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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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昭顯世子)
왕세자(王世子)
이름
이왕
李汪
신상정보
출생일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645년 5월 21일(1645-05-21) (향년 33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전
배우자 민회빈 강씨
종교 유교(성리학)
능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소경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는 인조인렬왕후 한씨의 적장자이다.

그의 성명은 이왕(李汪)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종(봉림대군)의 동모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의 한사람으로 잡혀갔으며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선교사 아담 샬 등과 서구 문명을 접하고는 반청 노선보다 대청 실용주의로 전환하였다. 1644년 11월에 석방되어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생애

세자 시절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 인조가 왕이 되자 1625년(인조 3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와 함께 성밖으로 나왔다.

청나라 인질 생활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숭덕제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자,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핍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전하기도 했다.

1644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는 (지금은 라틴어역되어 전하는) 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귀국과 부왕의 냉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의문의 최후

1645년 음력 2월 9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5월 21일(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7월 20일(음력 6월 27일)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사후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친아버지 인조는 세자 폐위시키고 '폐세자'가 부르다가 고종 세자를 복권되었다. 그해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1] 그 뒤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소용 조씨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2]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11월 2일(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3]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양력 1649년 2월 4일) 병으로 사망했다.[4] 셋째 경안군 석견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유적지

그러나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며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요녀석, 녀석의 유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청나라에서 돌아오기 전 청의 황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주었는데, 소현세자는 황제 청태종의 벼루인 용연(龍硯)을 청했고,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온 백성들과 함께 갈 수 있기를 원했다. 돌아와서 인조를 만난 두 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선물에 대해 답하자, 인조가 노하여 소현세자가 받아온 벼루를 그에게 집어던졌다고 한다. 이때 인조가 '용연석'이라고 외친 말이 ‘요년석’ 또는 ‘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5] 이는 전형적인 민간 어원론의 오류이고 낭설이다.[출처 필요]

가족관계

  • 부왕 : 인조(仁祖)
  • 모후 : 인열왕후(仁烈王后)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
    • 아내 : 민회빈(愍懷嬪) - 우의정(右議政) 강석기(姜碩期)의 딸
      • 장녀 : 군주(郡主, 1629년 - 1631년)
      • 차녀 : 군주(郡主, 1631년 - 1640년)
      • 장남 : 경선군 백(慶善君 栢, 1636년 - 1648년), 아명은 석철(石鐵)
        • 양손자 : 임성군 엽(臨城君 熀) → 둘째 동생인 경안군의 두번째 아들
          • 양증손 : 밀남군 감(密南君 堪) → 임성군의 형인 임창군의 두번째 아들
      • 삼녀 :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년 - 1655년) - 증 능창부위(贈綾昌副尉) 구봉장(具鳳章)에게 하가
      • 차남 : 경완군 석린(慶完君 石磷, 1640년 - 1648년)
      • 사녀 :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년 - 1682년) - 행금창부위(行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에게 하가
      • 오녀 : 경순군주 정온(慶順郡主 正溫, 1643년 - 1654년) - 황창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하가
      • 삼남 : 경안군 회(慶安君 檜, 1644년 - 1665년), 아명은 석견(石堅)
        • 손자 : 임창군 혼(臨昌君 焜)
          • 증손 : 밀풍군 탄(密豊君 坦, 1698년 ~ 1729년)
            • 고손 : 상원군 진석(商原君 晉錫, ? ~ 1733년)
          • 증손 : 밀원정 용(密原正 墉)
            • 양고손 : 항석(恒錫) → 상원군 진석의 친동생이다.
          • 증손 : 밀천군 담(密川君 墰)
          • 증손 : 밀평군 집(密平君 㙫)
          • 증손 : 밀운군 훈(密雲君 壎)
  • 장인 : 강석기
  • 처남 : 강문성(신흠의 사위), 강문두(신흠의 손녀사위,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과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사위이다)

관련 작품

드라마

관련 서적

같이 보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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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왕조실록 (1645년 8월 26일).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인조실록 46권, 23년. 2008년 11월 18일에 확인함. 
  2. 조선왕조실록 (1645년 9월 10일).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인조실록 46권, 23년. 2008년 11월 18일에 확인함. 
  3. 조선왕조실록 (1648년 9월 18일).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인조실록 49권, 26년. 2008년 11월 18일에 확인함. 
  4. 조선왕조실록 (1648년 12월 23일).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인조실록 49권, 26년. 2008년 11월 18일에 확인함. 
  5. “<송백헌의 어원산책> '요년석' - 볼모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용연석'에서 유래)”. 2008년 12월 4일에 확인함. 

바깥 링크