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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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 정보
출생 1788년 2월 22일(1788-02-22)
단치히
사망 1860년 9월 21일(1860-09-21)(72세)
독일 연방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대 19세기 철학
지역 서양 철학
서명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독일어: Arthur Schopenhauer, IPA: [ˈaʁtʊʁ ˈʃɔpənˌhaʊ̯ɐ],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철학자다. 철학 주저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가 있다. 인도철학의 우파니샤드같은 책을 비롯한 동양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 철학 주저의 서두에서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근본적 진리는 인도의 현자들이 이미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세계는 나의 의지다'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자신의 철학적 핵심을 전개한다.[1] 그 결과, 그가 제안한 고통의 해결 방법은 금욕주의와 같은 베단타 학파불교의 의견과 비슷했다. ‘선험적 관념론’에 대한 믿음[2]무신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3][4][5][6] 1813년, 현상 세계의 네 가지 측면[7]에 대해 다룬 철학 박사학위 논문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를 출판하였다.

연보

  • 1788년 2월.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의 아들로 출생.
  • 1793년(5세) 단치히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함부르크의 집.
  • 1797년(9세)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2년 간 지냈다. 이 시기에 프랑스어를 익혔다.
  • 1799년(11세)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 1800년(12세) 아버지와 하노버, 카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 1803년(15세) 아버지의 권유로 가족과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시기에 영어를 익혔다.
  • 1804년(16세)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를 독학했다.
  • 1805년(17세)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 1806년(18세)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로 이주했다. 본인은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 1807년(19세)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함.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어 등 고전어를 열심히 학습함.
    폴란드 그단스크(옛 단치히) 쇼펜하우어의 생가.
  • 1809년(21세)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연구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수학, 언어학, 역사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함.
  • 1810년(22세)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에게 플라톤,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G.E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 1811년(23세) 어머니(요한나 쇼펜하우어)가 독일 근대문학의 거장이자 선구자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진로에 대해서 조언을 함.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를 탐구함. 그러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냄.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가 주도하는 그리스 로마 고전문학, 고전철학 강의에 사로잡혀 열심히 들음.
  • 1812년(24세)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에 회의를 품었다.
  • 1813년(25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다. 쇼펜하우어베를린를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토대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토론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 1814년(26세)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 1816년(28세)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다.
  • 1818년(30세) 자신의 철학 주저이자 역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 1819년(31세)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 1820년(32세) 시범 강의에서 통과함. 헤겔과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오염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한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8]
  • 1822년(34세)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고 기록했다.
  • 1823년(35세) 독일로 돌아옴. 여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음.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 1824년(36세)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체류함. 데이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 대한 번역 계약 체결을 시도했다.
  • 1825년(37세)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번역가로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 1831년(43세)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다.
  • 1833년(45세)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 1836년(48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다.
  • 1837년(49세) '칸트 전집' 출판에 관여했고 순수이성비판 A판(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함.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8년(50세)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 1839년(51세)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 1840년(52세)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대단한 철학자인 헤겔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반론했다.
  • 1841년(53세)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 1842년(54세)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 1844년(56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이 완성됨. 제1권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 1845년(57세)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 1846년(58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우어를 만났고 쇼펜하우어와 교제하기 시작함.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 1847년(59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 1849년(61세)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생 아델레가 사망함.
  • 1851년(63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출간함.
  • 1853년(65세)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영국의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함.
  • 1854년(66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당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었다고 비판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됨.
  • 1855년(67세)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 1857년(69세)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교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됨.
  • 1858년(70세)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연세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출간됨.
  • 1860년(72세)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사망했다.[9]
1815년 청년기의 쇼펜하우어

