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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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m71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1월 28일 (화) 02:32 판 (→‎병마와 퇴각)
아르눌프
신성로마제국황제
이탈리아 왕
재위 887년 ~ 899년
전임 카를 3세
후임 루트비히 유아왕
부왕 바이에른의 카를만
신상정보
가문 카롤링거 왕가
부친 바이에른의 카를만
배우자 파리의 오다
, 네우스트리아의 오타
, 빈부르가

아르눌프(슬로베니아어:Arnulf Koroški, 독일어: Arnulf von Kärnten)(850년 - 899년 12월 8일)는 887년부터는 동 프랑크의 왕이자 896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그는 바이에른공 카를만의 서자로 아버지가 죽으면서 케른텐의 공작지위를 물려받았다.

879년 바이에른을 잠시 통치하였고, 880년 아버지 카를만이 죽자 아버지의 영지인 바이에른이탈리아의 상속권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카를 3세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886년 카를 3세노르만 족마자르 족을 뇌물로 매수해서 되돌려보내자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쿠데타를 일으켜 887년 11월 즉위하였다.

890년대 초 동프랑크를 침략한 슬라브 족판노니아 평원에서 격퇴하고, 모라비아로 진격해 마자르 족을 축출하고 모라비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891년에는 갈리아 지역에 침략한 바이킹 족과 교전, 데일에서 바이킹 족을 크게 격퇴하여 승리했고, 로타링기아 내륙에 침입한 바이킹 족을 격파했다. 891년 6월 루뱅플랑드르에서 바이킹족을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그 뒤 교황 포르모소의 초청으로 츠벤티볼트, 라울, 프리울리의 베렝가르 등을 거느리고 이탈리아를 원정, 스폴레토공작가와 교전하였다. 896년] 이탈리아로 입성, 람베르토 2세를 폐위시키고 신성 로마 황제의 위에 올랐다. 만년에는 병마에 시달려 이탈리아 문제에 더이상 개입할 수 없었고, 국내 문제와 노르만 족의 침입, 로트링겐의 폭동 등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초기 삶

아르눌프는 850년 루트비히 독일인의 장남인 바이에른 공작 카를로만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독일인 왕 루트비히의 손자였다. 그러나 아르눌프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케른텐(Carantania) 출신의 리트빈데로 정식결혼 관계는 아니었다. 리트빈데는 바이에른백작 에르네스트(Ernst)의 여동생이었는데, 861년 아버지 카를로만은 다시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에른 백작 에르네스트의 딸 리트빈데와 결혼하였다.[1] 일설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에르네스트의 여동생이 아니라 이때 결혼한 에르네스트의 딸이 그의 생모라는 설도 있다.[2]

리트빈데의 아버지는 노스가우변경백을 지낸 에르네스트이고 어머니는 프로멘 출신 프레데부르가(Fredeburga)였다. 바이에른 공작 카를로만의 정비 이르멘트루드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정부였던 리트빈데는 아르눌프와 헤드비가(Hedwiga, 854~?) 남매를 낳아 주었다.

할아버지 루트비히 독일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아버지 카를로만 3세는 다시 자신의 부왕과 화해하면서 바이에른의 왕이 되어 되돌아갔다. 아르눌프는 어린 시절을 어머니의 고향 케른텐에서 보냈다. 863년 3월 아르눌프는 아버지 카를로만 3세로부터 케른텐의 변경백에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870년 케른텐 공작위를 넘겨받았다. 아르눌프는 어려서 간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케른텐과 바이에른 공작 시절

케른텐 변경령
(서남쪽의 줄무늬 형태의 영토)

879년 아버지 카를로만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바이에른루트비히 3세에게, 이탈리아카를 3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879년 여름과 가을, 그는 루트비히 청년왕에게 바이에른을 위탁받아 현지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해 그는 직접 판노니아를 공략하기도 했다. 879년부터 그는 케른텐 공작과 판노니아 변경백의 지위를 유지했다.

880년 아버지 카를로만바이에른이탈리아의 통치권을 동생 카를 3세에게 넘겼다. 이미 성인이었던 아르눌프는 이에 반발했지만 그는 사생아였고, 그의 권리는 묵살되었다. 이후 그는 계속 바이에른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카를 3세루트비히 청년왕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는 케른텐으로 돌아가 계속 장정들을 모아 사병을 양성하였다. 882년 삼촌 카를 3세는 그를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882년에 일어난 반란에서 그는 판노니아 후작 엔겔샬크 2세를 도왔는데, 이 때문에 삼촌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와 반목하게 되었다.

