20 28
브라질 2014년 1위 16 9 5 2 35 15 32
러시아 2018년 ? ? ? ? ? ? ? ?
카타르 2022년 ? ? ? ? ? ? ? ?
합계 118 68 29 21 216 111 233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기록
년도 결과 순위 경기 무* 득점 실점 승점
아르헨티나 1916년[18] 결선리그 2위 3 1 2 0 7 2 5
우루과이 1917년 결선리그 2위 3 2 0 1 5 3 6
브라질 1919년 결선리그 3위 3 1 0 2 7 7 3
칠레 1920년 결선리그 2위 3 1 2 0 4 2 5
아르헨티나 1921년 결선리그 우승 3 3 0 0 5 0 9
브라질 1922년 결선리그 4위 4 2 0 2 6 3 6
우루과이 1923년 결선리그 2위 3 2 0 1 6 6 6
우루과이 1924년 결선리그 2위 3 1 2 0 2 0 5
아르헨티나 1925년 결선리그 우승 4 3 1 0 11 4 10
칠레 1926년 결선리그 2위 4 2 1 1 14 3 7
페루 1927년 결선리그 우승 3 3 0 0 15 4 9
아르헨티나 1929년[19] 결선리그 우승 3 3 0 0 9 1 9
페루 1935년 결선리그 2위 3 2 0 1 8 5 6
아르헨티나 1937년[20] 결선리그 우승 6 5 0 1 14 5 15
페루 1939년 기권
칠레 1941년 결선리그 우승 4 4 0 0 10 2 12
우루과이 1942년 결선리그 준우승 6 5 0 1 21 6 15
칠레 1945년 결선리그 우승 6 5 1 0 22 5 16
아르헨티나 1946년 결선리그 우승 5 5 0 0 17 3 15
에콰도르 1947년[21] 결선리그 우승 7 6 1 0 28 4 19
브라질 1949년 기권
페루 1953년
칠레 1955년[22] 결선리그 우승 5 4 1 0 18 6 13
우루과이 1956년 결선리그 3위 5 3 0 2 5 3 9
페루 1957년 결선리그 우승 6 5 0 1 25 6 15
아르헨티나 1959년 결선리그 우승 6 5 1 0 19 5 16
에콰도르 1959년 결선리그 준우승 4 2 1 1 9 9 7
볼리비아 1963년 결선리그 3위 6 3 1 2 15 10 10
우루과이 1967년 결선리그 준우승 5 4 0 1 12 3 12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기록
1975년[23] 예선탈락 5위 4 2 0 2 17 4 6
1979년[24] 예선탈락 8위 4 1 1 2 7 6 4
1983년[25] 예선탈락 6위 4 1 3 0 5 4 6
아르헨티나 1987년[26] 4강 4위 4 1 1 2 5 4 4
브라질 1989년 결선리그 3위 7 2 3 2 2 4 9
칠레 1991년[27] 우승 1위 7 6 1 0 16 6 19
에콰도르 1993년[28] [29] 우승 1위 6 2 4 0 6 4 10
우루과이 1995년 8강 5위 4 2 1 1 8 6 7
볼리비아 1997년 8강 6위 4 1 2 1 4 3 5
파라과이 1999년 8강 8위 4 2 0 2 6 6 6
콜롬비아 2001년[30] 기권
페루 2004년 준우승 2위 6 4 1 1 16 6 13
베네수엘라 2007년 준우승 2위 6 5 0 1 16 6 15
아르헨티나 2011년[31] 8강 7위 4 1 3 0 5 2 6
칠레 2015년 준우승 2위 6 3 3 0 10 3 12
미국 2016년 ? ? ? ? ? ? ? ? ?
합계 39회 진출(39/43) 우승(14회) 177 112 34 31 427 168 370
순위 CONMEBOL 코파 아메리카 순위 : 1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FIFA 컨페드컵 기록
년도 결과 경기 무* 득점 실점 승점
사우디아라비아 1992 우승 2 2 0 0 7 1 6
사우디아라비아 1995 준우승 3 1 1 1 5 3 4
사우디아라비아 1997 불참
멕시코 1999
대한민국일본 2001
프랑스 2003
독일 2005 준우승 5 2 2 1 10 10 8
남아프리카 공화국 2009 불참
브라질 2013
합계 3회 진출(3/9) 10 5 3 2 22 14 18