사상

쇼펜하우어는 시간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서 파악되는 현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근거율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세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근거율의 형식들이다. 현상세계의 경험은 오로지 근거율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충분근거율의 내용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근거를 가진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세계는 주관과 관계하는 객관 전체이다. 표상(Vorstellung)의 세계는 주관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이다. 이 표상세계는 경험과 학문의 대상이지만, 근원적인 세계는 아니다. 근거율이 지배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는 필연성이 있지만, 이 필연성은 주관에 의해 제약된 필연성이다. 표상세계를 이루는 근거율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생성·인식·존재·행위의 근거율이 그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표상의지(Wille)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여기서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라 근거율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일 뿐이다. 참된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세계의 본질은 의지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물자체의 세계는 곧 의지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의지라는 것은 신체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신체는 한편으로는 객관화된 것, 즉 표상된 것으로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 자체의 드러남으로서 존재한다. 여기에서 의지와 신체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의지와 신체는 그것이 드러나는 형식을 통해서만 구분된다. 신체가 표상 즉 객관으로 파악되는 한에서 신체는 근거율에 의해 지배된다. 반면 우리를 신체와 결합된 하나의 개인으로 파악하면 의지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신체가 의지 자체의 드러남이라는 것을 각성할 때 세계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 이때 신체의 운동과 의지의 표현 사이에는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는 글을 쓰는 손의 운동과 함께 한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달리 근거율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신체를 개개로 파악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는 일상어에서의 의지가 아니라 삶의 원리나 에너지로서 유기체와 무기체를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근본적으로 의지를 그 본질로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지는 각각의 사물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객관화의 과정은 의지와 표상의 세계의 관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선 의지가 객관화를 통해서 이념이 되고 이어서 개체화의 원리인 시간, 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서 근거율에 의존하는 표상이 생겨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의 본질도 이러한 의지에 의해서 설명된다고 본다. 인간의 의지는 삶의 의지이다. 이 삶의 의지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것이다. 항상 만족과 안정을 추구하지만 이루지 못하는 맹목적인 삶의 의지는 끊임없이 목적지를 찾아 방황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다.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갈증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권태롭거나 고통스럽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술적인 관조도덕적인 행위금욕이 그것들이다. 예술적인 관조에서는 주관객관이 엄밀히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인간의 정신은 고양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양은 일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도덕적인 행위에서는 쇼펜하우어는 동정심(Mitleid)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 동정심은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인 이해심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동정심을 통해서 개인은 이기주의적인 입장을 버리게 된다. 이때 동정심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게도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술과 동정심으로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는 삶에의 의지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의지의 부정은 금욕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금욕은 세계가 표상일 뿐이고 자아도 표상이며 세계 속의 다양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금욕은 세계와 자아는 궁극적으로 (無)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영향

화가 빌헬름 부쉬가 그린 쇼펜하우어와 푸들.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에 영국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미권 지식인들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아르투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틀에 박힌 것을 깨부수는 개성, 인격이 중요하다고 강변한다. 에머슨은 우파니샤드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다. [10]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와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11]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12]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13]

— 카를 융 자서전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는 톨스토이의 친구이자 당시에 러시아어로 쇼펜하우어를 번역한 사람이다. 톨스토이가 친구인 페트 센신에게 보낸 편지는 페트 센신의 저술《추억의 기록》에 들어있는데 이것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세계의 모든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한다네. 쇼펜하우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 바보들이 많기 때문일 거야'[14]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전반부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15]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16]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전반에 쇼펜하우어는 무시 당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난해하다고 무시되기도 했고, 일부 철학 교사들조차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17][18]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19]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20]

에피소드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여류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이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왠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파일:Elisabet Ney Arthur Schopenhauer 1859.jpg
엘리자베스 네이가 만든 흉상. 1859년 제작.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쇼펜하우어 흉상.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여록과 보유'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 화강암 무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여류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21]