작센 출신의 오다와 결혼했다가 다시 프랑스파리 백작 외드의 딸 파리의 오다와 재혼하였다. 이미 그는 첩에게서 츠벤티볼트글리스무트 등의 자녀가 있었고, 같은 첩 또는 또다른 첩에게서 사생아 라톨드가 태어났다.

동프랑크의 국왕

정변과 즉위

아르눌프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는 아버지의 영지를 주장하는 선에서 떠나 카를의 폐위를 기도한다. 판노니아의 후작 엔켈샬크 2세가 죽자 아르눌프는 엔켈샬크의 손자인 윌리엄 2세와 손잡고 정변을 준비한다. 카를은 당시 간질과 풍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는 이를 틈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카를이 바이킹의 침입에 적절한 조치를 못하고 887년 11월 귀족들의 반발을 받고 쫓겨날 때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아헨으로 쳐들어가 카를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비록 영토의 대부분을 카를이 지배하는 상태였지만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쪽 영토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왕이 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를 비롯한 이브레아, 프리울리, 밀라노 등의 귀족들, 서프랑크의 유력자인 파리 백작 외드, 부르고뉴루돌프 등의 지지를 얻어내 887년 11월 정변을 감행한다.

파리 백작 오도,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부르고뉴의 라울 등과 손잡았고, 프랑스 국왕이 된 파리 백 외드, 이탈리아 왕으로 선출된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부르고뉴의 라울등을 봉신으로 삼았다. 이어 아르눌프는 이들에게 이탈리아의 군주 자리와 서프랑크의 왕 자리를 약속했다.

888년 1월 아르눌프는 외드서프랑크 국왕 즉위를 승인했고, 베렝가리오이탈리아 국왕 즉위 역시 승인하였다. 2월 아르눌프는 교황청에 영지를 기부하였다.

이민족과의 전쟁, 정복 활동

889년 베렝가리오가 스몰레토의 귀도 3세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축출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베렝가르교황 스테파노 5세가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르눌프는 당시 대모라비아 왕국에 원정중이어서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891년 2월에 귀도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몇달 후 아르눌프는 북쪽으로 진군해 로이벤 전투에 참전, 브뤼셀 북쪽의 딜라 강에서 노르만족의 침입에 맞서[3] 대승을 거두고 그 지역의 변경을 튼튼히하였다.

890년 왕국의 동부를 침입한 슬라브 족판노니아 평원에서 크게 격퇴하여 물리쳤다. 이어 모라비아로 진격해 마자르 족을 축출하고 모라비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891년에는 갈리아 지역에 침략한 바이킹 족과 교전, 데일에서 바이킹 족을 크게 격퇴하여 승리했고, 로타링기아 내륙까지 침입한 바이킹 족을 크게 격파하고 연이어 승리를 거뒀다. 이어 891년 6월 루뱅플랑드르에서 바이킹족을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893년외드가 폐위되고 단순왕 샤를을 추대하자 아르눌프는 그의 즉위를 승인했다. 샤를 3세가 13세의 나이로 서프랑크의 왕에 즉위하자 아르눌프는 소년이 통치가 가능한가 여부를 묻고는, 내전을 끝내기 위해 오도와 샤를을 보름스로 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샤를은 거부하고 보름스로 오지 않았다. 화가 난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으며, 서자 츠벤티볼트에게 로트링겐의 왕위를 넘기고 직접 통치하게 했다.

893년말부터 894년 사이에 다시 모라비아 영토의 일부가 보헤미아 수중으로 들어가자, 895년 아르눌프는 군사를 이끌고 보헤미아를 정벌하고, 보헤미아 공작 보리보이 1세(Borivoj I)에게 종주권을 확인하고 그를 봉신으로 삼았다.