하계 올림픽

올림픽 축구 기록
년도 결과 순위 경기 무* 득점 실점 승점
프랑스 1900년 불참
미국 1904년
영국 1908년
스웨덴 1912년
벨기에 1920년
프랑스 1924년
네덜란드 1928년 은메달 준우승 5 3 1 1 25 8 10
나치 독일 1936년 불참
잉글랜드 1948년
핀란드 1952년
오스트레일리아 1956년
이탈리아 1960년 8강 7위 3 2 0 1 6 4 6
일본 1964년 조별리그 10위 2 0 1 1 3 4 1
멕시코 1968년 진출 실패
서독 1972년
캐나다 1976년
소련 1980년 불참[32]
미국 1984년 진출 실패
대한민국 1988년 8강 8위 4 1 1 2 4 5 4
스페인 1992년[33] 진출 실패
미국 1996년[34] 은메달 준우승 6 3 2 1 13 6 11
오스트레일리아 2000년[35] 진출 실패
그리스 2004년[36] 금메달 우승 6 6 0 0 17 0 18
중국 2008년[37] 금메달 우승 6 6 0 0 11 2 18
영국 2012년[38] 진출 실패
합계 7회 진출(7/25) 금메달(2회) 32 21 5 6 79 29 68


역대 감독

이름 활동 기간
앙헬 바스케스 1924–1925
호세 라고 미얀 1927–1928
프란시스코 올라사르 1928–1929
아이모헤 모헤이라 / 후안 호세 트라무톨라 1929–1930
펠리페 파수치 1934
마누엘 세오아네 1934–1937
앙헬 페르난데스 로차 1937–1939
기예르모 스타빌레 1939–1960
비토리오 스피네토 1960–1961
호세 다미코 1961
후안 카를로스 로렌소 1962–1963
알레한드로 갈란 1963
오라시오 아마블레 토레스 1963–1964
호세 마리아 미네야 1964–1968
레나토 세사리니 1968
움베르토 마스치오 1968–1969
아돌포 페데르네라 1969
후안 호세 피수티 1969–1972
오마르 시보리 1972–1974
블라디슬라오 카프 / 호세 바라카 1974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1974–1983
카를로스 빌라르도 1983–1990
알피오 바실레 1990–1994
다니엘 파사레야 1994–1998
마르셀로 비엘사 1998–2004
호세 페케르만 2004–2006
알피오 바실레 2006–2008
디에고 마라도나 2008–2010
세르히오 바티스타 2010-2011
알레한드로 사벨라 2011-2014
헤라르도 마르티노 2014-


선수

현재 선수 명단

다음은 2015년 9월 22일에 발표된 2018 러시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2015년 10월 경기(대 에콰도르, 대 파라과이)에서 뛰기로 발표된 대표팀 명단이다 대표팀 감독: 헤라르도 마르티노

번호 위치 선수 생년월일 (나이) 출전 득점 소속
GK 세르히오 로메로 1987년 2월 22일(1987-02-22)(37세) 58 0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GK 나후엘 구스만 1986년 2월 10일(1986-02-10)(38세) 3 0 멕시코 티그레스 UANL
GK 아구스틴 마르케신 1988년 3월 16일(1988-03-16)(36세) 1 0 멕시코 산토스 라구나
DF 에세키엘 가라이 1986년 10월 10일(1986-10-10)(37세) 26 0 러시아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DF 파쿤도 론칼리아 1987년 2월 10일(1987-02-10)(37세) 4 0 이탈리아 AC 피오렌티나
DF 파블로 사발레타 1985년 1월 16일(1985-01-16)(39세) 48 0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 F.C.
DF 밀톤 카스코 1988년 4월 11일(1988-04-11)(35세) 0 0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
DF 마르틴 데미첼리스 1980년 12월 20일(1980-12-20)(43세) 44 2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 F.C.
DF 마르코스 로호 1990년 3월 20일(1990-03-20)(34세) 31 1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DF 니콜라스 오타멘디 1988년 2월 12일(1988-02-12)(36세) 19 1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 F.C.
DF 엠마누엘 마스 1989년 1월 15일(1989-01-15)(35세) 2 0 아르헨티나 산 로렌소
DF 라미로 푸네스 모리 1991년 3월 5일(1991-03-05)(33세) 1 0 잉글랜드 에버튼 F.C.
MF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1984년 6월 8일(1984-06-08)(39세) 111 3 스페인 FC 바르셀로나
MF 루카스 비글리아 1986년 1월 30일(1986-01-30)(38세) 28 0 이탈리아 SS 라치오
MF 앙헬 디 마리아 1988년 2월 14일(1988-02-14)(36세) 59 11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MF 로베르토 페레이라 1991년 1월 7일(1991-01-07)(33세) 6 0 이탈리아 유벤투스 FC
MF 에베르 바네가 1988년 6월 29일(1988-06-29)(35세) 28 4 스페인 세비야 FC
MF 하비에르 파스토레 1989년 6월 20일(1989-06-20)(34세) 18 1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MF 엔소 페레스 1986년 2월 22일(1986-02-22)(38세) 15 1 스페인 발렌시아 CF
MF 니콜라스 가이탄 1988년 2월 23일(1988-02-23)(36세) 9 2 포르투갈 SL 벤피카
MF 마티아스 크라네비테르 1993년 5월 21일(1993-05-21)(30세) 18 1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
FW 리오넬 메시 (c) 1987년 6월 24일(1987-06-24)(36세) 97 45 스페인 FC 바르셀로나
FW 세르히오 아구에로 1988년 6월 2일(1988-06-02)(35세) 60 23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
FW 카를로스 테베스 1984년 2월 7일(1984-02-07)(40세) 68 13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
FW 에세키엘 라베시 1985년 5월 3일(1985-05-03)(38세) 39 4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FW 안헬 코레아 1995년 3월 9일(1995-03-09)(29세) 2 1 스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FW 파울로 디발라 1993년 11월 15일(1993-11-15)(30세) 0 0 이탈리아 유벤투스 FC