주요 저서

  • 《윤리학의 두 가지의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1841년. -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이 두 논문을 묶어 출판된 것임.
  •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 1851년. - 한국에서 '인생론' 등의 이름을 달고 일부가 번역되어 출판되는 책이다. '소품과 부록' 이라고 불리기도 함. 외국에서도 "삶의 지혜" 라는 식의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하며 소책자나 편역본으로 주로 출판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고 인생에 대한 격언이 명쾌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어권에서 쇼펜하우어의 문장은 최고급 산문이자 탁월한 문학적 글쓰기로 평가받는다.
  •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1814년.
  • 토론의 법칙》(Der handschriftliche Nachlass 라는 유고 중 일부) -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비난하며 인격이 저열한 사이비철학자 등등의 술책을 간파하는 법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했다. "실제 토론에서 상대의 터무니없는 주장 방식을 간파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국내에는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토론의 법칙' 등의 제목을 달고 출판되었다.[23]

주석

  1.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Vol. 1, trans. E. Payne, (뉴욕: Dover Publishing Inc., 1969), 3.
  2.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Vol. 1, trans. E. Payne, (New York: Dover Publishing Inc., 1969), 4.
  3. David A. Leeming, Kathryn Madden, Stanton Marlan, 편집. (2009). 《Encyclopedia of Psychology and Religion, Volume 2》. Springer. 824쪽. ISBN 978-0-387-71801-9. A more accurate statement might be that for a German – rather than a French or British writer of that time – Schopenhauer was an honest and open atheist. 
  4. Raymond B. Marcin (2006). 《In Search of Schopenhauer's Cat: Arthur Schopenhauer's Quantum-Mystical Theory of Justice》. CUA Press. 122쪽. ISBN 978-0-8132-1430-6. It is easy to find many of the underpinnings of Schopenhauer's doctrine of the denial of the will to live in the Theologia Germanica, but only if one is willing to gainsay the anonymous author's theism and Schopenhauer's atheism. 
  5. Dale Jacquette, 편집. (2007). 《Schopenhauer, Philosophy and the Ar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쪽. ISBN 978-0-521-04406-6. For Kant, the mathematical sublime, as seen for example in the starry heavens, suggests to imagination the infinite, which in turn leads by subtle turns of contemplation to the concept of God. Schopenhauer's atheism will have none of this, and he rightly observes that despite adopting Kant's distinction between the dynamical and mathematical sublime, his theory of the sublime, making reference to the struggles and sufferings of struggles and sufferings of Will, is unlike Kant's. 
  6. B. R. Hergenhahn (2009).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Psychology》 6판. Cengage Learning. 216쪽. ISBN 978-0-495-50621-8. Although Schopenhauer was an atheist, he realized that his philosophy of denial had been part of several great religions; for example, Christianity, Hinduism, and Buddhism. 
  7. Arthur Schopenhauer,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Vol. 1, trans. E. Payne, (New York: Dover Publishing Inc., 1969), table of contents.
  8.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참조. 해설:쇼펜하우어는 "대중을 현혹하는 협잡꾼 헤겔과 그 일당"이라는 식으로 매번 비난했다.
  9.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2009, 생애 해설 연보 부분 참조, 기타 쇼펜하우어 판본 참조.
  10. Emerson, Self reliance, 한국어판:에머슨 수상록, 이창배 역 참조.
  11.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역, 2005, '8장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발견하다' 부분 참조.
  12.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13. 카를 구스타프 융, 기억 꿈 사상(자서전), 조성기 역, 김영사, 133쪽~134쪽
  14.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참조.
  15. 브라이언 매기, 철학의 역사, 145쪽, 영향에 대한 설명 참조.
  16. 랄프 비너,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최흥주 역, 해설 부분 참조.
  17.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284쪽, 영국 학자 브라이언 매기의 말
  18.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
  19. 칼 포퍼, 끝없는 탐구, 박중서 역, 20쪽.
  20. 칼 포퍼, 삶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147쪽.
  21.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07, 권기철 역, 생애 해설 에피소드 참조.
  22.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2012, 김미영 역.
  23. 쇼펜하우어, 토론의 법칙, 최성욱 역.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