이탈리아 원정

893년 새로운 교황 포르모소귀도람베르트에 대항하여 아르눌프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켜주면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려줄 것을 제의해왔다.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를 보내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와 공동으로 그들의 군사를 격퇴했으며, 바바리안 용병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지원하게 했다. 이듬해에는 아르눌프 자신이 직접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 순식간에 밀라노파비아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계속 진군해 귀도를 공격했지만 내부의 반란으로 퇴각했다. 이때 서 프랑크 왕국에서는 외드가 폐위되고 단순왕 샤를이 왕에 즉위했는데 아르눌프는 외드를 지지하였고, 츠벤티볼트로타링기아왕위에 앉혔다. 894년 1월 베르가모를 함락시켰다.

894년 교황 포르모소스폴레토 공작가의 무단통치를 비판하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뒤 스폴레토의 구이도가 죽자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다시 한번 이탈리아에 있는 자신을 구원할 것을 호소했다. 아르눌프는 바로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한다. 그러나 원정 이후 아르눌푸스는 잦은 병치레에 시달리다가 죽게 된다. 아르눌프군이 북부 알프스를 넘었을 때 그의 봉신을 자처하던 부르고뉴의 라울이 공격해왔는데, 분노한 아르눌프는 후에 자신을 종군하였던 서자 츠벤티볼트를 보내 부르고뉴를 약탈하게 했다. 아르눌프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 도착했고,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람베르트(Lambert II of Spoleto)를 격파했다.

아르눌프가 보낸 선발대는 베르가모밀라노를 점령하여 아르눌프 일행은 손쉽게 로마까지 왔다. 당시 교황 포르모소는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에 감금되어 있었고 이탈리아는 람베르토 2세와 그의 모후 안젤트루드(Ageltrude)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눌프 군이 되돌아간 뒤 포르모소는 다시 산탄젤로 성에 고립되고 만다.

895년 아르눌프는 외드샤를 3세를 다시 소환하지만 샤를 3세는 거부했고, 그해 5월 외드만이 도착했다. 아르눌프는 898년 외드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외드를 지지하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황제 즉위

아르눌프 (왼쪽 끝에 앉은 이)과 오타(오른쪽 끝에 앉은 이)
아르눌프와 봉신들이 그려진 양탄자

895년 9월 포르모소는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9월초 아르눌프는 거병하여 이탈리아에 다시 개입하였다. 895년 10월 재빨리 이탈리아 북부를 손에 넣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때 추위와 눈보라 등 악천후와 질병에 시달렸고, 일부 병사들이 아사, 동사, 감기환자 등이 속출했다. 출정 전,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가 지원을 약속했지만 베렝가리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로마에 도착했다. 토스카니에 도착하자 밀라노 후작 마기눌프(Maginulf)와 파비아 후작 발프레드(Walfred)가 그를 도왔다. 토스카니 후작 아달베르토 2세(Adalbert II)도 결국 람베르트를 포기하고 그의 편에 합류하였다.

896년 2월 21일 로마를 점령하고, 2월 22일 교황 포르모소에의 의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치렀다. 성 바오로의 대성당에서 기름부음 의식과 대관식을 치른 뒤 로마에 머물렀다. 잠시 로마에 머물던 아르눌프는 람베르트를 분쇄하기 위해 계속 남부 이탈리아로 가던중 갑자기 병에 걸려 독일로 철수 했다. 그해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다시 람베르트가 실권을 잡았다.

병마와 퇴각

그러나 풍토병과 간질, 뇌졸중 등의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바로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그런데 아르눌프에게 패하고 교황이 폐위를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람베르트는 승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적법한 황제임을 주장했다. 아르눌프는 아들 라톨드이탈리아의 왕에 임명하고 파비아에 남겨두었으나 람베르트 일파의 공격으로 도주하고 만다. 896년 람베르트는 자신의 폐위를 주도한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그의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재판, 부관참시하기도 한다.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라톨드베렝가리오 1세는 도주했고, 람베르토는 아르눌프가 임명한 궁재 및 그에게 협력한 귀족들을 살해했다. 아르눌프는 바로 군대를 보내 람베르트 일파와 전쟁을 한다.