최근 차출된 선수

아래 명단은 최근 1년 사이에 차출된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 명단이다.

위치 선수 생년월일 (나이) 출전 득점 소속 최근 소집
GK 아구스틴 오리온 1981년 7월 26일(1981-07-26)(42세) 3 0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GK 오스카 우스타리 1986년 7월 3일(1986-07-03)(37세) 2 0 잉글랜드 선덜랜드 AFC 2013년 8월 14일, 이탈리아
GK 크리스티안 알바레스 1985년 11월 13일(1985-11-13)(38세) 0 0 아르헨티나 CA 산로렌소 2013년 2월 6일, 스웨덴
DF 파브리시오 콜로치니 1982년 1월 22일(1982-01-22)(42세) 39 1 잉글랜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DF 세바스티안 도밍게스 1980년 7월 29일(1980-07-29)(43세) 8 0 아르헨티나 벨레스 사르스필드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DF 가브리엘 메르카도 1987년 3월 18일(1987-03-18)(37세) 1 0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DF 크리스티안 안살디 1986년 9월 20일(1986-09-20)(37세) 3 0 스페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13년 10월 11일, 페루 페루
DF 산티아고 버지니 1988년 8월 3일(1988-08-03)(35세) 1 0 아르헨티나 에스투디안테스 라 플라타 2013년 9월 10일, 파라과이 파라과이
DF 클레멘테 로드리게스 1981년 7월 31일(1981-07-31)(42세) 20 0 아르헨티나 콜론 산타페 2013년 6월 14일, 과테말라 과테말라
DF 히노 페루시 1992년 6월 9일(1992-06-09)(31세) 4 0 이탈리아 칼초 카타니아 2013년 6월 14일, 과테말라 과테말라
MF 막시 로드리게스 1981년 1월 2일(1981-01-02)(43세) 50 15 아르헨티나 뉴웰스 올드 보이스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MF 호세 에르네스토 소사 1985년 6월 19일(1985-06-19)(38세) 19 1 튀르키예 베식타쉬 JK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MF 아우구스토 페르난데스 1986년 4월 10일(1986-04-10)(37세) 6 1 스페인 셀타 비고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MF 레안드로 소모사 1981년 1월 26일(1981-01-26)(43세) 4 0 아르헨티나 벨레스 사르스필드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MF 로드리고 브라냐 1979년 3월 7일(1979-03-07)(45세) 9 0 아르헨티나 킬메스 AC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MF 페르난도 가고 1986년 4월 10일(1986-04-10)(37세) 46 0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 2013년 9월 10일, 파라과이 파라과이
MF 프란시스코 세로 1988년 2월 9일(1988-02-09)(36세) 1 0 아르헨티나 벨레스 사르스필드 2013년 8월 14일, 이탈리아
MF 파블로 귀네슈 1978년 8월 26일(1978-08-26)(45세) 16 0 브라질 CR 바스쿠 다 가마 2013년 6월 14일, 과테말라 과테말라
월터 몬틸로 1984년 4월 14일(1984-04-14)(39세) 6 0 브라질 산투스 FC 2013년 6월 14일, 과테말라 과테말라
레오나르도 폰치오 1982년 1월 29일(1982-01-29)(42세) 8 0 아르헨티나 리버 플레이트 2013년 3월 26일, 볼리비아 볼리비아
MF 니콜라스 가이탄 1988년 2월 23일(1988-02-23)(36세) 6 0 포르투갈 SL 벤피카 2013년 2월 6일, 스웨덴
MF 파비앙 리나우도 1987년 5월 15일(1987-05-15)(36세) 4 0 이탈리아 칼초 카타니아 2013년 2월 6일, 스웨덴
FW 마우로 이카르디 1993년 2월 19일(1993-02-19)(31세) 1 0 이탈리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13년 10월 15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FW 프랑코 디 산토 1989년 4월 7일(1989-04-07)(34세) 3 0 독일 SV 베르더 브레멘 2013년 3월 26일, 볼리비아 볼리비아

