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기
손보기(孫寶基, 1922년 7월 7일 ~ 2010년 10월 31일[1])는 대한민국의 사학자, 고고학자이다.[2] 호는 파른이며,[주 1] ‘한반도 구석기 연구의 아버지’로 불린다.[3]
생애[편집]
1940년 휘문고보, 194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1964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4] 1964년부터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박물관 관장, 문과대학장, 한불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고, 1987년 퇴임하였다. 퇴임 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선사문화에 관심을 가졌고 1992년부터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시작하여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속학연구소 소장 및 석주선기념박물관의 관장을 맡았다. 2010년 10월 31일 오후 7시,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여 및 업적[편집]
1964년의 충남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로 널리 알려졌다.[5] 이 발굴로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존재했음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이로써 ‘일본을 앞서 한반도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라는 일제 식민사학의 주장을 과학적이며 합리적으로 뒤집었다. 그 뒤 92년까지 12차례에 걸쳐 발굴과 조사 작업을 벌였다. 2009년, 손보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공주 석장리에 문을 열었다.[3]
1974년 ~ 1980년에는 충북 제천의 점말동굴유적을 발굴하였으며, 한자와 일본어 용어를 한국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는 등 대한민국 고고학에 업적을 남겼다.[6]
1969년부터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성한 고서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7] 1945년 구입한 《규원사화》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이었던 이가원(李家源), 임창순(任昌淳)과 함께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작성하여 국립중앙도서관의 직인으로 인증하였다.[8]
또한 1972년부터 직지심경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활자를 연구한 공로로 독일 마인츠시에서 메달을 받는 등,[9] 고인쇄술 연구에도 기여하였다.
저서 및 논문[편집]
- 저서
- 《한국의 고활자》(1971년)
- 《금속활자와 인쇄술》(1977년)
- 《세종대왕과 집현전》(1985년)
- 《세종시대의 인쇄출판》(1987년)
- 《한국 구석기학 연구의 길잡이》(1988년)
- 《석장리 선사 유적》(1993년)
- 《장보고와 청해진》(1996년)
- 《공부의 즐거움》(공저, 2006년)
-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2009년)
- 논문
- 〈이조전기정치기구의 기능적 분석〉
- 〈석장리 자갈돌 찍개문화층〉
- 〈석장리 후기구석기시대 집자리〉
- 〈미국에 있어서의 광복운동〉
- 〈체질학상으로 본 한국사람의 뿌리〉
상훈[편집]
-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한국인쇄문화상
- 1976년 외솔상 문화부문[1]
- 1989년 성곡문화재단상
- 1990년 옥관문화훈장
- 1996년 제2회 용재학술상
- 2000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세종성왕상
- 2003년 위암 장지연상
주해[편집]
- ↑ ‘파른’은 ‘늘 푸르름’을 뜻한다.
각주[편집]
- ↑ 가 나 한국구석기 개척자 손보기 교수 별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연합뉴스》, 2010.10.31
- ↑ 손보기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가 나 채인택 (2010년 11월 1일). “[삶과 추억] 원로 고고학자 손보기 박사 별세”. 《중앙일보》. 2017년 12월 23일에 확인함.
- ↑ 博士学位, 《동아일보》, 1964.2.5
- ↑ 公州郡下에 石器時代의遺物, 《동아일보》, 1964.11.18
- ↑ 물러나는 「1세대考古學」두巨峰, 《경향신문》, 1987.4.30
- ↑ 古書委員會구성, 《동아일보》, 1969.12.4
- ↑ 고평석, 《한배달》 6호, 1989
- ↑ 西獨「마인츠」市서 孫寶基박사에 메달, 《경향신문》, 1973.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