그 후 아르눌프는 계속해서 병에 시달렸는데 의 소문에는 아르눌프가 반대파에 의해 중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교황은 수시로 아르눌프에게 개입을 요청했지만 그 이후에 아르눌프는 더이상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898년 1월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한 샤를 3세로트링겐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로렌의 변경을 공략, 이어 츠벤티볼트에게 퇴위를 강요했지만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혼란과 최후

이탈리아에서 과로로 얻은 병과 폐질환, 지병인 간질 등의 증세로 계속해서 병고에 시달려 자리에 노운 아르눌프의 생애 말년 3년 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왕권은 불안정한 가운데 모라비아인들과 헝가리인들이 독일에 침입했고, 로트링겐에서는 츠벤티볼트에 대항한 반란, 폭동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이탈리아를 잃었고, 프랑스는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다.[3] 아르눌프는 바로 로트링겐에도 군사를 보내 소요 사태를 강경진압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899년 6월에는 계비 네우스트리아의 오타가 귀족들에 의해 간통죄로 고소당하여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법정에 소환되었다. 아르눌프는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를 사생아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 자문관을 보내 오타를 돕게 했다. 법정에서 오타 황후는 열렬히 무죄를 주장했고, 참석한 귀족들 증 72인의 귀족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어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병세가 심각해지자 바이에른 성으로 내려가 요양하였다.

아르눌프는 899년 12월 8일 바이에른레겐스부르크에서 간질뇌졸중, 폐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왕위는 유일한 적자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이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는 프로방스의 루이 맹인왕이 계승했다.

사후

콘라디안 왕가 출신 오타에게서 얻은 유일한 적자 유아왕 루트비히동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계승했다. 아르눌프의 시신은 리스본의 성 에메람 대성당(St. Emmeram's Basilica)의 카를로만 3세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에메람 대성당에는 후일 그의 부인인 오타와 아들 유아왕 루트비히도 안장된다.

그가 죽은 뒤에도 로트링겐의 반란은 계속 되었고, 900년 그가 로트링겐 왕위에 앉힌 츠벤티볼트는 결국 로트링겐의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다. 그 뒤 유아왕 루트비히로트링겐의 왕위까지 계승했지만 911년 아들이 없이 사망함으로서 그의 직계는 단절된다.

가계

신앙 선교 활동

880년 초 아르눌프는 자신이 정복한 모라비아를 신앙 전교를 통한 위대한 모라비아(Great Moravia)로 만들기로 계획한다. 그는 바바리안 야만족을 신앙을 통해 개화시킬 생각으로 모라비아에 선교하러 가는 니타 주교를 적극 지원했다. 동시에 니타 주교의 선교사업에 방해가 되는 모라비아 야만인들을 통제하고, 위협에서 니타 주교를 보호하기 위해 각별히 힘을 썼다.

같이 보기

주석

  1. Konecny Silvia: Die Frauen des karolingischen Königshauses. Die politische Bedeutung der Ehe und die Stellung der Frau in der fränkischen Herrscherfamilie vom 7. bis zum 10. Jahrhundert. PhD thesis Vienna 1976, p. 139
  2. Annales Bertiniani, pag 106 (라틴어)
  3. 아르눌프 - Daum 백과사전

참고 자료

  • Canduci, Alexander (2010), 《Triumph & Tragedy: The Rise and Fall of Rome's Immortal Emperors》, Pier 9, ISBN 978-1-74196-598-8 
  • Duckett, Eleanor (1968). Death and Life in the Tenth Century.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 Comyn, Robert. History of the Western Empire, from its Restoration by Charlemagne to the Accession of Charles V, Vol. I. 1851
  • Bryce, James, The Holy Roman Empire, MacMillan. 1913
  • Mann, Horace, K. The Lives of the 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Vol III: The Popes During the Carolingian Empire, 858–891. 1925
  • Mann, Horace, K. The Lives of the Popes in the Early Middle Ages, Vol IV: The Popes in the Days of Feudal Anarchy, 891–999. 1925

외부 링크

전임
바이에른공 카를만
케른텐공작
864년 - 888년
후임
츠벤티볼트
전임
카를 3세
바이에른 왕
882년 - 899년
후임
유아왕 루트비히
전임
카를 3세
슈바벤 왕
882년 - 899년
후임
(동프랑크 왕국에 병합)
전임
카를 3세
동 프랑크의 왕
887년 - 899년
후임
유아왕 루트비히
전임
카를 3세
로타링기아의 왕
887년 - 894년
후임
츠벤티볼트
전임
람베르트
신성로마제국 황제
람베르트와 분쟁기간 (896-898)
896년 - 899년
후임
루트비히 맹인왕
전임
람베르토
이탈리아 왕
람베르트와 분쟁 (896-898)
896년 - 899년
후임
람베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