선수 기록

최다 출장 선수

아래 기록은 2012년 10월 10일을 기준으로 한다. (현역 선수는 굵은 글씨로 나타냄.)

# 이름 활동 기간 경기
1 하비에르 사네티 1994–2014 145 5
2 로베르토 아얄라 1994–2007 115 7
3 디에고 시메오네 1988–2002 106 11
4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2003–현재 105 3
5 오스카르 루헤리 1983–1994 97 7
6 리오넬 메시 2005–현재 93 42
7 디에고 마라도나 1977–1994 91 34
8 아리엘 오르테가 1993–2003 87 17
9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1991–2002 78 56
10 후안 파블로 소린 1995–2006 76 12
11 아메리코 가예고 1975–1982 73 3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1996–2014 73 9


최다 득점 선수

아래 기록은 2013년 9월 10일을 기준으로 한다. (현역 선수는 굵은 글씨로 나타냄.)

# 이름 활동 기간 경기 경기당 평균 골
1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1991–2002 56 78 0.72
2 리오넬 메시 2005–현재 42 93 0.452
3 에르난 크레스포 1995–2007 36 64 0.56
4 디에고 마라도나 1977–1994 34 91 0.37
5 루이스 아르티메 1961–1967 24 25 0.96
6 레오폴도 루케 1975–1981 22 45 0.49
= 다니엘 파사레야 1976–1986 22 70 0.31
= 곤살로 이과인 2009–현재 22 43 0.512
8 호세 산필리포 1956–1962 21 29 0.72
= 에르미니오 마산토니오 1935–1942 21 19 1.11
= 세르히오 아구에로 2006–현재 21 56 0.375
11 마리오 켐페스 1973–1982 20 43 0.47
12 노르베르토 멘데스 1945–1956 19 31 0.61
= 호세 마누엘 모레노 1936–1950 19 34 0.56
= 레네 폰토니 1942–1947 19 19 1.00


