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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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궁주
공주 (궁주)
이름
별호 수안공주 (壽安公主)
수안궁공주 (壽安宮公主)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고려
사망일 1199년 음력 6월
사망지 고려
국적 고려
왕조 고려 왕조
부친 고려 명종
모친 광정태후 김씨
배우자 창화후 왕우
자녀 왕현, 태자비 왕씨

수안궁주(壽安宮主, ? ~ 1199년 음력 6월)는 고려 시대의 왕족이다. 명종광정태후 김씨의 둘째 딸이다. 수안공주(壽安公主), 수안궁공주(壽安宮公主)라고도 한다.

생애

가계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고려의 제19대 명종(明宗)과 그 왕비 광정태후 김씨(光靖太后 金氏)의 둘째 딸이다. (王), 본관개성(開城)이다. 의종(毅宗)과 신종(神宗) 등의 조카이며, 강종(康宗)과는 친남매간이다. 또 희종(熙宗) 등과는 친사촌간이 된다.

수안궁주의 모후 광정태후는 종실 강릉공 온(江陵公 溫)의 딸로, 의종의 정비 장경왕후 김씨(莊敬王后 金氏)와 신종의 정비 선정태후 김씨(宣靖太后 金氏)와는 친자매간이다. 따라서 장경왕후와 선정태후는 수안궁주의 백모, 숙모인 동시에 이모가 되기도 한다[1].

공주 시절

1173년(명종 3년) 음력 4월 25일 정식으로 공주에 책봉되어 그 수안궁공주(壽安宮公主)라고 하였다. 이때 그녀의 언니도 함께 공주로 책봉되어 연희궁공주(延禧宮公主)라고 하였다[2].

수안궁주는 6년 후인 1179년(명종 9년) 종실 창화후 우(昌化侯 祐)와 혼인하였다[3]. 창화후는 숙종(肅宗)의 아들 대방공 보(帶方公 俌)의 증손자이다[4]. 한편 창화후와 수안궁주는 서로 8촌간이며[5], 동시에 창화후가 수안궁주의 고모인 영화궁주(永和宮主)의 아들이므로 고종 사촌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둘의 혼인은 근친혼이다.

1199년(신종 2년) 음력 4월 24일, 진성(鎭星)이 서로를 범하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당시 이 현상을 보고 정통원(鄭通元)이라는 자가 점을 치기를, "금년 6월 하순에, 여주(女主)의 상사가 있을 것이다.(六月下旬, 當有女主喪)"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해 음력 6월 계미일이 되자, 실제로 수안궁주가 사망하였다[6].

수안궁주의 가족

수안궁주의 남편 창화후 우는 원래 창화백에 봉해졌으며, 숙종의 아들 대방공의 증손자이다. 창화후의 아버지는 소성후 공(邵城侯 珙)이며, 어머니는 인종(仁宗)의 딸이자 수안공주에게는 고모가 되는 영화궁주이다. 창화백은 수안궁주와 혼인하고 창화후(昌化侯)로 진봉되었으며, 신종 즉위 후 수사도 상주국(守司徒 上柱國)의 작위를 받았다[4].

한편 창화백과 수안궁주는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두 사람의 아들은 이름이 왕현(王泫)이며, 그 생애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4]. 한편 두 사람의 딸은 희종이 태자이던 시절 태자비가 되었는데, 당시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들려던 최충수(崔忠粹)에 의해 태자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당시 태자비를 폐위할 때 신종선정태후를 비롯한 궁중의 많은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소식을 알게 된 최충수의 형 최충헌(崔忠獻)은 최충수에게 그 딸을 태자비로 들이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최충수가 끝내 말을 듣지 않자 최충수에게 반역을 꾀한다고 하여 그 무리를 토벌하였다. 이후 최충수는 최충헌의 심복들에 의해 참수되었다[7].

가족 관계

수안궁주가 등장한 작품

출처

외부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