관련 항목


바깥 고리


주석

  1. Pelayes, Héctor Darío. “ARGENTINA-URUGUAY Matches 1902–2009”. RSSSF. 2010년 11월 7일에 확인함. 
  2. 1988년 이후로, 올림픽 대회의 축구팀 선수는 3명 이하의 23세 초과 선수로 구성하도록 규정이 되었으며, 이 대회의 경기들은 국가대표팀 기록에 남지 않으며, 출전 기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3. “– The FIFA/Coca-Cola World Ranking”. FIFA. 2014년 7월 4일에 확인함. 
  4. “Football gold for Argentina”. 2010년 4월 25일에 확인함. 
  5. “– Argentina on”. FIFA.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6. “– Tournaments”. FIFA.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7. Wetzel, Dan. “War of words renews Argentina-Germany rivalry – FBINTL – Yahoo! Sports”. G.sports.yahoo.com.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
  8. “Great Footballing Rivalries : Argentina vs. Uruguay « SportsKeeda”. Sportskeeda.com.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9. 그리고 여기 언급된 팀들이 서로 라이벌이다. 잉글랜드와 독일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당시부터 국가적 라이벌이였고 브라질과 우루과이 역시 1950년 FIFA 월드컵으로 인해 대단한 앙숙이 되었다.
  10. “– Argentina first for first time”. FIFA. 2012년 6월 7일에 확인함. 
  11. 골키퍼는 일반적으로 다른 포지션에 비해 키가 크다.
  12. 첫 월드컵이어서 예선전을 따로 치르지 않았고 신청하는 모든 팀이 본선에서 뛰었다.
  13. 1942년, 1946년 대회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문에 열리지 못했다. 1942년 대회는 1940년 FIFA 총회에서 정하기로 했고, 1946년 대회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아르헨티나가 유력한 후보였고 암묵의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대회가 취소되고 1950년 개최권이 브라질로 넘어가면서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기권했고 그 다음대회도 불참했다.
  14. VS 에콰도르 에콰도르
  15. 콜롬비아와의 홈경기에서 0:5 대패의 수모를 당하고 플레이오프로 미끄러져 호주와 플레이오프 끝에 1승 1무 총합 2:1로 간신히 본선에 진출했다.
  16. 남미의 모든 지역예선 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승점, 가장 많은 승리, 최다득점 기록이다.
  17. 플레이오프까지 갔던 악몽의 1994년을 재현할 뻔했다. 예선 중반 6위까지 떨어지며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 두 경기를 모두 잡고 간신히 4위로 본선에 직행했다.
  18. 첫 코파아메리카 개최국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그러나 우승컵은 이웃 우루과이에 넘겨주었고 2위에 그쳤다.
  19. 네 번째 자국대회에서 우루과이를 2:0으로 누르고 사상 첫 2연속 우승에 성공, 1년 전 올림픽 결승에서의 패배를 갚았다. 그러나 1년 뒤 초대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에 우승컵을 다시 내줬다. 1년 간격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우루과이와 결승에서 붙을 만큼, 당시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남미 최강 + 세계 최강 투톱이었다.
  20. 브라질과 승점이 같아 재경기 끝에 2:0으로 이기면서 다섯 번째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21. 남미 최초 3연속 우승에 성공, 남미 최강으로 입지를 굳혔다. 참고로 코파아메리카에서 3연속 우승한 팀은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가 유일하고,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총합 9번째 우승으로 우루과이를 제치고 최다 우승 타이틀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대회에 불참하면서 아쉽게 4연속 타이틀 방어는 하지 않았고, 월드컵에도 계속 불참하면서 암흑기가 찾아왔다. 현재까지도 우루과이와 코파아메리카 최다 우승국 타이틀을 주고받고 있으며, 브라질조차 이 대회의 아르헨티나 우승 숫자에 못 미칠 정도(2014 현재 8회)다.
  22. 3연속 우승 이후 두 대회에 불참했으나 8년만에 다시 참가, 남미 사상 최초 10번째 우승컵을 가져갔다. 특히 라이벌 우루과이를 6:1로 대파하는 등 라이벌 국가들의 자존심을 철저히 뭉개며 두 자릿수 우승 타이틀을 가져갔다.
  23. 개최국 없이 각 국가에 분산되어 경기가 열렸으며, 이 대회부터 풀리그가 아닌 조별리그+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24. 개최국 없이 각 국가에 분산되어 경기가 열렸다.
  25. 개최국 없이 각 국가에 분산되어 경기가 열렸다.
  26. 20년만에 개최국을 다시 선정하기 시작했으며, 아르헨티나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네 경기에서 단 1승에 그치는 등 바로 1년 전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전력을 보이지 못하고 4위에 그쳤다.
  27. 1959년 자국 대회 이후 32년만에 통산 열 세번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8. 참가국을 12개로 확대해 타 대륙팀을 초청하기 시작했고, 첫 초청국은 멕시코와 미국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토너먼트를 8강까지 확대하면서 지금과 같은 대회가 완성되었다.
  29. 이 대회에서 2연속 우승하면서 통산 14번째 우승을 달성했고, 우루과이 우승 횟수(13회)를 8년만에 재역전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코파아메리카 마지막 우승으로 20년 넘게 우승컵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30. 선수단의 안전 문제를 이유로 기권을 선언했다.
  31. 오랫만에 열린 자국 대회였지만 1승 2무 조 2위로 8강에 올라가고, 8강에서 우루과이에 승부차기로 패하는 등 극히 부진했다. 자신들은 겨우 8강에 머문 반면 우루과이가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라이벌 팀이 코파아메리카 최다 우승국 타이틀을 가져가는 것을 홈에서 지켜봐야 했다.
  32. 적성국인 소련에서 경기가 열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자유 진영 대다수 국가들이 불참했다.
  33.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34.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35.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36.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37.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
  38. 모든 연령의 선수 참가에서 23세 이하로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